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처음엔 내가 뭘 본거지 싶었다.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는 박헌영과, 그런 박헌영을 벽으로 밀어붙인 채 뭐라고 윽박지르는 설원.
울고 있는 박헌영.
어떤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그 광경이 보여주는 의미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는 박헌영을 보고 설원이 얼이 빠져버렸다. 설원이 화를 냈고, 박헌영이 뭔가 말했다. 그리고 설원은 말을 잊었다.
박헌영은 도망치듯 고갤 숙인 채 이층으로 올라가버렸고 설원은 그런 박헌영을 잡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설원은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들으면 안 될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싸웠어...?”
무슨 말이 오갔는지 듣지 않아도 알고 있으면서, 굳이 묻는 내가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나도 모르겠다. 설원은 나를 보며 고갤 젓는다.
“원랜 그랬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게 됐어.”
설원도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거실에 혼자 남은 나는 소파에 앉았다. 뭘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걸까.
오면 안 되는 여행을 온거였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걸까. 만약 설원과 둘만 이곳에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을거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알게 되어버렸다.
나는 설원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설원에게 의존한다. 타인을 믿지 않는 걸 넘어 나 자신과 내 이성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사람은 생각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것이 병이라는 이름으로 확인된 순간 나는 나마저도 신뢰할 수 없어졌다.
그래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설원뿐이고, 그런 설원에게 의존한다. 설원만을 믿는다.
그렇기에 그 의존은 집착이다. 사랑과 집착은 동의어는 아니지만 유의어다.
설원에게 집착하기에, 설원이 나를 떠날 수 없도록 내가 무슨 짓이건 해버릴지도 모른다.
만약 설원과 둘이서 왔다면 이런 풀빌라에 있지도 못했을거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니 소주나 깨작거리다가 한 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자야 했을거다.
그 상황에서 내가 두려움에 질려서, 나를 봐주는 설원에게 의지해서 나쁜 짓이 벌어졌을 것이다. 거의, 반쯤은 확신한다. 약해진 나는 오늘을 기점으로 한 번 더 무너져버렸고, 이 상황에서의 나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다.
둘이서만 왔어도 문제고, 셋이서 와도 이런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직 나에게만 있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내가 약해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을 와야 할 필요도 없었을테니까.
또 내가 문제인가.
내가 이 관계를 흔들리게 하는건가. 아니, 언젠가 일어나야 할 일일지도 모르지, 내가 아프게 되고, 아파서 결국 의존하게 되어버리고, 그 의존마저 병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져 버리는것도. 그리고 박헌영이 설원에게 어떤 말이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해버리게 되는것도.
다 나 때문이었나.
박헌영은 설원을 사랑하는지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품은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이 감정의 근거는 명확하다.
설원이 나를 사랑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설원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설원이 나를 사랑해서 떠나지 못한다면, 설원이 나를 사랑하게 하고 싶다는 비열하고 저열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내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불과하다. 풀빌라라서 좋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제일 큰 문제인 것 같다.
다들, 저마다의 밀실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는다. 넓은 공간이라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 또한, 거실이라는 이름의 밀실에 틀어박혀있다. 거실은 개방된 공간이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으니, 여기도 결국 닫힌 공간이다. 닫힌 공간 속에서 나는, 누군가 나오길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은 채, 시간은 흘렀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나온 건 설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 새 한건지 눈이 퀭하고 머리칼이 흐트러져있었다. 나는 그런 설원을 보곤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괜찮...아?”
설원은 내 말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성큼성큼 위로 올라갔다. 무슨 결심을 한건지는 알 수 없다. 설원은 박헌영이 들어간 방문을 두드린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듣는다.
-똑똑
-아.... 누구...?
“나야. 들어간다.”
-아, 그. 그게....
“얘길 좀 해야 할 거 아냐.”
-그, 응, 응.... 들어와.
설원이 안으로 들어간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뿐인데,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다. 무슨 얘길 하려는걸까. 뭘 말하려는걸까.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수록 자꾸만 강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다. 저 둘만의 문제다. 나는 거기에 낄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흐으....”
왜 이럴까.
발작이 찾아올 것 같다. 안 돼, 안 된다. 지금만큼은 안 돼. 나는 천천히 주방을 뒤져 비닐봉투를 하나 찾아낸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들이쉬고 내쉰다.
지금만큼은 이게 찾아오면 안된다. 지금은 저 둘을 방해하면 안된다고 계속 생각하면서, 결국 그 생각 때문에 천천히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아주 천천히 발작한다.
“하아.... 하아....”
조용히, 그 발작을 견딘다.
