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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16화 (216/224)

216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아니, 저 새낀 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걸 저렇게 좋아하는거야?

원래도 남의 알몸 쳐다보는 건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더더욱 보고싶지 않다. 무엇보다 박헌영의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니까 더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버린 채 박헌영 쪽에서 완전히 등을 돌린다.

뭐 어쩌라고 하면서 그냥 쳐다봐버릴수도 있을거고, 그걸 본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존엄이 침해당하고 싶지는 않아. 그런 걸 봐버리면 눈이 더러워질테니까.

“흐흐, 여기 내 생각보다 좋은 곳인데?”

박헌영이 알 수 없는 개소릴 한다. 옷 벗는 소리에 의하면 저 녀석은 진짜로 전부 벗었다. 내가 봐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아니, 누나쪽도 보여줘도 상관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말을 한거랑 진짜로 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박헌영은 진자로 홀랑 벗어버렸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뒤돌아있는 동안,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 미, 미친! 씻으려면 씻기나 해! 왜 이쪽으로 오는데!”

“좋은 구경 시켜주려고 그러지.”

박헌영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 아니 미친, 무슨 짓거릴 하는거야 대체? 다 벗고 있으면 못 때릴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그래, 못 때린다. 쳐다보기도 싫은데 어떻게 때려?

“야, 얌마.”

어느 새 내 뒤에 착 다가온 박헌영이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리고는.

-홱!

“야이!”

“병신아 진짜 다 벗었겠냐?”

거기에는 큰 목욕타월로 몸을 휘감은 박헌영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표정봐! 너 진짜 개쫄보다. 보면 뭐 큰일난다고 얼굴이 시뻘개졌어? 대박. 응? 기대했냐? 기대했지? 기대한거지? 기대해서 그러는거지? 귀엽긴.”

박헌영은 목욕타월을 휘감은 채 내 앞에서 깐족거린다. 물론 알몸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노출이 심한 건 매한가지다.

“좀, 꺼져.”

-빡!

“악! 또 패네 이게 진짜! 너 주먹질이 습관이다 이제?”

“더 맞기 싫으면 빨랑 씻기나 해.”

노려보자 박헌영은 찔끔한 표정이 되어선 욕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확실히 눈앞에 있는 박헌영의 모습은 알몸이 아니라곤 해도 나도 잠깐 헛숨을 들이켜야 할 정도였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본다. 그렇기에 보이는 것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이유는 사실 내 존엄이고 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눈을 뗄 수 없을까봐,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기에 내가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리고 그 시선을 느낀 박헌영이 과연 내가 그렇게 행동해도 좋아할지 어떨지 알 수 없다.

장난을 장난으로 마무리짓고 싶을텐데, 내가 어떤 방식으로건 진심을 드러내버리면 불쾌해할지도 모르니까.

박헌영의 마음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예전처럼 대해주고 싶을 뿐이다.

-쏴아아아아!

욕조에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설거지를 계속한다. 어차피 목욕타월을 하고 있으니 시선처리는 그렇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같이 씻을래?”

“지랄할래 진짜?”

“아니, 여기 엄청 넓단말이야. 그리고 목욕타월도 하고 있는데 뭐 어때.”

“아니 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흐흐, 그럼 네가 문제냐? 아아, 네 쪽의 ‘그것’이 문제겠지. 오, 생각해보니까 좀 소름돋았어. 어떡해! 설원이 날 보고! 막! 막! 흐흐흐흐!”

“진짜 개빡치네.”

박헌영의 농담이 수위를 넘나드니 점점 저 자식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그래도 최소한 배려하려고 하고 있는데, 너는 대체 어디까지 날 갖고놀거냐? 나는 고무장갑을 집어던진 뒤, 욕실로 간다. 한 번 제대로 지랄을 해야 앞으로 이런 짓을 안 하지.

못 보는 게 아니라 안 보는거다.

그리고 나는 화가 나면,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꽤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박헌영의 장난이 마지막 선을 넘었다.

“야. 박헌영.”

“어, 어?”

박헌영은 내가 지금까지 쳐다보지 않으려 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목욕타월을 두른 자신을 내가 빤히 쳐다보자 당황한다.

“원하는게 뭐야?”

“가, 갑자기 왜...그래?”

“원하는 게 뭐냐고 이 새끼야. 오기 전엔 피임약을 처먹질 않나 계속 들러붙질 않나 지금은 말할것도 없고. 야, 너 이딴 짓거리 할 때마다 즐거운 건 알겠는데 선 안 지킨다 요새? 꿀밤 몇 대 처맞는 걸로 끝나니까 내가 좆같냐?”

