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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19화 (219/224)

219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설원을 원한다. 하지만 남성 설원을 원하는 게 아니라 설원이라는 인간을 원한다. 설원이 나를 떠나는 걸 견디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차라리 설원이 나를 사랑하면 좋겠다. 남자인 설원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설원이 내게 남자로 다가온다면 그 또한 설원인 건 마찬가지니까.

차라리 네가 날 원했으면 좋겠다. 혼자를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너만을 의지하니까. 이 집착은 무어라고 이름붙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광기의 다른 말인가. 부분적으로 미쳐버린 나는 점차 전방위적으로 미쳐가는건가.

“내가 누날 사랑하길 원한다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상하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네게 먼저 고백할 생각은 없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하지만 네가 하자는 모든 걸 난 할거야. 네가 날 떠나지 않는다면. 네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길 원해. 그뿐이야.”

너만을 의지할 수 있는 나. 그런 내게 너는 내게 유일한 타인이다. 설원과 박헌영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타인이 아니라 타자다. 하지만 박헌영은 너만큼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그건 사실이다.  타인은 교감이 가능한 대상이고, 타자는 교감이 불가능한 존재다.

너는 내 유일한 교감자다.

그러니, 내가 내 세계에 너를 가둔다면 네가 원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네겐 그럴 권리가 있다.

말했기에 알게 된다. 말하기 전까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말하게 되니 깨닫는다.

박헌영이 설원에게 한 말이 두렵다.

박헌영이 설원을 빼앗아갈까 두려워, 설원에게 진심을 말한다. 나는 썅년이다. 내 이 비틀리고 무너지고 비대해진 자아를 말하면서 나는 분명히 느낀다.

나는 썅년인데.

왜 썅년이냐면, 설원을 알기에 이러기 때문이다. 설원은 경악한 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나는 설원에게 내가 썅년임을 증명한다.

그건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다.

“넌 착해. 설원.”

“......그 말 들으면 내가 누나를 사랑할리가 없는데 착하단 얘긴 왜 나와?”

“넌 착해. 설원. 잘 들어봐.”

나는 설원에게 다가간다.

“내가 이렇게 망가져버렸다는 거 보여주면 말야.”

설원의 몸을 살짝, 끌어안는다.

나는 오래 전에 맛이 가버렸다. 이미 오래 전에 맛이 가버렸지만 내 광기를 말로 토로하면서 많은 걸 깨닫는다.

이미 오래 전에 미쳐버렸지만.

지금 말로 풀어냈기 때문에, 내 광기는 지금 시작된다.

지금부터 존재한다.

나는 왜 썅년인가.

설원을 알기 때문이고.

내가 이렇게 망가져버렸다는 말을 직설로 토로해버리면 설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기 때문이며.

“너, 나 절대 못 버려.”

설원의 상냥함을 이용하려는 나를, 알기 때문이다.

나를 고백하는 건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그런 망가짐을 설원이 내버려두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설원의 품은 따뜻했다.

마음이 얼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네가 날 사랑해도 상관없다는 그 말은 반대의 경우에도 참이니까.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네가 날 떠나지 않는 게 내 목표니까. 설원은 얼음처럼 굳어진 채, 저를 끌어안은 나를 어쩌지 못했다.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뭐든 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내 옆에만 있어줘. 네게 집착하는 나를 쳐다보기만 해도 돼.”

빼앗길 수 없어.

너는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이 되길 바라지도 않지만, 내 옆에 있기만 하는것으로 많은 것이 해결돼.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어. 너를 갖고 싶은 게 아니야.

누가 널 갖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렇다면 차라리 내 것이 되어라. 나를 사랑해라, 나를 욕망해라. 그건 견딜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옆에 서지 말아라.

아픔을 이용하지 않겠다던 나는.

광기를 이용한다.

나빠지지 않으려던 나는, 박헌영이라는 이름의 궁지에 몰려 더 나쁜 선택지를 고른다.

나는 웃는다.

자학하듯.

“나 이렇게 망가지고 비틀렸고 엉망진창이야.”

설원을 안은 채 설원을 올려다본다.

“넌 착해서, 이런 나 못 버린다는 거 알아서 이러는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나는 썅년들 중에서도 그나마 내가 썅년인 건 아는 썅년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러는거야. 그 말을 하는 것도 내가 썅년인 건 아는 썅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썅년이라고 말하는거야. 우습지?”

무한루프다. 죄를 자각하고 있다는 건 절대로 자신의 인간성을 변호하는 무기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지듯 자학에 자학을 더해갈 뿐이다.

