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정상이라는 건 적당히 이기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을 말하고, 나 같은 건 그런 적당한 이기심이 없어도 거르는 게 맞겠지. 이건 결국, 승낙의 의미인가.
내 곁에 남겠단 뜻인건가. 내가 요구한 건 날 사랑해달라는 거지만, 굳이 그게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저 얽매인 것뿐이라도 충분하다.
광기를 설명하는 영어는 꽤 많은 단어가 있지.
미쳤다(mad, insane, crazy, rabid).
번역하면 같은 말이지만, 실상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나는, 그리고 너는.
저 네 단어 중 무엇으로 설명해야할까. 아마 우린.
미친(insane)걸거다. 그리고 너보다는 내가 조금 더 미쳤겠지. 나는 술을 마신다. 내가 혼자 마시려 하자 설원이 잔을 내민다.
“굳이 혼자 마실 건 없잖아.”
“...그러네.”
-챙
설원과 잔을 부딪힌다.
풀빌라 펜션에서, 호화로운 이층짜리 펜션에 창밖에는 스파가 있는 넓고 화려한 펜션에서.
우리는 무드등 하나만 켜놓은 채, 소파 앞에 서로 거의 착 달라붙다시피해선 소주와 과자를 먹는다. 잔을 비운 뒤, 멍하니 과자를 씹는다. 어쩐지 우스워서 피식 웃는다.
“원룸이랑 다를 거 하나도 없네.”
“그러게.”
“박헌영이 들으면 화나겠다. 기껏.... 기껏....”
말을 차마 마무리짓지 못한다.
풀빌라 따위에 감사하지 않는 걸 화내진 않겠지. 내 비겁함과, 내 비열함과, 내 저열함을 환멸하고 화내겠지. 아침까지만 해도 아픔에 이름붙이지 않겠다 말해놓고 밤에는 설원에게 매달린 나를 보고 화가 나겠지.
그리고 그 아픔을 무기로 설원과 이렇듯 밀회같은 술자리를 갖는 걸 화내겠지.
내 죄는 풀빌라에 감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으니까. 오늘 나는 또 다른 죄를 쌓았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설원이 내 잔에 소주를 따른다.
“본인 생각하기에도 벅찬 주제에, 배가 처 불렀구만.”
설원의 독설에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 주제넘게 누굴 생각하고 이럴 때가 아니지. 나 자신을 추슬러야 남들에게 피해를 안 줄 테니까.
“그렇네.”
“...풀죽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
“잘못했어?”
“아니 뭘 또 잘못까지 나오냐?”
나는 설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그럼, 가만히 있어.”
“이게 뭔.... 하아....”
이건 설원을 유혹하는건가. 설원이 나를 좋아하게 하도록 이런 짓을 하는걸까. 아마 그럴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설원에게 성애를 느끼지 않는다.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순수한 집착이라는 건 이런 식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변하게 된 뒤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대개, 삶에 도움이 된다기보단 삶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어버렸다.
설원을 바라보지 않은 채 묻는다.
“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그냥 가능성에 대해서 묻는거야. 나는 널 사랑하진 않아. 하지만 너는 그럴 수 있겠냐는거지.”
설원은 잠시 말이 없다. 우리의 말은 이상하다. 분명히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너무나 덤덤해서, 내가 뻔뻔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분명히 여기에는 나와 설원 둘뿐인데, 나는 설원에게 너는 쟤를 사랑할 수 있어? 이런 느낌으로 물었다. 대상이 나인데, 나는 내가 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나를 타자화해버렸나. 나는 나 자신과 동떨어져버린건가.
“그러고 싶지 않은데.”
“왜?”
“평범한 사람이랑도 연애하기 싫은데.”
설원은 고개를 돌려 태연하게 머릴 기대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너 같은 사람이랑 연애하면 존나, 존나 끔찍할 것 같아.”
