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큰 것을 요구하고 거절당한 뒤, 그보다 더 작은 것을 요구해 원하는 걸 얻어내는 협상방법.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이 협상방법을 박헌영은 정말 제대로 사용했다. 다짜고짜 원아라고 부르면 설원이 정색할 걸 알기에 애칭이니 뭐니 하는 말로 설원을 살살 긁다가 딱 원하는 것만 얻어갔다.
“원아, 우리 어디 가?”
“.......”
설원이라고 부르건 원아라고 부르건 결국 제 마음대로다. 솔직히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아닌데 뭐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설원도 그걸 알기에 뭔가 찝찌름한 표정을 짓곤 있지만 하지 말라고도 못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박헌영은 내가 설원에게 누나라고 불리고 있으면 자기도 그런 어드밴티지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발, 내가 왜 네 경쟁자인건데? 난 그럴 생각 없으니까 피곤하게좀 살지 마라.
“어디 갈거냐니까? 생각해놓은 데 없어?”
“그냥 여기가 아닌 다른 데를 생각했지 딱히 갈 곳 정해놓은 건 아닌데.”
우리는 지금 태원터미널로 가는 지하철에 탄 채 목표지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나도 딱히 어딘가 가고싶은 곳이 있는 건 아니다. 당장 떠오르는 거라고 해봐야....
“그냥 지금 떠오르는 무난한 건 바다.”
하지만 내 말에 박헌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온천이지! 여름엔 바다고 겨울엔 온천이잖아! 물론 봄이긴 한데 아직 좀 추우니까 온천이다!”
그 말에 설원이 뭔가 지겹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거야말로 네가 좋아하는 그런 것들의 클리셰잖아. 그렇게 살고 싶냐?”
“윽.... 너, 너.... 세파에 찌들어서 감성을 잃어버린거 아냐?”
뭐만 하면 바다니 온천이니 해대는 거의 고정루트같은 상업창작물에 대한 이야기인가. 나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설원은 박헌영이 추천해주는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긴 하다.
“뭣보다 온천에 가는 순간 네가 무슨 개짓거리를 할지 모르겠어. 절대 안 가.”
물론 거기에는 클리셰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박헌영(경구피임약 1회 복용)이 무슨 또라이짓을 할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 큰 것 같다.
“바다나 가자. 회나 먹지 오랜만에.”
“수영도 못하는 계절에 무슨 바다야아아아아--- 나중에 가자. 원아아아아아 나중에 수영복 입은 거 보여줄테니까 나중에 가자아아아---”
“수영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지랄말고, 어느 바다를 갈지만 딱 정해.”
박헌영이 징징거렸지만 설원은 다른 어딜 가도 온천만큼은 가기 싫은 모양이다. 결국 길고 긴 실랑이 끝에 목적지는 동해로 결정되었다. 박헌영이 온천 온천 노랠 불러댔지만, 설원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제발 이상한 소리 좀 그만 하라고....”
설원이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린다. 괜히 이러는 것만은 아니다. 솔직히 나야 뭐 그렇다 쳐도 박헌영은 너무나 주목받기 쉬운 외모다. 금발에 푸른 눈이지만 동양적 미인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마치 빚어낸 것 같은 혼혈미인인데, 한국말도 유창한 걸 넘게 구사한다. 뭐 당연히 원어민이니까 그런건데, 남들 보기엔 그렇지 않다.
그러니 박헌영은 외모도 언행도 주목받기 너무 쉬워서 이 지하철에서 박헌영을 계속 쳐다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럽코니 온천이니 괴상한 소리만 지껄여대고 있으니 설원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도 당연하다.
“럽코 필수이벤트가 증발했어....”
하지만 박헌영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구입해온 박헌영은 표를 손에 쥔 채 돌아왔다. 설원은 간단하게 먹을 것 좀 사오겠다며 매점 쪽으로 갔다.
“두시차야. 언니!”
“...왜?”
“가위바위보.”
“뜬금없이 웬....”
“가위 바위....”
뭐야?
“보!”
사람이란 이상하지.
가위바위보란 말만 들으면 반사적으로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내게 되어 있다.
박헌영은 가위, 나는 주먹. 뭔진 모르겠지만 이겼다. 그리고 박헌영의 표정이 상당한 울상이 되었다. 뭔데? 이거 대체 뭘 건 가위바위보였던건데? 박헌영은 표를 내밀었다.
“이긴 사람이 설원 옆에 앉는건데, 언니가 이겼으니까 줄게....”
“...아니, 애초에 그런 거에 동의한 적 없거든?”
제멋대로 내기를 걸고 풀 죽고 아주 가지가지 한다. 박헌영이 이러는 게 진짜 장난을 치는건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진심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저 장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뭔가 이런 박헌영의 행동들에 장단을 맞춰주는 게 귀찮다. 그리고 뭔가 엮여들어가는 느낌이라 기분나쁘고.
건네진 표를 보니 우등버스다. 우등은 단독좌석이 있다.
“아니 이긴 사람이 좌석을 선택해야지. 단독좌석 아냐 그거?”
“응, 그렇긴 한데....”
“내가 혼자 앉을래, 네가 설원이랑 앉아.”
“진짜? 그래도 돼?”
“...아니, 진짜 고마워하니까 기분 더 이상하거든.”
“흐흐, 이 배려를 평생 잊지 않겠어요 시스터.”
