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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13화 (213/224)

213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설원이 사온 주먹밥을 하나씩 나눠먹은 뒤 버스에 탔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할만큼 여유로운 버스시간이 아니었다. 우등버스 단독좌석, 확실히 좋다. 만약 누가 옆에 앉아야 했다면 분명히 조금 고민정돈 했을거다.

설원은 박헌영과 앉아야 되는 자리배치에 어쩐지 뜨뜻미지근한 표정이었다. 창가쪽에 앉은 박헌영과 복도쪽 자기 좌석을 확인한 설원의 표정이 볼만하다.

“아....”

“서운하게 대놓고 싫어하네. 야, 나는 너랑 앉고 싶어서 앉는 줄 아냐?”

아니, 맞잖아.

박헌영이 빈정 상한다는 듯 쏘아붙이자 설원은 이죽거리며 자기 자리에 앉는다.

“...누가 뭐래?”

“사실 앉고 싶어서 앉은거 맞아!”

그러면서 박헌영은 설원에게 착 팔짱을 낀다. 진짜 박헌영의 저런 행동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애간장이 살살 녹아서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설원은 기겁한다.

“적당히 좀 해....”

이젠 지랄을 할 기력도 없는지 설원이 한숨을 푹 쉰다. 팔짱낀 팔을 억지로 빼려다가 박헌영이 찰떡처럼 달라붙어 있었기에 쉬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좀!”

“아 왜애애애애애- 그냥 좀 포기해라 너도.”

“하아....”

정말로 지쳤는지 설원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좌석에 늘어져버렸고, 박헌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설원의 팔에 딱 달라붙었다.

“흐흐, 새끼 포기했군. 역시 근성은 승리한다.”

“누나 나랑 자리 바꿀래?”

설원의 말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갤 젓는다. 저 꼴도 보기 싫은 건 맞지만 내가 저기 앉으면 나한테도 저 짓거릴 할 것 같다.

“아니 전혀. 힘내.”

“들었지? 들었지들었지? 넌 내꺼야 임마.”

“닥쳐.”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미안하지만 설원을 외면해버린다.

그러니까, 박헌영이 저러는 꼴을 보고싶지 않아서 외면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냥 귀찮으니까 외면하는거다. 버스는 곧 출발하고, 일정한 진동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슬쩍 설원쪽을 바라보자 설원은 아직도 박헌영과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기어코 팔을 빼낸 설원은 박헌영에게 으르렁거렸고, 박헌영은 꽁지 만 너구리마냥 창가에 바싹 붙는다.

“진짜 철벽남. 이쯤되면 재수없는 거 알지?”

“너야말로 그만 들러붙어.”

“에베베---”

“에베베 이지랄.”

박헌영이 애처럼 구니 상대적으로 설원도 애처럼 군다. 왜 저래 둘 다. 웃기게 노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박헌영이 들러붙기만 하고 설원이 짜증내는 게 아니라, 둘은 놀고 있는거다. 확실히, 설원은 기분나빠보이긴 하지만 진짜 싫으면 정색하고 화를 낸다. 꼭지 돌면 앞뒤 안 가리는 놈이 투덜투덜거리면서도 정색하지 않는 건, 결국 나름대로 재미있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설원도 박헌영처럼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뭔가 그 둘을 관찰하는 나 스스로가 이상해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버스는 동해로 향한다. 얼마나 걸릴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버스에서 보내야 할 시간이 좀 길거다.

잠이나 잘까 싶은데, 잠은 안 온다.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

-쿵.... 쿵....

뭔가 머리를 콩콩 박아대는 것 같은 소리에 옆을 보니 박헌영이 졸고있다. 설원이 밀어내버렸기에 박헌영은 졸면서 창에 머리를 계속 콩콩 부딪히고 있다.

그리고 설원은 그런 박헌영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제 밤을 새면서까지 원고작업을 했으니까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한거다. 다크서클이 볼까지 흘러내릴 지경인데 설원을 그렇게도 귀찮게 했으니 거의 기절할만하지.

설원도 그걸 알고 있다.

-쿵.... 쿵....

“하아....”

설원은 박헌영을 한참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쉰다. 그리고는 박헌영을 제대로 좌석에 기대게 만들어주지만, 녀석은 계속 고개를 까딱거리며 헤드뱅잉을 한다.

“염병.”