그런가. 솔직히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도 비정상인 사람과 정상적인 연애가 가능할거라 생각하진 않을거다. 연애혐오자인 설원이 뒤끝 더러울 게 뻔한 나와 연애하는 걸 상상할리가 없다고 하니, 그건 당연한 말 같다.
“내가 뭘. 솔직히 막상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설원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뭐든지’말야.”
말 그대로 뭐든지.
“제발, 누나는 진담이라서 개 소름끼쳐.”
박헌영은 농담이지만 나는 진심으로만 말한다. 그렇기에 설원은 진짜로 조금 겁이 난 것처럼 입술이 살짝 떨린다. 이미 다 뱉어버린 말 가식 떨어 뭐하지?
“어쨌건, 그러고 싶지 않건 그러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럴 수 있을 것 같냐는 게 내 질문이었어.”
“사람 일을 씨발, 어떻게 알아.”
설원이 신경질적으로 소주를 들이키고, 나도 한 잔을 마신다. 그건 가능성이 있다는 걸 말하는거다. 그리고 일단 지금은 아니라는 걸 말하는거다. 나는 머리를 들고, 몸을 바로세운 뒤 설원을 바라본다.
“사람은 외면만 보니까. 외면이 자신의 성애방식에 걸맞으면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뭐건 상관없는걸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사람 일은 몰라. 난 딱 그렇게만 생각할 뿐이라고.”
“내 얼굴을 보면, 내 몸을 보면.”
왜 부끄럽지 않은걸까.
이런 날것 그대로의 말들을 하고 있는데 왜 수치스럽지 않을까.
“하고 싶을 것 같다는 뜻인거지?”
“걱정하지 마.”
설원은 씨익 웃는다.
“혹시라도 내가 누날 사랑하고 연애 비스므리한 게 하고싶어지면 혀깨물고 죽어버릴거니까. 그게 더 깔끔하지 않겠어?”
설원도 미친놈인 건 매한가지다. 연애가 싫고, 나 같은 사람과의 연애는 더더욱 싫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게 된다한들 차라리 죽어버리겠단 소리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설원과 내가 연애를 하게 되는 미래가 오지 않으리라는 건 알겠다.
“그렇게 연애가 싫어?”
“그래. 언젠가 끝날 것을 위해 너무 많은 걸 소비해야 해. 비경제적이야.”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경제적이라는 말과 우린 너무 안 어울리는 족속들 아니었나?
“사람이라는 건 원래 대부분의 상황에서 합리적인 게 아니야. 꼴리는 부분에서만 합리적인거지.”
연애에 대해서만 합리적이다. 언젠가 부서질 것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쌓아나가야만 하고 나중에 그것이 무너질 때 느끼는 공허감과 박탈감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상당히 골치아픈 부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 설원 너는 원래부터 상당히 골치아픈 놈이었지.
그런데 이상하지, 너나 나나 망가진 인간일텐데. 나는 왜 너에게서만 위로를 느낄 수 있는걸까.
너는 제대로 된 인간은 분명히 아닌데. 왜 네게 집착하는걸까. 단지 설원이 예전부터 친구라서 그런걸까. 분명히 그런 이유뿐만인 건 아니다.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서, 오히려 그게 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술을 마신다. 한 병, 두 병, 세 병째를 비워간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고, 짐짓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술이 비워져갈수록, 우린 점점 더 해괴한 소리들을 해나간다. 설원이 말한다.
“주체성과 자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걸까.”
“주체성이 조금 더 이해하기 좆같은 말이야.”
“뭔 소린데 그게?”
“자존이 확보된 이는 주체가 될 수 있고, 주체가 된 이는 주체성을 갖게 되니까.”
“그건 무슨 말장난이야? 그럼 자존이랑 주체랑 같은 말이잖아?”
자존하면 주체가 되고 주체가 되면 주체성을 갖게 된다. 그러니 설원의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푹 쉰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골치아픈 말을 하려니 혀가 말리는 것 같다.
