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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08화 (208/224)

208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뭐라 말하고 말을 맺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사준이 죽었다. 나 때문에.

유사준의 여자친구, 이윤희는 자살했다. 그것도 나 때문일까?

인과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윤희는 유사준의 자살이 자신 때문이라 여겼을 것이다. 이윤희도 유사준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 많이 괴로웠을 것임은 자명하다.

상처를 준다는 건, 상처를 입는다는 말과 같다. 온전히 상처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윤희 또한 그 이별을 통해 상처받았다.

그리고 유사준이 자살했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을 이윤희는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다. 신앙도 그녀를 슬픔에서 구원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는 지옥에 간다는데. 그런 선택을 내렸다 함은 무엇일까.

유사준의 자살에 의해 그녀가 느낀 죄책감은 결국 신앙마저 배반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무게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야.

유사준은 너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유상병을 죽인 건 나야. 나였어. 내가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면 유사준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이윤희도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유사준과 헤어지고 신앙을 이어나갈 용기는 있었지만, 유사준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는 없었다.

나 때문에 두 명이 죽었다.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하지?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나는 무슨 짓을 한거고, 내가 대체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불행의 구덩이에 던져버린거지? 유상병의 가족,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이윤희의 가족,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지울 수 없는 불행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불현듯.

예고 없이 뭔가 찾아온다.

누가 날 쳐다보지 않는 데 쳐다보는 것 같고, 누가 날 공격하지 않는데 공격할 것 같다.

손에 땀이 난다. 뭐지,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거야?

난데없이 발생한 불안감은 그 등장에 이유가 없듯,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피한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공포가 찾아온다.

도망쳐야 해. 이 시선에서, 이 공포에서 도망쳐야 해. 나는 비틀거리듯 일어나 천천히 카운터에 가서 준비된 메뉴를 집어든다. 손이 미끌미끌할 정도로 손바닥이 젖었다. 다한증 같은 건 없는데.

“저.... 괜찮으세요?”

내가 안색이 창백한 걸 보았는지 카운터의 직원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아, 아.... 네. 괘, 괜찮....”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몸을 돌렸고.

“아.... 오, 오...빠?”

돌아서기 무섭게 거기에는 서혜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치 불에라도 덴 것처럼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섰다. 뭐야, 언제부터 여기에 있던거지? 아무래도 방금 들어왔는지 주변에는 서혜인의 동기들이 저마다 알은체를 해온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데, 나를 향한 그 시선이 두렵다. 서혜인이 내게 다가온다.

“저.... 어디 아프세요?”

그 시선에는 나를 향한 걱정이 묻어나온다. 나는 서혜인이 다가오는 만큼, 물러서버린다. 왜 물러서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 그. 조금.”

나는 황급하게 대답한 뒤, 잰걸음으로 서혜인 무리를 지나쳐 맥도날드 바깥으로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왜 도망친거지?

가슴이 갑자기 뻐근해진다. 누가 내 위를 잡아 비틀어버리는 것처럼 속이 답답하다. 나는 빠르게 걷는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뛴다.

내 어느 부분이 망가져버렸다는 강한 확신이 든다.

하지만 어디가 망가진거지?

계속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나는 황급하게 돌아와,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이 가빴다.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온다. 내 몸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이윤희의 죽음을 전해듣고 나서 느낀 스트레스에 몸이 반응하기라도 한건가?

생각하지 말자. 더 생각하면 또 그 이상한 두려움이 날 엄습해올 것 같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안 돼.

“표정이 왜 그래?”

아침을 먹고 커피를 좀 마시니 기운을 차린 박헌영이 은근한 눈빛으로 내게 물어온다. 돌아오자마자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고, 한참 지난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으니 그 걱정은 당연하다.

방이란 거처지만, 지금 내게 이 방은 사는 곳이란 의미가 아니라 사방이 차폐되어있는 밀실로 보인다.

이 막힌 벽을 뚫고는 어떤 시선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 폐쇄된 공간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폐쇄공포증을 역으로 뒤집은 것 같은 기분이다.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아무도 날 위협하지 않는데 위협당하고 있고,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는데 날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 든 적 있어?”

내 말에 박헌영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리고는 무릎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내 곁에 앉는다. 평소라면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냐며 밀어내버렸겠지만, 지금 나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박헌영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꼭 잡는다.

