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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11화 (211/224)

211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당일치기가 아니라 며칠정도 묵고오잔 설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금요일이다. 그러니 굳이 통으로 며칠을 날리지 않아도 주말을 끼면 어딘가로 가는 건 어렵지 않다.

난데없이 여행이라니, 뜬금없긴 하지만 못 갈 것도 없다. 그리고 궁금하다. 날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라면 괜찮을지, 확인하고 싶다.

어쩐지, 이대로라면 설원과 둘만 가게 될 것 같다. 당연히 설원이 걱정하는 게 보이는 지금, 그리고 설원을 내가 의지하는 지금. 둘만 가는 건 절대로 하면 안 될 짓 같다. 나는 지금 내 불안정한 정신이 무슨 행위를 불러일으킬지 두렵다. 단순히 발작이 문제가 아니라, 발작보다 더한 짓거릴 할 것 같다.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불러일으킬 공포심에 질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공포심에 나는 분명히 설원에게 기대려고 할 것 같다. 지금도 이러고 있는데 그 때라면, 전혀 모르는 곳에 간다면 그 때의 기분과 두려움에 취해서.

나는 설원에게 나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다른 불안을 안고 기분전환을 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래서, 전화를 건다.

“박헌영도 같이 가자고 할게.”

“그래.”

설원은 그러건 말건 상관없다는 태도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어떤 위험한 일도 벌어지지 않을거라 확신하는 그 태도가 믿음직스럽다. 설원은 믿음직스럽지만, 내가 불안한 건 나 자신 때문이다. 설원이 이 모양이라 다행이다.

“여보세요.”

-으으으.... 왜애애애애....

다 죽어가는 것 같은 박헌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불안한 마음은 많이 진정되어서, 평정심을 되찾았다.

“원고 끝났냐?”

-이제 막.... 잘거니까 끊....

“놀러갈래?”

-뭐어...?

“주말동안 며칠 잠깐 놀러가자.”

-차라리 죽여.... 난 잘거야....

“그럼 좀 자고 밤에 갈래?”

-난 주말 내내 잘거야.... 잘거라구우....

하지만 박헌영은 밤샘원고작업으로 인해 탈진이 가까운 모양인지, 목소리가 갈라지는 등 아무래도 제정신인 것 같지는 않았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같이 가 줘야겠다.

더 큰 불상사를 내 손으로 또 만들어버릴수는 없어.

그리고, 나는 이런 말은 정말 하기 싫지만 박헌영이 오지 않고는 못 배길 말이 뭔지 잘 알고 있다.

“...너 안 오면 나랑 설원 둘이서 갈 것 같은데.”

-뭣!

순식간에 박헌영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아온다.

-날 빼놓고 럽코를 찍으러 가겠다고! 절대 허락 못 해!

“.......”

너무 예상한 반응이라 뭔가 끔찍한 기분이 되어버렸고, 설원도 무슨 개소릴 하냐는 듯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원래 럽코는 삼각관계야! 여행은 내가 있어야 완성된다고! 절대 둘이서만은 못 보내! 갈거야! 간다고!

아니, 예상한 반응이 나오긴 했는데 방식이 조금 다르다. 박헌영식 관점에선 내가 설원과 둘이 가면 타겟을 빼앗기니까 따라올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를테면 질투에 기반한 느낌으로.

러브코미디를 완성시키려면 무조건 셋이서 가야한다는 논리가 나올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역시 박헌영은 어떤 부분에선 여전히 예측이 전혀 불가능하다.

-흐흐흐.... 낭만적인데. 청춘은 늦게도 찾아오는군 친구여.

“...그냥 너 오지 마라.”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낙장불입이거든! 빨랑 씻어야지!

뚝!

하고 전화가 끊어져버린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고, 설원은 뭔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음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좆,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떠듬떠듬 말하는 설원은 진심으로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그 생각 하는 중이야.”

공황장애가 설원에게도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설원도 볼만한 표정인 건 마찬가지였다. 박헌영을 부른 건 과연 실수일까 아닐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예상한 최악의 상황보단 무조건 나을 수밖에 없을거다.

...그렇겠지?

설원도 집에 가서 적당히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들을 챙겼고, 나도 옷을 챙겨서 미리 나왔다. 다음 수업은 제낀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면 수업에는 항상 갔는데, 이렇게 가기 싫다고 안 가는 건 정말 처음인 것 같다.

이래도 되는건가 싶긴 하지만.

이러면 안 될 건 또 뭔가. 지금 당장 내가 숨이 넘어갈 판인데.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선,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 나를 혐오하고 비웃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러면 내가 안심하고 있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거잖아.

지금 이 상태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러니 금방 나아지지도 않을거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이윤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첫 발작이 시작됐고, 설원과 연인이라는 말이 시발점이 되어서 다시 한 번 발작이 일어났다.