그래도, 하던 말은 마저 해야지.
“A이면 B다가 아니라 A이면 B일 수 있고 B이면 C일 수 있다가 왜 A는 C가 되냐 이 바보놈아....”
“그게 그거지 뭐야.”
“그게 그거면 새끼야 철학이 왜 있고 인문학이 왜 있는데? 이게 진짜....”
“한 대 치겠다?”
“말해도 못 알아듣는 멍청이를 내가 때려서까지 가르칠 것 같냐?”
바보자식.
뭐만 말했다싶으면 넘겨짚기나 해버리고, 아는것도 없으면서 뭐라고 떠벌떠벌거리는 건 좋아하고. 내가 뭐라 말하면 되도않는 지식으로 반박이나 해대고.
“세상과 나 사이를 인식하는 게 주체성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건 또 어떻게 아냐....”
공부도 안 한 주제에 가끔은 배우지도 않은 걸 알고.
“그래도 뭐, 자존해야 주체가 된다는 건 꽤 그럴듯하네. 그럴듯한게 아니라 당연한 말이네.”
묘하게 통찰력 같은 게 있고.
“진짜 짜증나네....”
“뭐가?”
공부로 세상을 알아간 나는, 내면에서부터 주체성을 완성시킨 설원이란 녀석이 항상 별종처럼 느껴졌다. 너는 공부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공부해낸 채 갖고만 있던 개념들을 삶에 적용시키고 있는지.
“너 또라이라서.”
“지 얼굴에 침 뱉기는.”
“하.”
이상해.
우리 둘 다 정상이 아니겠지만. 정상이 아닌 우리들의 시각에선, 우리들의 세계에선.
세상 모두가 비정상이었다. 정상인들의 마을에 들어간 애꾸들처럼, 우린 둘 다 비정상이다.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선 오직 우리만이 정상이었다.
세상에 단 둘이 남았다면,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상대에게는 세상 전부나 다름없는 가치가 지워질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세상에 나는 설원을 유일한 타인으로 생각한다.
내가 인정한 유일한 타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 그 틈에 너는 들어왔다. 사랑이 아닌 것 같지만. 사랑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사랑이라 해도, 사실 별 무리는 없는 거 아닐까.
정신이 몽롱해진다. 피곤한데 잠을 못 자서 이제 취기가 올라오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술기운이 두려움까지 잠재워버렸는지 잘 수 있을 것 같다. 설원은 아까부터 마신 술 때문인지 나보다 한 술 더 떠선, 눈이 반쯤 감겨있다.
자는건가. 소파에 등을 살짝 기댄 채 몽롱해진 설원을 보면서,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뭔가, 하고 싶어진다.
입맞춤을 하면, 욕정이 생기나?
욕정이 생긴다면, 설원을 사랑하게 되나?
육체적 욕망과 마음은 다른 문제겠지만, 육체적 욕망은 곧 마음을 이끌어내는 단초가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취했다한들, 몰래 하고픈 건 아니다.
그래서.
“설원.”
“왜....”
“키스, 해볼래?”
위험한 짓을, 하고 싶어졌다. 그러자 설원은 눈을 부릅뜨며 날 노려본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궁금하지 않아?”
나는 설원에게 조금,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다. 이건 술기운을 빌린 용기인가. 아니면 만용인가. 아마 만용에 가깝겠지만 궁금하기도 하다.
“욕망이 있어야 행동하는거지만, 그 반대도 가능한지.”
만약 설원과 스킨십을 하게 된다면 후천적으로 갈망이 발생할 수도 있는가.
“행동이 욕망을 발생시킬 수도 있는지. 궁금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유사준의 경우를 빌어 이미 한 번 경험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몸을 섞었고, 그것은 끔찍한 혐오감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지금 설원에게 집착한다. 유사준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집착은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나? 이미 집착이 욕망과 가깝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뀌어질 수 있나?
