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설원은 준비된 고기를 비롯한 물건을 주인과 함께 설치하느라 열심이었고, 나와 박헌영은 냉장고에 음식물들을 정리해 넣었다.
박헌영은 뭔가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보니까 저 주인아저씨 입장에서 설원 완전 이상한놈으로 보이겠네.”
“...생각해보니 그렇네.”
“무슨 관계길래 이렇게 셋이서 놀러왔나 싶을거야 그치?”
“그러네.”
저 사장 아저씨가 무슨 이상한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에 소름이 쭉 돋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원 덕분에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 지금은 쉬는 것에나 집중하자.
오늘 하루만 지내는 게 아니라 이틀을 쉬기로 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노는 건 아마 내일부터일거다. 오늘은 먹고 쉬자.
“준비 다 됐으니까 나와.”
설원이 말했고, 나와 박헌영은 외투를 챙겨입었다.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밤에는 추우니까. 외투를 입어줘야겠지.
“저, 언니.”
나가려던 나를 박헌영이 불러세운다.
“응. 왜?”
박헌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박헌영이 나를 지나쳐갔고, 나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음에도 무슨 말인가 들어버린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얘길 하려던걸까. 잠깐 생각해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아까 그걸 보기라도 한건가?
박헌영이 설원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던 그 장면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새삼 방금 전에 있었던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느꼈다. 그리고 그걸 박헌영이 봤다면, 배신감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오해는 분명히 할 수밖에 없다.
손에 식은땀이 난다. 박헌영은 나갔고, 나는 집 안에 우두커니 선 채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한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발작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차라리 그렇게 된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제야, 나는 잠깐 그 품에 안겨있던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생각해봤다.
어쩐지, 설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해도 얼굴이 아니라 목을 보고 말했고, 제대로 쳐다보는 것 자체가 뭔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치이이익!
설원이 고기를 굽는다. 박헌영이 저가 하겠다고 했지만 머리칼을 살짝 태워먹더니 곧 기겁하며 물러나 머리를 묶었다. 뒤로 올려묶은 금발과 시원스럽게 드러난 목, 확실히 박헌영은 미인이다.
“그나저나 너 머리 되게 자연스럽게 묶네.”
“머리 묶을 줄도 몰라?”
“그야....”
“묶을 줄 알아야 편해. 머리감기 싫을 땐 묶는 게 최고야.”
박헌영은 팔목에 걸린 머리끈을 하나 빼더니 내 머리를 능숙하게 묶어줬다. 박헌영이 자기 머릴 높게 올려묶었다면 내 머리는 조금 아래로 늘어뜨리듯 묶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게 했다.
“확실히 언닌 이 편이 더 잘 어울리네.”
“그래? 잘 모르겠는데.”
“청순한 매력 확 끌어올려진거 안 느껴져? 야 설원, 봐봐. 어때?”
어떠긴 뭐가 어때, 머리칼 하나 묶은 것 가지고 사람이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진다고.
“잘 어울리네.”
하지만 설원의 그 말에 나는 말을 잊었다. 그냥 한 말일거다. 내가 풀죽어있으니 그냥 하는 말일텐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뭔가 가슴 깊은 곳이 간지러워서 못 참게 되어버린 것처럼 몸이 살짝 떨렸다.
여전히 설원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다. 설원은 내게 그렇게 말한 뒤 고기를 굽고 있다.
어찌어찌 고갤 들자, 박헌영이 멍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설원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내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조금 놀란 것처럼.
그리곤 웃으며 내 어깨를 톡 친다.
“언니 얼굴, 빨갛네.”
숯이 뜨거워서 그런가봐, 라고 말하며 박헌영은 내 맞은편에 가 앉았다. 내 얼굴이 빨개졌던가. 그랬나, 나는 잘 모른다.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
그저 뭔가 변해가는 와중에, 해변에서의 그 일로 이제 어떤 변화는 완결되어버렸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완결은 어떤 완결로 종결되는 어떤 무언가인가?
아니면 어떤 시작의 예고인가.
예고라면, 언제 시작되는가.
그건 잘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묶었기에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고기를 구웠다.
“누나 진짜 고기 존나 못 굽네.”
설원은 내가 구운 고기가 겉은 탔는데 속은 덜 익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죽거렸다.