감당하기 스트레스가 원인이고, 이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내 몸이 스트레스를 제멋대로 느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일단은 내가 신경쓰게될 타인이 없는 곳으로 가야한다.

거기서 조금만, 마음을 안정시키면 이 증상이 빨리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어디갈래? 어디갈거야? 어디갈건데?”

박헌영이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폴짝거리며 뛴다. 따스한 봄날씨였기에 민트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같은 색 운동화를 신고 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귀엽긴 하다.

물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다크서클이 볼까지 흘러내린 모습이 측은하긴 하다. 그 상태로 용케 신나서 방방 뛰고 있구나 너.

“캐리어는 언제 샀냐....”

노란색 귀여운 캐리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이 원래 갖고 있던 건 아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사놨지.”

“옛날에 쓰던 건?”

“그건 지금의 이 몸에게 어울리지 않아.”

헹, 하고 코웃음친 박헌영은 브이사인을 그려보인다. 박헌영의 요즘 자의식 과잉은 병적인 수준이라서, 요즘들어 점점 더 제스처가 과장되게 변해간다.

“설원은?”

“옷 챙기고 올거야. 올 때 됐는데....”

“그래? 그런데 언니는 뭐 가방 하나로 되겠어?”

나는 굳이 뭘 많이 챙겨야 할 것도 없기에 배낭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다. 아니, 며칠 놀러가는건데 캐리어까지 끌고온 박헌영 쪽이 이상하지 않나?

“옷이랑 수건, 세면도구.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언니 병신이야?”

갑작스런 박헌영의 독설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갑자기 왜 지랄이야?

“여자가 챙겨야 할 건 꽤 많다고.”

“어? 뭘 더 챙겨야하는데 여기서?”

“생리대 챙겼어?”

“새, 새, 생. 생리대?!”

나는 그 말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뭐 가서 사도 되는거긴 한데 어지간하면 준비하고 다녀, 언제 터질지 누가알아? 보니까 사놓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래, 언제 생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있다보니 생리대를 사놓지도 않았다. 물론 만약 그 전에 일이 벌어졌다면 박헌영이 사 둔 걸 쓰긴 하겠지만.

지금 말을 꺼내기 전까진 생리대를 사놔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넌 챙겼어?”

“아직 한 번도 안 해보긴 했는데 항상 가지고 다니는 편이야. 뭐, 어차피 둘 중 하나가 곤란해지면 내 거 쓰면 되니까. 그냥 알고 있으라고.”

“그, 그.... 그래....”

박헌영은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 많은 걸 준비하고 있었다. 나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대로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혀를 쯧쯧 찬다. 뭐 이런 얼치기가 다 있냐는듯한 시선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비할 게 많다며.

“그럼 다른 챙길건 뭔데?”

“수분크림이랑 영양크림이랑 썬크림이랑 이런 기초화장품같은건 챙겨야지. 안 바르는 건 알겠는데 썬크림 제대로 안 받으면 피부에 안 좋아.”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살았잖아.”

“이젠 신경써줘야할거아냐.”

사람이 외양이 변했다고 라이프스타일마저 이렇게 빨리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건가? 물론 박헌영이 뭔가를 치덕치덕 발라대는 건 알았고, 나한테 발라보라고도 말했지만 난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았다.

글러먹은 짓거리랑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녀석이지만, 사실 박헌영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제 몸으로 실천하는 녀석 아닐까? 내가 벙쪄있자 박헌영은 실실 웃으며 내게 다가와 속삭인다.

“피임약도 챙겼어.”

“뭐! 이, 이 미친년이 그건 왜!”

“생리대랑 똑같은거지 왜 열내고 그래?”

“아, 아니 그거랑 이건 경우가 다르잖아!”

언제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니 생리대를 준비하고, 언제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니 피임약을 챙겼다. 물론 그 말만 보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걸 준비하는 건 진짜 이상하잖아!

“흐흐, 혹시라도 사고쳐야 될 상황 있으면 그냥 저질러버려. 준비는 충분하니까 시스터.”

박헌영은 진심으로 걱정하지 말고 저질러버리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좀 꺼져!”

아니, 해도 네가 하는거지 왜 날 떠미는데? 설원을 욕심내는 건 너잖아? 아니,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는건가. 실제로는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그냥 이러기만 하는걸수도 있다.

“하아.... 진짜 가져온것도 아니면서 짜증나게 굴지 말래?”

내가 눈을 부라리자 박헌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무슨 소리야. 진짜 챙겼는데.”

그리고는 캐리어를 열어서 진짜로 먹는 피임약을 보여줬다. 그리고 정확히 두 세트가 있었다.

진짜 있었어, 그것도 두 개나.

“혹시 모르니까 일단 하나씩 먹을래?”

피임약은 사후피임약이 아닌 한 계속 먹어줘야 한다. 사후피임약 처방은 의사만 받을 수 있으니 이건 지속투여해야되는 종류의 약일거다. 그러니 진짜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면 사후에 먹는 게 아니라 지금 먹어야한다.