박헌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표 두 장을 가진 뒤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나 좋냐. 그렇게나 설원이 좋냐? 그게 진짜냐? 어디부터 어디까지 장난일까가 컨셉이라고 했지만, 나도 정말 모르겠다.
텐션이 확 올라간 박헌영은 생글생글 웃는 중이었다.
다른곳에 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테니 조금 더 편할 수 있겠지.
금요일의 터미널에는 사람이 많다. 어딘가로 가는 사람도 많을거고, 어딘가에서 돌아온 사람도 많을거다. 그나마 늦은 시간이 아니라 미어터질 정도는 아니긴 해도, 사람이 많은 건 많은거다. 오가는 사람들은 박헌영을 무조건 한 번씩은 힐끔 보고, 그 곁에 있는 나도 힐끔 보며 지나간다.
그 시선들이 느껴진다. 아래에서 위로 한 번 슥 훑는듯한 시선, 박헌영은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을 붙잡은 채 뭔가를 열심히 치고 있다.
그리고 박헌영을 본 사람들은 나도 한 번 훑는다. 아래에서 위로.
그들이 훑어보는 시선 속에서 감탄을 하건 실망을 하건.
쳐다본다는 게 중요하다. 기분이 더럽다. 그래, 쳐다보지 않고 지나가기에 박헌영은 지나치게 눈에 띄는 게 사실이고, 같이 있는 나도 눈에 띄는 건 사실이야. 내 복장은 그냥 청바지에 후드티에 운동화일 뿐이지만.
쳐다보지 않고 지나가기 좀 어렵긴 해. 하지만 이건 자랑이 아니다.
박헌영은 그런 시선들을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들이 자신을 성적 대상화를 하건 말건, 불쾌해하지도 않는다. 박헌영은 그 시선들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그 시선에 신경써야 할 이유조차 찾지 못하기에, 불편하지도 않은거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 시선들을 무시할 수는 있을지언정, 시선을 신경쓰는 것 자체는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자의식이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느끼는 불쾌함, 익숙해지진 않았어도 그러려니 이악물고 넘길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르다.
그 시선들 속에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나를 두렵게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스트레스는 일정 수치를 넘어서는 순간 나를 실제로 압박해올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박헌영에게 다가가 팔을 살짝 잡는다.
“응? 웬일.... 뭐야, 왜 그래?”
박헌영이 웃으며 날 바라보다가 내 상태를 보곤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그리고는 주변을 바라보고, 슬쩍슬쩍 바라보는 그런 시선들 속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은 모양이다.
나는 박헌영의 팔을 살짝 잡은 채, 고개를 숙인다.
“사람 좀 없는 데로 갈까?”
“응, 응....”
불안하다. 아직 발작이 일어날 것 같진 않지만, 발작이 일어날 것 같아서 불안하다. 죽을 것 같아서 죽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지금 그걸 느낀다. 이대로 더 있으면 분명히 발작이 온다. 또 올거다.
박헌영이 내 손을 잡고 이끈다.
“주변 보지 말고, 고개 숙이고 나만 따라와.”
“응....”
설원이 믿음직한 것처럼, 박헌영도 믿음직한 건 마찬가지다.
왜 나만.
왜 나만 약해졌을까.
왜 나만 이러는걸까. 나만 이렇게 변한거면 모르겠는데, 변한 너는 왜 강하지? 이렇게 되었는데도, 나보다 더 기분나쁜 시선을 받는데도 왜 너는 그런거지?
나만 변한 게 아니라서, 나는 내가 더 처참해진다. 나보다 더 튀는 외모로 주목을 받는 박헌영은 꿋꿋한데, 나는 왜 이렇게 되는거고 너는 멀쩡하다못해 나까지 신경써주는걸까.
내가 죄를 지어서 그런가. 내가 잘못을 해서 그런건가.
아픔에 이름을 붙이지 않겠다 말해놓고, 결과적으로는 말한 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설원과 박헌영의 배려를 받는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계속해서 환멸할 수밖에 없는 순환의 굴레에 빠져버린 것 같다.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애초에 주어지질 않는다.
박헌영, 네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네가 있어서 나 자신을 더 환멸하게 돼.
그리고 날 배려하는 너에게 그런 생각을 품은 나를 발견하고, 더더욱 나를 환멸하게 돼.
“여긴 좀 사람 없다.”
“응....”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터미널 2층의 복도 한켠에서, 나는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다. 창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나를 보지 않는다.
“후우....”
“많이 안좋아?”
“이런 말 하니까 미친 것 같은데, 아니, 미친 거 맞긴 한데. 안좋은 게 문제가 아니라 안좋아질 것 같아서 안좋은 게 문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응, 응. 알아. 그런데 미쳤다고 말하지 마. 굳이 그렇게 자기비하 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응....”
박헌영이 내 양손을 붙잡고 힘겹게 웃어보인다. 그 웃음이 고마워서 살짝 이를 악문다. 내가 아프니까 너도 아픈가보네. 아픈 사람은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그 아픔을 휘두르고 패악을 부리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내 아픔은 타인에게도 아픔이 된다.
고맙다고 생각해야 돼. 설원에게도 박헌영에게도, 오직 그것만 중요하다. 박헌영을 질투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질투하는 것보단 나보다 잘난 사람을 언젠가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던 게 나니까.
그 마음으로, 박헌영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게 아니라 박헌영처럼 되고, 박헌영보다 더 의연하게 살려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그게 나니까.
그게, 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