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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18화 (218/224)

218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죽을 것 같다는 감각이 점차 사라져갈 때 즈음, 설원이 내려왔다. 박헌영은 나오지 않았다. 걱정시키는 것이 싫어 나는 비닐봉지를 치워버렸고, 설원은 나를 보며 묻는다.

“괜찮아?”

“아, 괜찮아. 그냥 불안해서 들고있던거야.”

거짓말이다. 아직도 얼굴이 살짝 저려온다. 하지만 이 거짓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혼자 발작을 견디면서 뭔갈 깨달아버렸다.

나의 추함을 깨달아버렸다.

홀로 이런 걸 견디는 건 두 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버렸다.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은 자살충동까지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이렇게 계속 겪어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편할거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래서.

나의 추함을 깨달았다. 내 안에 잠든 추한 진실의 일면을 자각했다.

“박헌영은?”

“자겠대. 별 일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거짓말 못하는 건 알았는데 진짜 더럽게 못한다.”

얼굴에 근심과 수심을 단어로 써놓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잘도 그런 말을 한다. 내 말에 설원은 쓴웃음을 짓는다.

“잠깐 나갈까? 얘기도 할 겸.”

“...해도 되는 얘기야?”

“해야 되는 얘기겠지.”

박헌영에게 실례가 되는 게 아니냔 물음에 설원은 엉뚱한 답을 내놓는다. 설원이 신발을 신고 나도 신는다. 봄의 밤은 그리 춥진 않았다. 바깥에 나가서 우린 계단참에 선다.

가까운 해변의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온다. 밤에도 파도는 치지, 낮에도, 여명에도, 황혼에도. 파도는 계속 밀려온다. 당연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설원은 해야만 하는 얘길 준비한다.

“자세한 얘긴 프라이버시니까 안 할건데 말이야.”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알게 되잖아.”

“말로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 누나도 알잖아?”

말하지 않으면 없는거다. 말로 확인해버리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에 에둘러 말하는 이 무의미한 말장난도, 결국 무언가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설원은 쓰게 웃는다.

“무의미한 것 같지만....”

“무의미에는 무의미란 이름의 의미가 있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내 말장난같은 말에 설원은 피식 웃는다.

“그건 누구 인용이야?”

“넌 날 무슨 인용으로 이뤄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오, 생각한거야 그럼?”

설원의 자못 감탄한듯한 말에 나는 웃는다.

“아니, 인용 맞아. 네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롤랑 바르트.”

“염병.”

본래는 텍스트의 의미에 관해 설명하면서 한 말이지만 삶에 대입해도 괜찮은 말인 것 같다. 무의미는 없다. 그것이 진정 무의미하다면 그것은 무의미란 이름의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의 다 알면서 회피하는 무의미한 에두름도, 나름의 의미가 존재하겠지. 내가 내 아픔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무의미도, 어떤 의미가 있겠지.

“그래서, 뭔데?”

내 물음에 설원은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입을 연다.

“난 역시,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아.”

그 말을 듣고 든 생각은 과연 안도였을까. 내 마음을 스쳐지나간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 그건 안도일까, 아니면 아쉬움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무의미한 감정일까.

다만, 그 말은 어떤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어떤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감정의 근원은 무엇일까.

감정은 분명히 머리로 느끼는것일텐데.

왜 감정은 심장을 맴돌다 사라지는가.

“그래서?”

“하나 물어봐야겠어.”

설원이 날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날 바라보는 설원의 얼굴이, 선연하게 보인다. 내가 아는 설원의 얼굴을 상상해서 내 뇌가 보여주는 것인지, 다만 달빛이 밝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보여서 보이는가.

보고 싶어서 보이는가.

보고 싶은 걸 보는가, 보이는 걸 보는가. 잘 모르겠다.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런 말을 들으면 심장이 내려앉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았다. 그것으로 박헌영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확실해졌고, 박헌영이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도 확실해졌다.

“사랑하냐고 묻는거지?”

“...그래.”

“만약에 내가 그렇다면, 너는 연애를 안 한다고 했으니까 나는 내 감정이 무엇이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정치적, 감정적으로 이득이지 않겠냐?”

그러니까 질문의 순서가 잘못되지 않았냐는 말이다. 하지만 설원은 날 안다.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건 알겠어.”