설원은 짧게 욕을 내뱉곤, 박헌영을 살짝 잡아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사고가 정지해버린다. 마치 보면 안 될 걸 봐버린 것처럼. 아니,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지. 계속 저렇게 자게 내버려두면 안쓰러우니까.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설원이 그럴 수 있다고 계속 생각한다. 박헌영은 아주 좋은 베개라도 찾았다는 듯, 자면서도 설원의 팔을 다시 끌어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너 자는거야? 자는 거 맞아? 자는 척 하면서 그러는 거 아냐?

아니, 깨어서도 그러니까 자면서도 저럴 수 있는거고 박헌영이 저런 식으로 설원의 행동을 유도해냈다면 그게 하면 안 될 일인가? 안 될 이유같은 건 없고 나쁜 것도 아니잖아. 나는 왜 지금 저 행동을 의심하지?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설원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리고 나는 설원이 고개를 돌리려 하기 무섭게 창문을 바라보며 그 시선을 피했다. 내가 설원의 시선을 피한 것 자체가 이상하다.

왜 피한거지? 부끄러워서? 설원이 민망해할까봐?

아니. 아니다.

그 모습을 본 내 표정이 뭔지 나도 알 수 없어서,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을 설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가.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어떤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이 표정을 설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거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면 이유를 알 것도 같았고, 지금의 내 마음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픔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저 둘이 아픔을 알아버리고 날 배려한다. 그렇기에 아픔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같은 방식으로 내 마음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행위도 사실은 무의미한거란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동해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짐을 내리고 오랜 버스 탑승으로 굳은 몸을 천천히 풀었다.

“원아아.... 나 졸려....”

아직 잠이 덜 깬 박헌영은 눈을 부비며 설원에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반쯤은 자고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건 의식적으로 저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냥 저러는거다.

이젠 저렇게 멍하니 있을 때에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박헌영의 적응은 완전히 끝난거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박헌영은 이제 여러모로 끝장이 나버린 인간이다.

컨셉에 잡아먹혀 박헌영이 컨셉을 하는건지 컨셉이 박헌영을 하는건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설원도 그런 박헌영의 모습을 보며 슬슬 감이 오는지 말투나 행동에 대해서 딱히 그만 역겹게 굴라는 둥의 말은 무의미해졌다는 걸 안 모양이다.

예전엔 달랐을지 몰라도, 이젠 저게 박헌영이다.

졸리다고 하품하고 눈을 부비며 설원의 팔에 매달리고, 징징거리고 칭얼거리면서 또 할 때는 하는 그런 것이 전부 박헌영이다.

“하아아암.... 우리 숙소부터 가면 안돼?”

“그만 징징거리고 따라오기나 해.”

그러니 설원의 박헌영에 대한 태도도 조금 누그러졌다. 물론 저건 어떤 강을 건너가버린 박헌영에 대한 체념이기도 할거다.

“너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아?”

박헌영의 물음에 설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숙소 잡자며. 일단 잘 곳부터 정해야지.”

그 말에 박헌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숙소 어딘지 아냐고.”

“널린 게 모텔이야. 방 잡아놓고 좀 쉬다가 나오지 뭐. 방은 두 개면 뭐 되겠지.”

“아니 무슨 소리야 진짜.”

“너야말로 뭔 소릴 하는건데?”

박헌영은 배시시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인터넷 화면이 켜져있었다.

“펜션 잡아놨는데, 거기 어딘지 아냐구 바보야.”

숙소를 잡자는 게 아니라 숙소부터 가자고 한 건 그런 의미였나! 나도 얼이 빠졌고 설원도 얼이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박헌영은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미리 펜션을 예약해뒀다. 아니, 대체 언제 그렇게 빠르게 예약해놓은거야?

“어?”

“언니도 사람 적은 데에서 노는 게 더 좋을 거 아냐. 계좌이체도 해놨어.”

“아, 으.... 응.”

“먹고 싶은 거 다 먹자! 내가 쏜다!”

굳이 펜션을 잡아둔 건 내가 사람 많은 곳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때문이었나. 박헌영이 앞서 걸었고, 나와 설원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저 새낀 가끔은.... 빛이야.”

진짜 이상한 놈이고, 이젠 컨셉질에 자아마저 잡아먹혀버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게 박헌영이지만, 박헌영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갖고 있다.

다름아닌 자본. 압도적인 자본력. 외모보다도 박헌영은 그 점에서 우리 둘을 무조건적으로 상회한다.

그러니 모든 걸 가졌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하지만, 나는 설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가끔씩, 빛과 소금이야.”

“인정한다.”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박헌영에게 쏟아지는 햇살이, 녀석에게 후광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자본은 위대하다.

그 자본을 가진 친구는, 더더욱 위대하다.

그런 생각을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나 자신이 어쩐지 슬프기보단. 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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