“개소리 할래 진짜!”

물론, 먹을 생각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박헌영은 내가 보는 앞에서 그 피임약을 한 알, 낼름 삼켜버렸다.

“지, 진짜. 진짜 먹었어?”

“그럼 가짜로 먹냐?”

박헌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배시시 웃는다.

이건 광기다.

광기 이외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뭐야? 다 챙겼으면 내 방쪽으로 올 일이지.”

“으, 으앗!”

“!”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설원이 존재감을 확 드러내며 사각에서 나타났다. 나는 그걸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박헌영은 자신의 손에 들린 그 피임약을 재빨리 뒤로 감춰버렸다. 하지만 그 감추는 모습이 너무나 수상해보인 게 제일 큰 문제였다.

“...뭐야, 뭔데 숨겨?”

“아, 아 잠깐! 잠!”

그리고 설원은 박헌영의 뒤로 돌더니 홱 손을 잡아채며 그 손에 들린 걸 확인한다. 그리고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굳어진다. 그리고 분명히, 한 알 까먹은 것도 보았다.

“.......”

설원의 그 모습은 할 말을 찾는건지, 팰 곳을 찾는건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후자에 가까워보인다. 설원의 표정을 보자 박헌영도 안색이 하얗게 질려선 입술을 달달 떨기 시작한다.

쟤 진짜 쫄았다.

“어? 어? 이, 이건. 그. 그거야. 사랑의 대, 대비책이라고나 할까. 아, 안전벨트라고 할까.... 그, 그 있잖아? 설원? 사람 일은 모르는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이건 딱히 내가 널 따먹겠다는 게 아니라.... 아, 아니! 아니! 지금 건!”

결정적인 실수였다.

“이런 미친새끼가.”

-빡!

“악!”

거의 진심을 담은 꿀밤에 얻어맞은 박헌영이 거의 나동그라지듯 주저앉았다.

“아, 아파아아아.... 씨이이.... 아아..... 지, 진짜 존나아파....”

“진짜 저걸 어떻게 해야하지?”

설원은 씨근덕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깃든 분노는 분명히 어느 정도는 진짜다. 확실히 느껴져.

“나, 난 안 먹었어!”

말해놓고 나서야 나도 뭔가 이상한 소릴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고, 설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뭔 미친소리야! 의심도 안 했어!”

“아, 아니 그냥.... 안 먹었다고....”

내가 주저하며 대답하자 설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그렇게 말하는 게 뭔가 더 이상하니까 누나도 좀 닥쳐.”

“누나? 누나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아픈 건 어쨌냐는 듯 박헌영이 바짝 다가와 나와 설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박헌영의 눈빛에 위험한 의심이 깃든다.

“언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거지?”

“그렇고 그러긴 지랄, 그냥 남들 눈 신경쓰이니까 이렇게 부르는거지. 어차피 적응해야 될 거 아냐. 긁어 부스럼 만들어서 뭐해.”

하지만 박헌영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혼자만 갖고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설원의 팔에 매달렸다.

“나도, 나도 애칭. 애칭 해줘. 해줘. 해줘어어어어!”

“누나가 대체 왜 애칭인데? 징그럽게 지랄이야 자꾸, 혐오스러우니까 떨어져!”

“뭐? 혐오? 지금 너 혐오라고 한거지? 이거 문제있는거 맞지?”

박헌영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어보자 설원은 뭐 그딴 걸 고민하겠냐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너만큼은 혐오하니까 좀 떨어져.”

“아 진짜. 까다롭긴. 애칭 안해줄거야? 안만들어줄거야?”

박헌영이 이래도? 이래도? 라는 느낌으로 계속 설원에게 알랑거리지만 내가 생각해도 저 기이한 철벽의 존재는 더더욱 얼굴에 혐오의 표현을 표정이란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솔직히 나도 짜증나긴 하지만 저러면 뭔가 메스꺼운 귀여움이라도 느낄텐데 설원은 진짜로 미동조차 없다.

“꺼져.”

“어우, 진짜 패겠네 이거.”

살기마저 섞인 음성에 박헌영은 흠칫하며 슬슬 물러났다. 아무래도 설원의 냄비가 이제 끓기 직전이란 걸 감지한 모양이지. 저렇게 치고 빠질 때를 알면 애초에 화나게 하지도 말지.

물론, 이건 내 오판이었다.

“뭐 애칭으로 불러지는 게 불가능하다면 부르는 것도 방법이지.”

박헌영은 아직 멈출 생각이 없었다. 녀석은 캐리어를 끌면서, 설원을 지나치며 제딴에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자, 원아.”

그러면서 성큼성큼 앞서가는데.

나도, 설원도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말을 잊었다.

그건, 화가 난다거나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확신한다. 저건 변태가 아니라 요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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