“조, 좆같다니....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나는 그냥....”

박헌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지금 내게 그건 보이지 않는다. 개같은 짓거릴 자꾸 하면 개같은 꼴이 벌어진다는 걸 알아야 그만 하지. 이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 하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어.

이렇게 화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화내지 않으면 나중에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지금은 해야겠다.

“그냥이고 나발이고 사람이 이렇게 정색하고 지랄을 해야되냐 꼭? 내가 사인 계속 주지 않았어? 줬어 안 줬어?”

“줬...지....”

“정도를 지켜. 씨발 네가 이딴 짓거리 하는 거. 너도 너 스스로를 견디기 힘드니까 날 놀려먹는걸로 어떻게 조금 기분이 나아지려고 하는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점점 이상하지 않냐? 너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위험한 소리 자꾸 해서 얻고 싶은 게 뭐야 너?”

“그, 그게.... 미안. 원아, 화났어? 아, 안 할 테니까....”

박헌영은 내가 이렇게까지 화낼줄은 몰랐는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이건 내가 아는 박헌영이 아니다. 달라진 모습으로 내 화를 마주하는 박헌영은 너무 작아서. 작고 가녀려서 내 마음 한켠을 자극한다.

이렇게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아주 큰 죄악인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해야한다. 서로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박헌영의 이 장난기를 죽여야 한다.

“원아라니 뭐니 그딴 식으로도 부르지 말라고! 하던대로 해! 뭐가 하고싶어서 자꾸 지랄염병이야?”

“많이.... 화났어?”

“그래, 존나게 화가 났는데 네가 씨발 내 그거가지고도 놀려먹는 건 더 이상 못 참겠다. 앞으론 더 뭘 할건데?”

내가 다가가자 박헌영은 한 걸음 물러난다. 작은 짐승이 겁에 질린 것 같은 표정으로 물러난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박헌영은 코너에 몰렸다.

이러긴 싫지만, 한 번 제대로 밟아줘야 이런 짓거릴 안 할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박헌영은 입술을 깨문 채 나를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두려움도 있지만, 다른 감정도 읽혀진다.

그건, 서운함에 가까워보인다.

“모르는거야. 모르는 척 하는거야?”

“뭐가 모르는 척인데?”

“...내가 뭘 원하는지, 궁금해?”

그러자 분노로 들끓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 새끼가.

지금.

뭘,

무슨.

무슨 말을 하려는거지? 박헌영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녀석은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나는 그 고민이 뭔지 모르지만.

그 고민에 박헌영이 해답을 내리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큰 실수를 하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냐는 말만큼은 절대로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나, 더럽다고 생각하지?”

“무슨.... 무슨 소리야.”

주도권이 박헌영에게 넘어가버렸다.

박헌영은 결국 차마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군다.

“남자가 좋아.”

처참한 진실을 고백하듯 그렇게 말한다. 변태라고 매도당하며, 이상성벽을 가졌던 녀석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남자만, 좋아하게 되어버렸어.”

박헌영의 어깨가 살짝 떨린다. 박헌영이 더 이상 말해버리도록 둘 수 없다.

“잠.... 잠깐만. 잠깐만.”

“이해해. 얼마나 됐다고 벌써. 얼마나 됐다고 친구한테. 그런, 이런, 짓. 이상하지. 내가 생각해도 그래. 이상해. 이상하고 더러워. 그러니까 네가, 더럽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아는데. 아는데.... 이해하는데....”

박헌영은 끝끝내 고개를 든다. 자기 자신이 더럽다 생각하는 박헌영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있었고,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흐르는 중이었다.

“좋은 걸, 어떻게 해.”

나는 건드려선 안 되는 스위치를 건드렸다. 박헌영을 멈추게 하려다가, 마지막 선을 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서. 미안해.... 기분 나빴구나. 응, 엄청, 엄청 나빴을거야. 미안. 미안해....”

박헌영은 서럽게 울면서, 내 앞에서 너무나. 너무나도 한심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게 고백한다.

나는 그런 박헌영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의 이선준처럼 안아주는 건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아.......”

그리고 현관에서, 언제 돌아온건지 이선준이 그런 나와 박헌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부터 실수였던걸까.

이선준에게 멀리 떠나자고 했을 때? 박헌영도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둘만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 때? 내가 결국 참지 못해서 화를 내버렸을 때?

무엇이 결정적인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걸 몰라도 현실은 결과만을 내보여주고, 그것을 감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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