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미쳐버렸다. 내가 규명되는듯한 감각에 넘어가버려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을 취한 것처럼 지껄였다. 설원은 아마도 나를 버리지 못하겠지만, 차라리 버려줬으면 한다.
내 망가짐을 토해낼 때에는 두서없이 쏟아냈지만, 그것은 되새길수록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만 떠오른다. 필요 이상으로 과잉된 감정을, 과잉된 상황에서 비틀린 방식으로 드러냈다.
나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걸 기뻐해야할까.
내가 얼마나 미쳐버렸는지 확인한 것을 기뻐하는 건, 내가 더 정신이 나갔다는 걸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거다. 설원은 이를 악문다.
“갑자기....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가 아니야.”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예전에 이렇게 되어버린 걸, 지금 안거야.”
“내가 도망가버리면 어떡할건데.”
그 폭언을 내가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고 사실이 그러하다. 설원이 내 집착에 응해야만 할 의무같은 건 없다. 오직 설원의 선량함에 기댈 뿐이다. 그렇지, 설원이 날 돌봐야 할 이유같은 건 없지.
“네 선택이겠지.”
설원이 떠난다면 나는 혼자가 되겠지. 타인을 상실한 세계에서 혼자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누구와도 교감하지 못한 채 고통과 고독을 견뎌야만 할거다. 설원이 내 생각만큼 바보가 아니라면, 날 떠나는 게 맞겠지.
그래, 차라리 가버려.
나같은건 신경쓰지 말고 사라져버려. 이런 거하고 함께 있으면 너까지 맛이 가버릴 게 분명하니까.
설원이 정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면 박헌영 쪽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선택일거다. 나를 선택해서 설원이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우린 이성과 논리를 논하면서 정작 인생은 그렇게 살지 않았지. 그랬다면 이렇게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모순이니까. 지성을 논하는 우리들은 지성적으로 살되 이성적으로 살진 않았으니까.
설원은 이를 악문 채, 눈이 벌개져선 나를 노려본다.
내가 밉고 싫겠지. 이렇게까지 말하는 나를 전혀 사랑할 수는 없을거야. 완전히 무너지고 망가져버린 내게서, 너는 옛날의 이선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조금쯤, 너는 나를 존경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 모습 어디에도 네가 존경하던 이선준은 없겠지. 나는 변했고, 단순히 변한 게 아니라 추락해버렸다. 이 추락을 너는 어찌 여길거지?
“지금 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말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설원에게 들을 답이 목적이 아니었다.
“...날 외면해도 좋아. 하지만 부탁이 있어.”
“말도 안 되는 거라면 듣고 싶지 않아.”
“쉬운거야. 어려운 거 아니야....”
나는 망가져버렸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망가져버렸어. 그리고 그것은 내 몸에도 영향을 끼친다.
“뭔...데?”
설원이 주저하며 물어왔고, 나는 설원을 올려다보며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
“흐.... 흐흐.... 흐흐흐흐..... 나, 나 있잖아. 나....”
“왜, 왜 그래....”
“흐,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어.”
밤이 두렵다. 이 정신나간 대화가 끝나고 나는 잠자리에 들어야겠지. 하지만 그걸 상상하는 것 자체가 소름이 끼친다.
자다가 호흡곤란이 와버리면 어떡하지? 자다가 발작하면 어떡하지?
아니.
나는, 자면 죽어. 자다가 죽을거야.
그런 두려움 때문에 미칠 것 같다.
“자다가, 자다가 죽을 것 같아서. 잠을 못 자겠어....”
나는 여기까지 와버렸다. 단 하루만에, 몇 달 앓은 것도 아닌데 단 하루만에 세 번의 발작을 겪고 나서 자는 게 두렵다. 오늘이 처음이라 그런걸지도 모른다. 오늘을 잘 넘기면 내일도 괜찮을거라는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선례를 만드는거다.
“나 잘 때까지, 옆에 있어줘. 다른 걸 하자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래.”