스킨십을 통해 그것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어차피 이까짓 것, 이젠 가리고픈 마음도 없고 여유도 없다. 나는 무너졌고, 거기에는 남성성도 여성성도 없다.
그저, 더 이상 무너지고 싶지 않기에 설원이 필요하다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가릴 게 없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대답을 기다릴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이미 설원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살과 살이 맞부딪는 소리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내가 얼굴을 떼자 설원은 눈을 크게 뜬 채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뺨이라도 때리려나.
“이...게.... 뭐 하는....”
설원은 술기운과 당황감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 무슨 느낌이었던걸까. 잠깐 닿았던 살의 감촉을 기억하고 싶지만, 술기운에 잊혀졌다. 그렇기에 그 맞닿음이 환기시켰던 감정 또한 휘발되었다.
방금의 그 닿음이 거짓말같아서.
“!”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살과 살이 닿는 것에 불과한데 입술과 입술의 맞닿음은 어째서 특별하게 여겨지는거지? 왜 입맞춤은 특별하다 생각되는걸까.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입술을 뗀다.
설원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밀쳐내지 못하고, 경악한 채 굳어버렸다. 살과 살이 닿는 느낌, 조금 따뜻하단 감각만 있을 뿐 그것은 전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술이 나를 무디게 한건지, 내가 나를 무디게 한건지는 알 수 없다.
설원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아무 느낌도 안 들어.”
그저 그런 것일 뿐. 설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대체, 대체 왜 이러는데.... 왜, 이래야 하는건데....”
박헌영이었다면 밀쳤겠지만, 설원은 나를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날 밀어버리면 내가 산산조각나버릴거라 생각이라도 하는건지.
너는 날 밀어낼 수 없구나.
날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너는 날 밀어내지 못해. 설원이 이를 악문다. 분노와 슬픔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설원의 갈등이 눈에 보일 듯 선연하다.
이를 악문 채 설원이, 씹어 토해내듯 말한다.
“아무, 느낌, 없다고 했지? 이번엔 넘어갈 테니까, 이런 짓 하지 마.”
“너는.”
“뭐?”
“말했잖아. 널 사랑하지 않지만 네가 날 사랑했으면 한다고.”
이건 내가 무슨 느낌을 얻기 위해서 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동시에 설원에게도 적용된다. 행위에서 감정이 발생하나. 설원은 사람을 사랑해야 그런 행위를 하고파한다. 그러니 나는 설원의 방식과는 반대로 행동했다.
나는 그 맞닿음에 의미부여를 할 수 없다. 어떠한 욕망도 일지 않았다.그렇다면 너는.
너는 어땠지?
설원의 그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보며 분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할텐데. 이 녀석을 시험에 빠뜨리는 나는 썅년이고, 그 입장에서 분명히 이런 짓 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설원을 괴롭히고 싶어. 내 폭력에 갈등하는 설원의 모습을.
조금 더, 보고싶어.
“너도 아무렇지 않아?”
나는 취했다.
하지만 멍청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설원은 나보다 술을 조금 더 마셨다. 그렇기에 설원은 이성이 많이 흐려졌다.
그렇기에, 내 이 질문이 함정이란 걸 눈치채지 못할거다.
설원은 이를 악문 채 고갤 젓는다.
“나도, 아무 느낌 없어.”
넌 바보구나.
함정을 제대로 밟았어.
“그럼, 너도 나도 아무 느낌 없으니까.”
나는 얼빠진 설원을 보며 웃는다.
“계속, 해보자.”
넌 진짜 바보야.
네가 아무 느낌 없었다고 하면 아무 느낌 없었으니까 계속 해도 되는거잖아.
무슨 느낌이 있었다고 하면, 그건 너대로 나한테 끌릴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니까 결국 그것도 웃긴 대답이고.
재미있는 건 뭔지 알아?
아무 느낌 없다는 건, 혐오스럽지도 않다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