222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아무 느낌 없다는 그 말조차 이미 뭔가를 인정해버리는 말이라는 걸 너는 알까.
나중엔 알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네 대답이 가진 함의를 알 수 없겠지.
넌 이 질문 자체를 부정했어야 해. 나는 그렇다 해도, 아니라 해도 함정인 질문을 한다는 걸 까먹었구나.
내 말에 설원의 표정이 더더욱 볼만해진다.
“그, 런, 뜻이 아니라....”
당황해선 무슨 말인가 하려 하지만 함정을 이미 밟아버린 이상 발을 떼는 건 불가능하다. 알코올에 절여진 머리로 네가 지금 나를 막아서거나 멈출만한 어떤 대답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설원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다. 설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다리로 설원의 허리를 감싼 채, 나는 얼굴을 들이민다.
“하, 하지...마.”
“왜, 아무 느낌 없잖아.”
가볍게 키스한다. 역시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설원은 어떤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 느낌 없다면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해도 괜찮겠지. 아무렇지 않고, 혐오스러운것도 아니니까.
나도 취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도 취해서, 내가 이러는 이유를 확신할 수 없다.
단지 너를 괴롭히고 싶을 뿐인지도 몰라. 예전에는 너를 말로 괴롭혔지만, 이젠 몸으로도 괴롭히고 싶은 것뿐일지도 모르지.
내가 아무 느낌이 없다고 말한 것도 설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너와의 입맞춤이 혐오스럽진 않아.
세 번쯤 더, 입맞춤을 하자 설원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녀석은 나를 밀어내지 못한다. 왜 밀어내지 않는거지? 날 밀쳐내고, 뺨을 때리고, 윽박지를수도 있잖아.
왜 그러지 않지? 그러면 내가 더 망가질까봐서?
“취한 것 같은데. 제발 그냥.... 진짜. 그만 하라고.”
설원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고 연거푸 입맞춤을 한다. 그 목을 살짝 끌어안은 채, 언제든 입맞춤을 할 준비가 된 채로.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시선은 가깝다. 이렇게나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봤던 적은 없었어.
내 입술을 살짝 핥고, 이번엔 조금 더.
촉촉한 입맞춤을 한다. 메마른 입맞춤과는 조금 더 다른 느낌으로, 우리의 입술이 서로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그만, 해.”
설원이 낮게 으르렁거린다. 소리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이 미친 짓거리를 박헌영이 눈치챌 수도 있기 때문일거다. 설원이 큰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조차 이용한다.
내가 몇 번 더 입맞춤을 하자, 설원의 몸이 반응할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맞닿은 몸에 느껴지는 직접적인 반응은 없다. 그건 그거대로 묘하게 안심되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 섭섭한데.
너, 고자야? 아니면 정말로 아무 느낌 없는거야?
내가 다시 얼굴을 가져가자 설원이 짧게 씹어뱉듯 말한다.
“씨발. 진짜.”
-턱!
설원이 욕설을 내뱉으며 내 뒷통수를 잡은 채, 제 얼굴 쪽으로 나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 행동이 너무 폭력적이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당황할만한 짓을 한다.
혀를 넣어온다.
“읏! 읍! 우, 아.”
뜨거운 혀가 내 입 속을 휘젓는다. 뭐야, 지금 뭐 하는거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곤란한 거 아니었어? 지금 뭘, 하려는거야?
“읏! 흐, 흐으. 흐. 웁, 우우....”
나도 모르게 설원을 밀어내려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하지만 당연하게도 설원은 밀쳐지지 않는다. 두피가 찌릿찌릿해져올 정도로 설원이 날 거칠게 끌어당기며 입을 맞춘 채 혀로 내 입 속을 범한다.
주도권을 난데없이 빼앗겨버린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다. 나는 온전히 저항하는 것도 아니지만,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입을 닫진 않지만, 혀로는 설원의 혀를 밀어내려 한다.
결과적으로, 녀석과 내 혀가 얽히며 타액이 섞인다. 소극적인 내 저항이 오히려 이 입맞춤을 온전하게 만들어버린다.
숨이 찰 정도가 되어서야 설원은 내게서 얼굴을 떼어낸다.
“하아.... 하아.... 하아.... 읍! 윽!”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기 무섭게, 설원이 다시 한 번 내 입술을 덮어버린다.
지독하고 끈질긴 동시에, 질척한 입맞춤이다. 입맞춤은 입맞춤인데 거기에 애정은 전혀 없다. 설원은 마치, 날 짓밟고 짓누르려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쩐지, 이 접촉이 나는 강간처럼 느껴진다.
설원이 날 강간하고 있어.
내가 방금 설원을 범한 것처럼. 나보다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를 범하고 있어.
“으읏.... 으.... 후. 후우....”
머릿속이 점점 어지러워진다. 사고의 속도가 점점 느려져선, 결국 멈춰버린다. 의식이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점차 들어갈 때 즈음.
설원이 내게서 떨어진다. 그렇게나 끈질기게 입을 맞췄는데 설원의 눈은 놀랍도록 침착하다.
아,
네가 왜 이랬는지 알 것 같다.
“됐냐, 씨발.”
“하아.... 하아....”
그걸 말하기 위해서였어. 내 장난질에 화가 나서, 내가 한 것보다 더 심한 짓을 한 거였어.