이런 말을 하는 내 스스로가 처참해서 덜덜 떤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오늘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말한다. 오늘이 지나면, 제대로 잠들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거라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원이 나를 환멸하고 질색해서 사라진다고 해도, 일단 오늘밤만큼은 있어줬으면 한다.
설원의 표정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려온다.
“오늘은.... 그렇게 하자.”
내일부터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일단 내 말대로 하겠다고, 설원은 말했다. 이건 설원이 내게 보이는 마지막 연민일까. 아마 오늘 밤 설원은 고민하고 답을 내리겠지. 내가 역겨우면 더 이상 나를 보지 않겠다고 말하겠지.
소파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아무래도 방에 같이 들어가는 건 더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내가 그러겠다고 했다.
박헌영이 자고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이층에 난 창문으로 나와 설원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을리는 없다. 거리가 꽤 멀었으니까. 다만 지켜보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웠고, 설원은 소파 아래, 내 앞에 앉았다.
원래는 먹을 게 더 많았는데, 찜찜한 상황이 되어버려 오늘은 이대로 끝이다. 설원의 앞에는 소주병과, 과자들이 놓여있다. 내가 잠들 때까지 술이나 마실 셈인가.
술이 고픈건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기분인걸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나는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노란 무드등만이 켜져있는 거실에서 설원의 등을 바라본다.
사랑하지 않는데 집착할 수 있다는 건 이상하다. 설원이 날 원한다면 날 줄 수 있지만, 내 쪽에서 설원의 사랑을 갈급하는 건 아닌 이 이상한 상황은 뭘까.
설원이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그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쓸쓸하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워보인다. 그리고 그 혼란을 준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미안한 마음이야말로 추악하다. 그런 쓰레기같은 말을 할 거였다면 미안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죄책감은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고픈 욕망에서 비롯하는걸까. 그렇다면 내 죄책감은 더러운거다.
잘 수 있을까. 설원이 있다고 해서 잠들 수 있을까.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쉰다. 그리고 불현듯 내 호흡을 심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걸 자각한다.
자꾸만 내 호흡을 의식하고, 내 호흡이 정상적이라는 걸 의식한다. 숨을 쉬고 있는데, 숨이 안 쉬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어른거린다. 정말 잠들 수 있을까.
자면, 죽을텐데. 자다가 숨이 멎어 죽어버리는 것보다 한심한 죽음이 있을까. 심리적인 문제에서 비롯하는 호흡곤란과 공황발작이라면, 심리라는 것이 작용할 틈이 없는 잠든 상태의 나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
논리적으로 그것이 옳다. 자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없을테니,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게 아니라면 내 걱정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위기감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건 어떤 논리적인 방식으로 내게 다가오는 게 아니다. 무근거한 확신으로 나를 집어삼킨다.
실제로 죽건 아니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중요하다. 거기에서 비롯하는 불가해한 공포가 중요하다.
설원이 같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자는 게 두려워.
만약 혼자 있었다면 두려움 때문에 또 발작이 일어났을 것 같다. 하지만 설원이 있어서 그런지 발작이 찾아올 것 같진 않다.
다만 눈을 감고 잠드는 게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근본적인 의문이 치솟는다.
어째서 사람은 잠이란 걸 잘 수 있는걸까. 누워서 눈을 감으면, 왜 의식은 수 시간을 건너뛰어버리는걸까. 그런 건 그냥 죽는 게 아닌가?
잠듦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왜 잠들어야하지? 만약 잠들지 않아도 되는 외계의 존재가 있다면, 그들에게 지구 생명체들의 수면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잠은 왜 필요하며, 어떻게 가능한거냐고 어찌 설명하지? 그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는군요. 경악과 함께 그리 말할지도 모른다.
잠들 수 없는 나는, 잠이 두려운 나는 지금까지 잠들어왔던 매일이 환상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그렇게도 당연하게 잠들 수 있었을까. 매일의 죽음을 당연하게 결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내일 눈뜰 나는 지금 눈감는 나의 연속이라는 걸, 무엇을 근거로 믿어왔던걸까. 잠든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한가?