그리고 곧 온전한 발작의 상태가 되면서, 죽음에 대한 위기감이 찾아온다. 나는 뭘 원하는거지, 나는 뭐가 되어버린거지?
알고 있다.
그 발작은 자신의 존재를 내게 고통이란 형태로 증명해보인다. 부정할 수 없는 생각의 발생은 기이하면서도 두렵다.
나는 뭘 원하는지 알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픈지 알아.
설원은 올라갔고, 나는 그 안에서 오갈 대화가 듣고 싶지만 동시에 듣고 싶지 않았다. 위기감이 계속해서 치솟았는데, 그건 단지 죽음에 대한 위기감뿐인 건 아니었다.
박헌영은 울었는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선준이 신경쓰이긴 하지만 지금은 박헌영과 이야기하는 게 먼저다.
“...왜 울었어?”
“...내가 병신같아서.”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정해놓고 선 건 아니다. 단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엇나가버릴 것 같아서였다. 박헌영이 이렇게 말해버린 순간부터 뭔가는 비틀렸다. 그리고 다신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박헌영에게 줄 답을 생각해놓진 않았지만 궁금했다.
한 달이 아직 되지 않았는데, 박헌영이 날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 상황 자체가 올 수 있나?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이성으로 볼 수 있는건가?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박헌영은 그렇다고 말했다. 박헌영은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베개를 끌어안고 있다. 이런 행동도 작위적인가. 그래, 박헌영의 이런 행동은 작위(作爲)다. 박헌영은 이것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걸거다. 실제가 어떻든 간에.
박헌영은 자신의 안에서 개념화된 여성성을 흉내낸다. ‘여자 같은’ 행동이라는 측면을 도덕적으로 비판하자면 비판할 수 있다. 여자 같은 행동이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옳은가? 성역할과 성행동이 고정되는가? 그런 논지로 접근하면 박헌영은 너무 쉽게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작위적 여성성이 옳고 그르건 간에 인간은 뭔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박헌영은 받아들였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된 자가 택하는 이 방식은 어떻게 보면 발버둥이다. 이선준이 발버둥치는 방식이 여성성과 남성성이 존재치 않고 나는 오직 나로만 존재한다는거라면, 박헌영의 이 개념화된 여성성의 흉내 또한 발버둥이다.
이선준은 저항하고, 박헌영은 체념했다.
여자가 된 자신을 수용한다.
이선준의 발버둥은 처참하다. 변한 자신과 그로 인해 오는 스트레스와 죄를 견디지 못해 앓고 있는 모습은 그저 처참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박헌영은 잘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박헌영은 이겨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박헌영은 이긴 게 아니라 패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박헌영은 패배를 빨리 받아들였고 싸우려고조차 하지 않았기에 괜찮아 보이는 것뿐이다.
박헌영은 체념하는 것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처참하진 않다.
진정한 여성성이 뭔지 모르면서 여성성을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박헌영의 이 모든 행동은 여성에 대한 편견의 결과물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무엇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 않겠지. 하지만 박헌영은 살아야겠기에, 무언가로 되어버린 이상 그 무언가가 되어야겠기에 이렇게 하고 있다.
베게를 끌어안은 채 겁먹은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다.
이건 옳지 않겠지만, 틀렸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에 박헌영의 이 체념적 태도는 뭘 말하는가.
나는 그렇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듯한 행동과 눈빛과 제스처는. 그리고 나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그 말은.
처참하진 않아도 비참하지 않은가.
“네가 좋은 게 아니야.”
박헌영의 말은 조금 떨리고 있다.
“거짓말이었다는거야?”
그게 거짓말이라 하기엔 우리 사이의 침묵이 길었다.
“아니.”
“그러면?”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잖아.”
“...그래.”
박헌영이 진심을 말할 땐 뭔가 거북해진다. 절대로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거의 대부분이 장난인 이 녀석은, 진심을 말할 때 항상 비참해진다.
비참해졌을 때에만 진심을 말한다. 박헌영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말한다.
“내가 살면서 만나게 될 많은 남자들 중에.... 말야....”
“듣고 있어.”
“너처럼, 너만큼, 너같은 사람은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스쳐지나갈 수많은 사람들 중에 너만한 놈, 안 나타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일단 잡고 싶은거야. 일단, 내 걸로 만들고 싶은거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좋아서가 아니라 좋아질 것 같아서, 일단 갖고 싶은거야. 나, 욕심, 많아서....”
박헌영이 고개를 든다. 눈시울이 벌개져있지만, 울고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대체 어떤 부분이 좋은 놈이란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거, 네 그런 거. 계속 너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함부로 긍정하지 않는 거. 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않는거. 날 이해해주는 거. 일단 얘길 하려고 하는 거. 봐, 지금도.... 지금도....”