“아무 느낌 없다고.”
“하아.... 하아.... 하아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도 벅차 설원의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다. 설원은 나를 번쩍 들곤 소파에 내던지듯 눕혀버렸다.
“잠이나 자.”
설원은 등을 돌린 채, 나를 외면한 채 앞을 보고 있다. 정말 아무 느낌도 없었던걸까. 나는 소파에 누운 채 설원의 등을 본다. 화가 나서 방에 들어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가 잠드는 게 무섭다고 한 건 기억하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어쩐지, 바보같다.
아무 느낌 없다고 했고, 설원은 진짜로 그런걸까. 혐오스럽진 않지만 그렇다 해서 뭔가 동하지도 않았는가.
설원은 아무렇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게 되어버렸다. 분명히 나는 뭔갈 느꼈다.
짐승같은 그 행동은 분명히 나를 짓누르고 억누르고, 나를 폭력적으로 설득시키려는 행동이었겠지만.
말로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나를 범하는 것 같은 설원의 그 행동 속에서, 나는 분명히 뭔가를 느꼈어.
공포도 두려움도 혐오도 아닌 다른 뭔가를.
분명히, 느꼈어.
나는 병들었다. 마음이 병든 나는 영혼이 병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말들은 병든 말일거다. 병든 말로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마 나의 병듦을 과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거다. 하지만 그 병듦을 알아줄 수 있는 설원이 있기에, 나는 내 병든 말들을 무기로 사용해 설원을 얽어맸다. 못된 놈이 잘 살듯, 썅년이 벌받지 않는다.
어렸을 적, 아직 소설을 읽기 전 나는 만화를 즐겨봤다. 그리고 순정만화를 본 일도 꽤 잦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어린 시절부터 순정만화가 역겨웠다.
순정만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거다. 거기에는 몇 가지 클리셰가 있다. 여주인공은 한없이 착하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이 첫 번째 공식이며, 그 여주인공에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가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아주 높은 확률로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게 두 번째 공식이다.
그리고 착하디 착한 여주인공이 친구와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눈물을 머금고 그 마음을 포기하려는 것이 세 번째 공식이다. 소위 썸 타던 남주인공에게 차갑게 대하기 시작하며, 서브 주인공으로 갈아타려는 시도를 한다. 남자 주인공은 혼란에 빠진 채 여자 주인공의 변심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모든 클리셰에 앞서는 순정만화의 절대원칙이 있다. 여주인공은 썅년이어선 안된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반드시 메인 남주인공과 이어진다. 친구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데 결국 진짜 주인공과 이어져야만 한다는 대원칙 아래에서, 여주인공은 착해빠지기만 한 등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세계가 착해진다. 오직 여주인공에게만 착해진다. 엮이지 않으려 외면하고 외면하지만 여주인공은 ‘본의 아니게’ 아프거나, 다치거나, 무슨무슨 사건이 벌어져 남주인공과 끊임없이 엮이게 된다. 그리고 그 엮임의 끝에 결국 울고불고 하면서 결국 남주인공과 이어지게 된다. 주인공 친구는 그 때 악역으로 변화하거나 주인공의 사랑을 울면서 응원해준다. 뭐 어쨌건, 결국 여주인공은 썅년이 되지 않은 채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
순정만화의 이 클리셰들을 이룩하기 위해서 세계가 착해진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세계 자체가 여주인공의 편이 된다. 그 사실은 곧 친구와 서브 남자 주인공에겐 무조건적으로 불리한 세계를 의미한다.
과연, 여주인공은 썅년이 아닌가? 자신에게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세계에 살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놓고 여전히 착하고 상냥하고 어리숙하기만 한 선의 포지션에 서는 것이야말로 썅년이 아닌가? 그 무엇도 희생하지 않은 채 얻기만 해놓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 결말은 그릇되지 않았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쥐어지기만 한 것에 눈물만 짜면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은, 사실 주인공 커플 둘을 제외한 모두에게 불행한 세상이다. 그 세상의 수혜자임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 위선이야말로 죄악이 아닌가. 착해빠진 것만으로는 사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 세계의 편중이 싫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거리든 해서 얻어내야만 한다. 썅년이 되어야만 한다면 얼마든지 될테다. 설원을 사랑하고 애정하지 않으면서 설원을 얻기 위해, 착해빠진 채 남아있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례로, 착하기만 한 박헌영과 달리 나는 이미 설원의 깊은 곳을 건드렸다.
아침.
“피곤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윗층에서 내려오는 박헌영은 그 부스스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다. 어제 있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태도에서 이미 느낀다. 모르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 하기로 한 셈이겠지.
이게 순정만화라면 여주인공은 박헌영일거다. 나는 이미 악역화된 여주인공의 절친한 친구 정도겠지. 네가 눈물을 삼키는 동안 나는 남주인공을 독점하려 하는 썅년일거다.
박헌영에겐 아쉬운 일일테고 내겐 다행인 일이겠지만.
현실은 순정만화가 아니다. 이 세계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나는 박헌영을 보며 웃는다.
“폭죽 사러 가야지?”
“아, 맞다!”
나는 이미 썅년이고, 더한 썅년이 될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
[작품후기]글 쓸 시간이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