나는 내 삶을 부정하고, 잠듦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설원은 술을 마시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날 보더니 힘없이 웃는다.
너는 이제 나를 그런 표정으로 보는구나, 어쩔 수 없는거긴 하지만.
병들고 아픈 고양이를 보는 표정이다. 버리고 싶지만, 버리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에 배반되기에 버릴 수 없는 병들고 아픈 고양이를 보는 표정이다. 내가 그것을 자초했지.
나는 이제 설원과는 결코 대등해질 수 없다. 내가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던 균형을 깨버렸기 때문이고, 설원의 밑에 깔려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 애걸한 탓이다.
우리의 관계는 오늘을 기점으로 큰 변곡점을 맞이했다. 나는 이제 절대로 설원과의 관계에서 애원 이상의 것을 하지 못한다. 설원이 나를 버리지 못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내 스스로 택했으니 후회는 하지 않지만, 다신 설원과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누진 못할거다. 내 선택이니 그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변해버린 관계는 절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깨닫는다. 설원은 내 옆에 남는다 해도 이제 나를 보고 저런 웃음만 짓겠지.
병든 사람을 버릴 수 없어 가까스로 짓는 저런, 연민 섞인 웃음으로만 날 대하겠지.
“...잠이 안 와?”
설원이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물었고, 나는 누운 채 천천히 고갤 끄덕인다.
“아무래도.... 못 자겠어.”
설원의 앞엔 술이 있다. 술기운은 사람을 억지로 잠들게 한다. 잠드는 방법을 잊어버린 내게, 술은 잠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술 마시는 게 두려웠지만, 술이 나를 잠들게 한다면.
취해서 뭔갈 잊을 수 있다면, 이 두려움도, 공포도, 환멸도 잊을 수 있다면.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같이 마실까?”
“...지금 술 처먹으면 또 무슨 개소릴 하려고.”
설원이 질색하는 듯 나를 바라본다. 네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거, 생각보다 기분나쁘진 않은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네 방식대로 대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 꽤 괜찮아.
“...할 말 다 해서, 더 나올 미친 소리는 없어.”
“...불안한데.”
설원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뜨악한 표정으로 본다. 결국 흐느적거리며 일어났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나는 설원의 곁에 앉는다. 노랗고 어두운 무드등이 테이블을 비추고 있다.
이 적당히 어두운 공간에서 마시는 술.
꼭, 신혼부부가 적당한 취기를 빌리기 위해 이러는 것 같다. 분위기는 그러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잔을 가져와 소주를 한 잔, 마시며 설원을 바라보며 웃는다.
“나 미쳤지.”
결국 광기를 무기로 삼아버린 나. 그것으로 설원을 묶어버리려는 나. 설원이 차갑게 말한다.
“자랑하지 마, 그런 거 제일 싫어했잖아.”
“자랑하는 거 아니야.”
과자를 하나 집어먹곤, 다시 소주를 한 잔 들이킨다. 미친 사람, 진정한 미침이란 뭘까. 일단, 나는 미쳤다.
“너도, 남말할 거 없어.”
“내가?”
“그래.”
널 사랑하지 않지만 날 사랑해달라는 사람.
그리고 그 말을 듣고서도 날 사랑하지 않는데 곁에 있어주는 사람.
생각해보면 너나 나나 미친놈과 미친년인 건 마찬가지야.
“네가 정상이라면 질겁하면서 도망쳤어야지.”
내 말이 맞다는 듯 설원은 낄낄거리며 소주를 한 잔 들이킨다.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린 웃을 수 있나. 내가 한 폭력적이고 광기 섞인 요구를 들었으면서도 나와 술을 마실 수 있나.
설원도 결코 정상은 아니다.
“이 모양이 된 친구가 또라이같은 소릴 한다고 도망치는 게 정상이라면.”
설원은 한숨을 쉰다.
“그냥, 미친 셈 치지 뭐.”
그러니까, 네가 미쳤다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