죄에 대한 자각에서 느끼는 자부심에 관한 순환논증은 단 하나를 증명할 수 있다.

자존의 붕괴를 증명할 수 있다.

“날 비웃어.”

“미...친.... 왜 그래....”

“그리고 내 곁에 있어줘. 누구도 보지 말고 나만 봐줘. 그거면 돼. 네가 하라는 거, 할 준비 돼 있어.”

“뭐든 하라고 할 생각 없어!”

“넌 그래도 돼.”

“진짜.... 진짜 씨발.... 왜 이래.... 왜 이러는데.... 이게 무슨.... 무슨 미친 짓이야 이게!”

설원이 결국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물을 떨군다. 나는 그런 설원의 눈가를 손으로 훔친다.

“말했잖아.”

후회하지?

“넌, 직설이 뭔지 모른다고.”

직설은 폭력이고 흉기다. 설원은 그게 뭔지 모르면서 내게 진심과 직설을 바랐다.

그래서, 나는 직설로 설원을 찔렀다. 흉기에 찔린 설원이 피를 흘린다.

아주 맑고 투명한 피를.

선(善)함의 증명을 흘린다.

내 폭력의 결과물인 그 맑은 핏방울들을 가만히 본다.

폭력은 물리력이 아닐 경우에 더욱 잔혹하다는 진실을 이 순간 깨달아버린다. 그리고 이 폭력은 설원에게만 작동할 것이다. 내 폭력은 너만이 알아준다. 너만이 받아들인다. 너만이 이해한다.

너만이 내 폭력에 아파한다.

그래서 너는 내 유일한 타인이다.

타인이 있어야만 세계가 존재한다. 타자뿐인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교감할 수 없으면 존재는 무의미하다. 설원이 내 유일한 타인이란 말은 그렇다면 무얼 의미하는가. 설원이 존재하지 않으면 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설원은, 내 세계다.

“널 사랑하지 않는 날 사랑해줘.”

그것이 내가 하고픈 모든 말을 단 한 마디로 축약한 말이었다. 나는 설원을 끌어안은 채,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설원은 박헌영을 안아주지 않았을거다. 왜냐하면, 박헌영은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설원은 박헌영을 사랑하지 않으니 안아주는 것이 죄악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설원을 안다.

설원이 나를 안게 하는 방법을 안다.

결국 설원은 내 망가짐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기에, 설원은 내 망그러진 존재를 인식하곤 내가 가여워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미쳤어. 진짜. 왜, 왜 이러는데.... 왜 이러는건데....”

설원이 나를 끌어안는다. 망가진 나를 끌어안지 않고선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관계는 정치다. 모든 인간관계는 정치다. 그렇기에 나는 설원이라는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 나를 끌어안게 했다. 정치란 본디 추하다.

정치는 왜 추한가.

추해져야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기에. 추해지는 놈이 원하는 걸 갖기에 정치는 추함의 연쇄다.

박헌영은 추해지지 못했고, 나는 추해졌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설원은 나를 끌어안았다.

추한 나는 설원에게 안겼고, 추하지 않은 박헌영은 안기지 못했다. 박헌영은 설원이 날 끌어안았던 해변에서의 일을 봤을거다. 그걸 본 박헌영은 위기의식이 생겼을거고 설원에게 뭔가를 말했겠지.

그리고 그 광경은 또다른 위기의식을 내게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있으면 설원이 박헌영에게로 가버릴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그래서 나는 설원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붙잡아버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악재로 작용해 결국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이 벌어졌다.

이 여행은, 오면 안 되는 여행이었어. 우리 셋 전부 거대한 균열을 마주해버렸다. 박헌영의 말이 떠올라 난데없이 웃음이 터졌다.

러브코미디라고 했었지. 이 상황과 제일 안 어울리는 말이 있다면 그건 러브코미디일거다.

이건 싸이코드라마잖아.

그리고 나는 악역이지, 네가 주인공일거야 아마. 헌영아, 네가 주인공이야. 세상이 만약 이기심에서 비롯한 광기를 심판한다면 나는 언젠가 악역으로서 탈락하겠지. 하지만 이 싸이코드라마가 각본마저 싸이코라면, 누가 이길진 아직 몰라.

이 정신나간 싸이코드라마의 악역인 나는.

설원에게.

착해서 바보인 설원에게.

사랑하지 않는 설원에게.

이 정신나간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에게.

“날 사랑해줘.”

직설로 위장한 광기를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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