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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09화 (209/224)

209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이윤희의 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머리를 비우려 한다.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생각하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섬뜩한 경험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다거나 병원에 가봐도 되겠지만 그러지 않겠다.

아픔에 명찰을 달아버리는 순간 더 아파질 것만 같아 두렵다. 수업을 쉴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의 모든 수업은 설원과 같이 듣는다.

그리고, 아무래도 녀석은 집에 가자마자 뻗어버렸는지 전화도 받질 않고 메시지도 없다. 녀석의 방으로 올라가서 도어락 패스워드를 누른다.

-벌컥!

“야! 몇신데 아직도 안 일어...!”

거기에는 알몸의 설원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방금 씻고 나온건지 머리가 젖어있다. 뭐야 이거, 이 새끼 자고 있지도 않으면서 왜 연락이 없었던거지?

“뭘 빤히 쳐다보고 지랄이야!”

설원이 빽 소리를 지르며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아니,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당황할 필요는 없잖아? 진짜로 아무 생각 안 드는데. 내가 강제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었다 해도 모든 남자를 보고 침을 질질 흘리는 짐승이 되어버린 건 아니잖아?

그러니 설원의 알몸을 봐도 아무 생각도 안 들 뿐이다. 아니, 오히려 새삼스럽게 저렇게 내외하는 게 더 웃기지 않나?

“뭐야, 새삼스럽게.”

“너.... 아니, 누나야말로 새삼스럽지! 씨발! 난 예전에도 홀딱 까고 다니진 않았어!”

“뭐야. 그렇다고 못 본 것도 아니잖아. 왜 지랄이래. 같이 목욕탕 가본 적 없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설원의 침대에 털썩 앉았고, 설원은 화장실에서 대강 속옷과 셔츠를 입고 나오더니 머리를 수건으로 훌훌 턴다.

“오해 살 만한 소리는 여기서만 하는거다. 알았지?”

아이라도 타이르듯 말하는 설원은 잔뜩 뿔이 난 것처럼 보였다. 다시 불안감이 치솟을 것 같은데, 이 공간에 있으니 안정된다. 설원에게서만 이러는 건 아니다.

아까 박헌영이 손을 잡아줬을 때도,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굳이 설원에게서만 특별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변명을 만들어내는 내 자신이 어쩐지 구차하다.

아무 소리나 해야겠다.

“넌 그런데 알몸 보여주는 걸 왜 싫어하냐?”

“...진짜, 진짜 이상하잖아. 왜 물어보는거야 그런 걸.”

솔직히 나는 그런 부분에선 항상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의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설원은 그런 부분에 대한 수치심이 대단한 것 같다. 그런 수치심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아니 뭐, 솔직히.... 작으면 이해하겠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잖아?”

물론, 과거의 나 정도는 아니다만. 그렇다고 꿀릴만한 사이즈는 아닌데?

“아, 제발. 제발 좀 닥쳐줘. 박헌영이랑 살더니 왜 박헌영같은 소릴 하는건데?”

“아니 성희롱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그래.”

딱히 별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한 말인데, 설원은 얼굴이 시뻘개져선 이 상황을 못 견뎌하는 것 같다.

“그 새낀 그래도 ‘나 지금 엄청 못된 말 할거다.’이런 표정 정도는 짓는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누나 쪽이 오히려 존나 개변태같다고.”

“그, 그런가...?”

박헌영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할거란 자의식정도는 갖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성희롱을 했다는건가? 그러면 내가 더 나쁜 게 맞겠지.

“그럼 사과할게.”

“염병.... 내 존엄이....”

“그러니까 왜 부끄러워하는데? 작은 것도 아니잖아.”

“달라진 게 없잖아!”

설원이 결국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내 머리통을 쥐어박아버렸다.

“악! 이, 이 미친새끼가! 사람을 막 패네!”

아, 내가 왜 이랬는지 알 것 같다.

“맞을 짓거릴 하지 마. 기회는 세 번 주어졌었다고.”

설원이 날 때려버리길 왜 바랐는지 알 것 같다.

“씨발.... 이 미친새끼가.... 미친.... 새....”

아파서, 눈물이 난다.

“끼...가.... 윽....”

“뭐, 뭐야.”

“으윽....”

아파서 눈물이 난다.

아파서,

“왜, 왜 그래 가, 갑자기....”

“씨...발....”

아픈 게 서러워서.

아프고 싶지 않았는데.

“흐, 흐흐...흑....”

아파져버린 게 서러워서.

벌어져버린 일들이 서러워서.

죄를 견딜 수 없어서.

“아, 무, 무슨 일 있어?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존나.... 쎄게 때렸잖아....”

설원은 뭔가 알았는지. 내 머리에 살짝 손을 얹는다.

“.......그렇게 아프게 때리진 않았는데.”