그래서 이렇게 정곡을 찔러온다. 서로를 잘 안다는 건 이따금 행복한 일이지만, 왜 가끔은 이렇듯 불편할까. 대답을 하기 싫거나 곤란할 때 질문 자체를 파고들어 논점을 흐려버리는 내 화법을, 설원은 너무도 잘 안다.

안 먹히는 사람이 없는데, 설원에겐 안 먹힌다. 질문을 흐리려 하면 질문을 흐리려는 내 의도를 잡아채 디밀어버리니까.

당할 수가 없어. 그래, 나는 설원을 바라본다. 생각은 정리되어 있다.

“진심으로 말하길 바라냐?”

“응.”

나는 설원을 보며 웃는다. 그건 비웃음이다.

“진심이란 건, 직설을 말하는거야? 직설적으로 말해?”

“그럼 그래야지.”

“감당할 수 있어?”

“감당할 수 있냐니.”

“넌, 직설이 뭔지 몰라.”

내 말에 설원은 인상을 찌푸린다. 너는 직설을 몰라, 그 직설 속에서 내가 깨달은 내 추한 진실을 말하면, 내 망가짐을 토로하면.

너도 같이 망가질거야.

“말장난을 또 하려는거면, 지금은 그럴 때 아냐.”

“......그래.”

설원은 직설이 뭔지 모른다. 그건 아주 무서운 흉기다. 그러면서 지금 설원은 내게 직설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답을 들려준다.

혼자 발작을 견디며 깨달은 내 추한 진심과, 내 더러운 바람을 들려준다.

“널 사랑하지 않아.”

“그래.”

“너를 의지할 뿐이야.”

그 의지 자체가 목적이기에 나는 설원을 사랑하지 않지만 설원에게 집착한다. 박헌영이 설원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계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설원이 믿을만한 녀석이고 의지할만한 녀석이고 유일한 녀석이다.

그렇기에 사랑하진 않지만 집착할 수밖에 없다.

과연, 나는 썅년인가? 아마 맞겠지.

지금부터 하게 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버린다면, 나는 썅년으로 규정된다. 말하지 않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서 계속 말했지만, 어떤 것은 말해져야만 한다. 알고 있다 해도 말해져야만 그것으로.

나를 규정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뭐?”

“그러면 너는 내 곁에 있을테니까.”

설원은 내가 그렇게 말할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눈을 부릅떴다.

“원아.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하지만 네가 날 사랑하고, 네가 날 원한다면. 너랑 연애 할 수 있어.”

“뭐....”

“그러면 네가 날 떠나지 않을테니까.”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 생각을 말로 뱉어내는 순간 나는 명문화된 나를 느낀다. 나는 나를 규정할 수 없었다. 나를 규정하는 어떤 말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솔직해지는 순간, 규정되는 나를 느낀다. 설원처럼 감정을 토해낼 수 없던 나는 그걸 한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걸 한다. 설원의 흉내를 내면서. 글이 아니라 입으로 해버린다.

이 순간, 나는 너를 모방한다.

내 안의 이기심과 죄악을 느낀다. 설원은 내가 이런 미친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다. 그 표정이 재미있다.

“네게 의지하고, 그래서 네게 집착하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은 은유(metaphor)한다. 예를 들고 비유하는 방식의 은유뿐만 아니라. 말 자체가 의지의 은유다. 의지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 같은 건 없다. 오직 언어라는 이름의 은유체계를 빌려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정신적 대화를 나눌 수 없기에,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은유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직설은 없다. 한없이 직설에 가까운 것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직설은 매우 드문 것이다.

그렇기에, 직설은 은유적이길 포기하는 걸 뜻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걸 의미한다.

직설은 보편에서 벗어난 대화방식이고.

그렇기에 폭력이다.

나는 설원에게 직설이란 이름의 폭력을 행사한다. 직설이 날것에 가까울수록 그것의 폭력성은 강해진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날 떠나지 않겠지. 다른 곳을 보지 않겠지. 나는 널 사랑하지 않지만 네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말. 말 그대로의 사실이야.”

나는 나에 대해 말하면서 나에 대해 알게 된다. 알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기에 알게 된다.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 발생한다는 서사학의 논법처럼, 나는 나에 대해 정의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를 규명하게 된다.

“만약 네가 내게 다른 마음을 갖게 되고 그걸 원한다면 나, 아마도 그거 할 수 있을거야. 네가 내게 연애를 요구하면 그렇게 할거고, 네가 섹스를 요구하면 할 수 있어.”

내 거친 직설에 설원은 말조차 잇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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