“새끼야. 스테이크도 못 먹어봤냐. 미디엄레어야 미디엄레어.”
“그래 이게 소고기였다면 그럴듯한 변명인 건 인정하겠는데 돼지목살을 구우면서 하기엔 구차한 변명 아니냐?”
“적당히 타협하고 처먹어.”
내가 으르렁거렸고 결국 투덜거리던 설원관 달리 시종 묵묵히 있던 박헌영이 집게를 빼앗았다.
“언니는 그냥 처먹기만 하는 게 도와주는 것 같아.”
“그, 그러냐....”
우리들 중 요리실력은 박헌영>설원>>>>>나 수준이고 그건 고기굽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딱 알맞게 불맛을 입혀 구운 박헌영의 고기는 지금까지 내가 구운 고기와 같은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박헌영과 설원은 소주를 마시고, 나는 콜라만 마셨다. 술을 마시면 상태가 더 안좋아질지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안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괜히 술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끔찍한 꼴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설원은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운다. 그러고보니 요즘 잘 안 피우네. 박헌영이 알맞게 구운 고기를 먹는다. 밤이라 그런지 날씨가 쌀쌀하다.
“내일 불꽃놀이할까?”
박헌영의 말에 설원이 담배연기를 훅 뱉으며 씨익 웃는다.
“너 또 그거 뭐 따라하는거지.”
“아니 좀! 그냥 하자고 할 수도 있는거잖아?”
“맞네.”
“응, 맞긴 한데. 어쨌건 하자구우---!”
박헌영이 징징거린다. 설원은 뭣하러 그런 걸 하냐며 귀찮은 기색이었다. 나는 불꽃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불꽃놀이의 화려함을 기억하지 않는다. 내게 언제나 불꽃놀이의 인상은 모든 것이 타들어가버린 뒤 남아버린 고요와 적막.
그리고 옅은 화약냄새다.
어떤 불꽃놀이도 끝이 있기에, 소란 이후의 그 적막이 나는 견디기 어려웠다. 어릴 적 보았던 불꽃놀이에서 나는 환희가 아니라 허무를 자각했다.
무엇에건 끝이 있다. 그리고 끝은 방금 전까지의 모든 소란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섬뜩하게 적막하다.
그래서 불꽃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하자. 저렇게 하고싶어하는데.”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나는 그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자 설원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흠.... 그런가?”
“하는거다! 하는거다! 아싸!”
“너무 좋아하니까 하기 싫긴 한데 뭐.... 그래. 하자.”
박헌영이 뛸듯이 좋아했고, 나는 뭔가 말실수를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헌영이 하자고 할 땐 하기 싫은 기색이던 설원이 내가 말하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놨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박헌영이 서운해할 수도 있을거다. 설원이 나만 신경쓰는거라 생각하고, 내 말만 듣는 걸 박헌영이 기뻐할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이상하다.
박헌영과 무슨 라이벌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걸 내 스스로 인정해버리는 꼴과 대체 뭐가 다른가. 그리고 이렇게 서로의 감정을 신경써버리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 짓거리인가.
설원을 매개로 박헌영과 내가 신경전이라도 하는 것 같다. 전혀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러고픈 마음도 없다.
설원은 소주를 한 잔 마신다. 박헌영도 한 잔 마신다. 술을 마시는 꼴들을 보아하니 나도 한 잔 기울이고픈 마음이 치솟지 않는 것도 아니다. 원래 술을 좋아하고, 오늘은 술을 마셔도 되는 날이니까. 하지만 내 자신이 불안해서 마실 수가 없다.
그나저나, 낮에는 꽤 따뜻하더니 해가 슬슬 넘어가려고 하자 날이 점점 추워진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견디기 힘들만큼 꽤 추워져버렸다.
“날이 좀 춥네.”
“그러네, 이거까지만 먹고 들어가자.”
고기도 먹을만큼 먹었고, 이제 슬슬 따뜻한 실내에서 이차를 해야 할 타이밍이지 싶다. 먹은 것들을 정리하고, 적당히 치워놓은 뒤 설원과 박헌영이 안으로 들어간다.
술 먹고 싶다. 술 마시고 싶어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나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
내 말에 설원이 걸음을 멈춘다.
“같이 가?”
그 말은 고맙지만, 더 이상 박헌영에게 설원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양이다.