그래, 그렇겠지. 어차피 널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야.

망가짐이란, 자각하지 않아도 명명하지 않아도. 사건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미 전방위에서부터 날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이 남아있었고, 그것이 방금 찾아와버렸다.

“아프다고.... 썅....”

“...그럼 더 울던가.”

“그럴......거거든....”

아픔을 명명하기 싫은 나는, 다른 아픔을 빙자해 진짜 아픔을 슬퍼할 눈물이 필요했다는 걸, 눈물을 떨군 후에야 깨닫는다.

그리고 그 눈물을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사실도, 동시에 깨닫는다.

그렇기에 나는, 추하다.

학교에 간다. 자취방을 나와서 함께 걷는다. 갑자기 또 이상한 공포감이 찾아오면 어쩌나 싶어 두려운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지금 당장은.

설원은 내가 왜 울었는지 묻지 않았다.

“왜 안 물어보냐?”

“박헌영한테 물어볼건데?”

“...뭔가 조금 더 신중한 말을 기대했던 내가 병신이지.”

솔직한 건 가끔은 잘못이다. 하지만 설원이 그렇게 말하며 낄낄 웃는 등신같은 모습을 보니 불안감은 점차 옅어진다.

“그리고, 벌거벗은 모습을 아무렇게나 보여주는 쪽이 잘못이라고.”

아까 물어봤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별 대단찮은 이유는 아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냥 보여주는 게 싫다. 같은 의미로 나는 보여줘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애초에 누나도 이제 그런 거 신경쓸거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딱히 못 보여줄 건 없는데.”

내가 뚱한 표정으로 말하자 설원의 표정이 더더욱 볼만해진다.

“진짜. 밖에서 이딴 얘기 하지 말자고.”

“아니 사실이 그렇다는건데 왜 지랄이야 대체. 너는 신경쓰겠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신경 안 쓴다는건데?”

“그럼 아무한테나 보여줘도 된다는거야? 이거 완전 또라이아니야?”

“아니, 미친새끼야. 예전이랑 다를 게 없다고 그랬지 내가 벌거벗고 돌아다닌다고했냐? 예전엔 내가 아무한테나 벗은 거 보여주고 다녔어?”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거야? 하지만 설원은 내 말에 오히려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간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벗은 몸은 나한테만 보여준다는 미친소릴 하는거면 그냥 좀 닥쳐.”

설원은 진심으로 질색하는 것 같다.

“아니, 너 말고 박헌영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좀....”

내가 무슨 변태같은 소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얘길 하는건데 왜 자꾸 이상한 소릴 해대는거지? 친한 사이고 동성이었을 땐 아무 상관 없었으니까 지금에도 별 상관 없다는거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렇게나 정색하고 또 부끄러워하는 설원의 모습을 보니까 박헌영의 기분이 영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설원의 저런 분기탱천한 모습.

묘하게 괴롭히고 싶어지는 뭔가가 있어.

“보여줘?”

내가 실실 웃으며 말하자 설원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박헌영은 하나로 충분해. 두 번째 박헌영이 등장하면 내가 죽거나 박헌영 마크투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일걸.”

“심하게 정색하네 너.”

“그만큼 피곤하다고, 제발.”

애원하듯 말하는 설원의 모습 또한 역시 괴롭히고픈 마음을 자극한다. 설원을 말로 패는 건 피곤한 일인데 이런 식으로 패니까 타격감이 꽤 괜찮은데. 박헌영이 먼저 포지션을 잡아버린 게 꽤 아쉽게 느껴진다.

“뭐, 나도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보여주려고 하면 어떨진 모르지.”

“...여기서 맞으면 쪽팔릴거같냐 아플거같냐?”

설원이 주먹을 들자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놀리려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말이야 이건.”

“지금까진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는 걸 인정했네?”

설원이 안광이라도 쏘아낼 것처럼 날 바라본다. 살짝 식은땀이 흐른다. 이 새끼 은근이 날카롭다니까. 내 대답을 유도한건가?

그럼 반격이다.

“너 SNS에 태원대학교 교내 젠더폭력사례로 박제되고싶은거지? 쳐봐 자식아.”

“박헌영이랑 살다보니까 이상한 것만 배워처먹었네.... 괜히 보냈어....”

“보내다니, 너 무슨 날 가진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한다? 어? 워딩이 쓰레긴데? 난 주체적 개인이지 소유물이 아니거든?”

아 뭔가, 이거 재미있네.

“염병할, 상대를 말아야지.”

설원이 한숨을 푹 쉬며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한참 앞서 걸어간다.

“야! 좀 천천히 가라고!”

나는 털레털레 걷는 설원의 뒤를 바짝 따라간다. 다리가 짧아져서, 저 자식의 뒤를 쫓아가는 게 조금.

조금, 버겁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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