박헌영은 이를 악문 채, 바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울고 싶은데 억지로 웃는 그런 표정은 보는 사람이 더 괴롭다. 박헌영이 처참하게 목소리를 쥐어짜낸다.
“날 좋아하지 않는데, 내 얘길 들어주려고 하는....”
결국 눈시울이 반짝인다.
“이런, 이런...거....”
그런 게 네 좋은 모습이라고. 박헌영은 덧붙인다.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말했으면서 네가 뒤에 붙인 모든 말들은 결국 나를 좋아한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무슨 말이 하고픈건지는 알았다.
관계를 깨는 건 두렵기에,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말하려고 한다는거지. 실제의 네 마음이 어떻건 간에.
내가 박헌영을 사랑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친구로서 좋아하나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억지로 그렇게 되려고 한다면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연애를 혐오한다. 내 앞에서 이런 처참한 꼴로 제 마음을 말하는 박헌영이 불쌍해서 연애하는 건 더더욱 혐오한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건 결국 나에겐 아니더라도 박헌영에겐 계속 상처로 남을거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건 나다.
박헌영은 이를 악문 채 제 눈가를 훔친다.
“마음이 급해졌던거야. 잠깐.”
“뭐?”
“네가 언니 끌어안고 있는 거. 봐버렸거든.”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유가 뭐건 상관없어. 어쨌건! 내가 널 노리고 있는데 그런 꼴을 보니까 마음이 다급해지더라고!”
박헌영이 과하게 밝은척을 하며 다시 한 번 억지로 웃는다. 그걸 봤던거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거라면 그 기분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선. 새삼 짐작하는 게 무의미하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져서 아직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해버린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너는 내 떡인데, 뺏길 것 같잖아. 응?”
그래서 다급해진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제 마음보다 더 큰 말을 저도 모르게 지껄여버렸다는 것처럼. 내 행동은 그런거고, 나는 아직 너를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이선준에게 빼앗길까봐 다급해져서 그렇게 말한거란 소리다.
그 말은 사실이어도 문제고, 사실이 아니어도 문제다.
사실이라면, 박헌영은 아픈 이선준에게서 나를 빼앗으려고 한 게 된다. 그건 이기적이다.
거짓이라면, 박헌영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게 된다. 그건 자학적이다.
진실은 후자일거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이 녀석은 남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부류가 아니니까. 이 녀석의 장난이 누군가를 상처입힐지언정, 상처입힐 의도로 뭔갈 하는 녀석은 아니니까.
“지금, 나보단 언니한테 네가 더 필요하겠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랑 이선준은 그런 게 아니....”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박헌영의 말은 사실이다. 지금 이선준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의지하고 있다. 그게 애정이라 명명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선준이 나를 의지하는 지금 나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없다. 안그래도 불안정한 이선준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외면할 수도 없고 외면할 생각도 없다. 박헌영은 그걸 안다.
연애를 할 생각도 없지만, 그것이 하고프다 생각한다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
“그리고 나중엔, 지금하곤 다르게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될수도 있는거잖아. 그래, 내 말이 다 거짓말이건 뭐건 무슨 상관이야. 네가 무슨 생각할지 알아. 이대로 계속 지내면 내가 상처받거나, 그런 거 생각하고 있지? 네가 나를 어장관리 하는 것도 아닌데, 너 좋아한단 나랑 계속 친구로 지내는 게 맞는지 아닌지 생각하고 있지?”
박헌영은 내 생각의 정곡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래,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길 바라는 박헌영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건 박헌영을 상처입히는 일이다. 내가 말이 없자 긍정으로 받아들인건지 박헌영은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다.
“그거 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게....”
“네가 나를 안 보는 거. 그거.”
박헌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제 머리를 내 가슴에 톡, 닿게 한다.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나중엔 내가 박헌영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선준에게 내가 필요하니까. 그건 다 변명일 뿐이었다.
박헌영은 그 말을 하고픈 게 아니다.
“그게, 제일 큰 상처니까. 다른 건 생각하지 말아줘....”
본론은 거기에 있었다.
“부탁...이야.”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으니.
나를 버리지 말아달란 본론.
그러니까 고백은 없던 것으로 하자는 본론.
그 비참은 박헌영의 떨리는 목소리를 타고 처절하게 흘러나온다.
박헌영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박헌영의 말대로, 이 작은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은 내 소중한 친구다.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걸 끌어안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나를 짝사랑하는 사람을 사랑 없이 끌어안는 것이 죄악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내게 몸을 기대온 박헌영을 끌어안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밀어낼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