“아니, 혼자 갔다올래.”
“어, 추우니까 빨리 와.”
“응.”
어차피 사람은 아무도 없는 해변이다. 혼자 산책해도 아무 일 없을거고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다. 어둑한 계단을 내려가 해변으로 간다.
밤이 내린 해변을 좀 걷자. 그리고 혼자서 생각을 조금 정리해보자. 내가 뭘 원하는건지, 나는 어디로 와버린건지.
박헌영과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건지에 대해서.
박헌영에 대해서뿐만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생각해야 한다.
대강 쓰레기들을 정리한 뒤 나와 박헌영은 펜션 안으로 들어왔다. 누나 쪽은 혼자 산책을 한다는데 괜찮을지 어떨지 걱정이지만, 굳이 따라가는 건 오히려 상처를 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자꾸 자신이 약해졌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도 나쁜 일이다. 차라리 내가 조금 걱정하고 말지, 어차피 이 주변엔 사람도 없어서 혹시모를 위험한 일이 생기지도 않을거다.
“저렇게 혼자 보내도 되려나?”
박헌영이 걱정된다는 듯 통유리로 된 창밖을 바라본다.
“전화도 가져갔는데 뭐가 걱정이야? 좀 있다가 걱정되면 전화나 해.”
“그래야.... 앗!”
-땡그랑!
박헌영이 들고 움직이던 쟁반을 들고 화려하게 엎어져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나는 황급하게 박헌영을 일으켰다.
“괜찮아?”
“어, 어.... 아 썅 이게 뭐야.”
“멍하니 있으니까 그러지 등신아. 취했냐?”
“응 조금....”
다치진 않았지만 쟁반에 있던 기름장에 쌈장이 옷에 묻어서 엉망진창이다.
“내가 정리할 테니까 옷이나 갈아입고 와.”
“아 이거 오늘 처음 입은건데.”
원피스가 망그러졌다며 박헌영이 투덜거리며 방으로 올라간다. 칠칠맞긴, 쏟아진 것들을 정리하고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일단 설거지부터 해놔야 뭘 할테니, 정리부터 하는 게 낫겠다. 설거지를 시작하려는데, 박헌영이 옷가지를 가지고 내려왔다.
“안 갈아입고 뭐 해?”
“씻고 갈아입으려구. 기름 엄청 묻어서 몸에서도 냄새나.”
하긴, 고기를 박헌영이 제일 많이 구웠으니 얼굴도 번지르르한게 한 번 씻어줘야 할 것 같긴 하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고, 박헌영은 여기저길 둘러보더니 어쩐지 돌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나도 그제야 뭔가 생각났다.
“어....”
“야, 그러고 보니까....”
나와 박헌영은 동시에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실 창밖에는 사람 여섯은 들어가고도 남을법한 거대한 욕조가 있었다. 박헌영은 어쩐지 기계적으로 내 쪽을 바라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저 욕조는, 일단 큰 걸 떠나서 통유리 너머로 전부 보인다. 가릴 수 있는 커튼 같은 건 없다. 애초에 일부러 가릴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원천차단해버리려고 했다는 듯.
저기서 목욕을 한다면 전부 보일 게 분명하다.
“야, 그, 일부러 이런 건 진짜, 진짜 아니긴 한데....”
박헌영은 진짜로 씻으려면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 몰랐다는 듯,
“......샤워로 하면 안되겠냐?”
“그.... 샤워룸 같은 거 따로 없는 것 같은데. 화장실은 있어도.”
아니 무슨 풀빌라가 이 모양이야? 애초에 저기가 아니면 씻을 수도 없게 만들어놓은 게 일종의 계략 같은건가? 일단 저기서 씻으면서 사고를 제대로 한 번 쳐보라는 배려같은건가?
다른 상황이라면 몰라도 지금 그 배려 나한테는 전혀 필요없는데?
박헌영이 뭔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웃는다.
“그,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잖아.”
“뭐?”
“즐겨, 나도 즐길테니까.”
“그러니까 뭘 즐기냐고!”
뭔가 대답하지도 않은 채 박헌영은 원피스를 훌렁 벗어버렸다.
“같이 씻을래?”
“야 이 미친!”
“싫음 말고.”
박헌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어졌는지 깔깔거리며 욕실로 들어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