“숨이 갑자기 잘 안 쉬어지거나 그랬어?”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뛴 건 사실이었다. 내 표정을 보더니 박헌영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진다.

“내가 알기로는 그거....”

“잠깐.”

하지만 나는 박헌영의 말을 무질러버린다.

“무슨 말을 할진 모르겠는데, 하지 마.”

“왜?”

“내가 겪는 게 어떤 종류로건 명명되어있는거라면, 분명히 거기에 묶여버릴거야.”

이게 어떤 종류의 질병이나 질환이라면, 그것을 지금 명명해버리는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단어에 묶여버릴거다. 그렇다면 아픈 나를 정당화하게 되고, 아픈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다.

나는 그런 걸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박헌영은 평소의 가벼운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애원하듯 말한다.

“이건 필요한거야. 아프다면 왜 아픈지는 알아야지. 아픈 게 이상한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아, 아는데....”

“이상한 거 아니야. 나쁜 것도 아니고, 아프면 아픈거야. 그러면 원인을 알게 되는거고, 그러면 해결하진 못한다 해도 내가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잖아. 그러니까....”

“안돼. 안돼.”

나는 고개를 한사코 젓는다.

“나는 아픔을 무기로 삼고 싶지 않아.”

때로, 병명은 면죄부가 된다.

나는 아프니까. 나는 괴로우니까.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나는 아파서 그런거니까. 그런 식으로 아픔을 무기로 삼는 자들을 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아픔을 무기로 삼은 또다른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환멸했다. 그리고 나 또한 내가 아프다고 인정해버리는 순간 남들에게 같은 이름의 폭력을 행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속으로는 환멸했으니, 나 자신을 환멸하지 않기 위해 내 이 상황에 딱지를 붙이지 않을거다.

나는 그런 걸 하면 절대로 안 되는 추한 인간이다.

잠깐 이상해졌던거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아픈 건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내 말에 박헌영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런 게 어디있는데!”

“나는 그래! 그러니까 뭐가 됐건 말하지 마! 듣고싶지도 않고 들어서 나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

격앙되어서 소리치자 박헌영이 살짝 물러난다.

지금도 나는 충분히 이상하다. 설원에게 기대고 박헌영에게 기댄다. 여기에서 어떤 딱지라도 또 하나 붙어버리면 지금보다 더한 배려를 받게될거고,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진짜 아픈거라면, 그 아픔을 내가 무기로 삼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나를 지금보다 더 배려하고 더 조심스럽게 다루려 할거다.

그런 걸 원하지 않아서, 나는 내 아픔에 이름을 붙이려는 박헌영의 말을 막아버렸다.

“무...슨.... 미친 소릴 하는거야....”

박헌영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제일 이상한거잖아....”

내 아픔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지금 한 말이야말로, 내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그 어떤 병명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픈 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내 아픔에 이름을 붙이고 내 아픔을 개념화시켜 나를 ‘아픈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픈 게 아니라는 걸 박헌영은 안다. 너희들의 배려가 더해질거란 사실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임을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박헌영은 아픔의 이름보다 내 그 말이 더 미친 소리라는 걸 안다.

“그래, 이깟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원래 이상한 상태니까 새삼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필요도 없어. 알아도 달라지는 게 없고, 알아봐야 지금보다 더 이상하다는 것만 깨닫게 될거면 모르는 게 낫잖아. 그러니까 말하지 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게....”

박헌영은 내가 횡설수설하는 게 견디기 힘든지 눈시울이 붉어진다. 조리 없는 말을 되는대로 뱉어내버렸다. 정리되지 않은 말을 토해내듯 해버렸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해버렸다.

“난,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

“괜찮아질거야. 그렇게 될거야.”

박헌영의 손을 꾹 움켜쥔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말하지 말라 한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으려면 그것을 말로 꺼내야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말로 꺼내고 인식하기 전까진, 그것이 존재한다 해도 실재하는 건 아니다. 특히 이 관계라는 것에선 그런 특징이 더더욱 강화된다.

말하지 않았으니, 아직 없는거다.

사실 박헌영의 명명 따위는 애초에 의미가 없다. 박헌영이 캐물어온 순간 나도 내가 겪는 게 뭔지 깨달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건 실재하는 아픔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가끔은 참인 그 명제를 믿을 셈이다. 거짓이라해도 믿을 셈이다.

나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박헌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다한, 불안감, 공포, 두려움, 그리고 호흡곤란.

이윤희의 죽음을 들으면서 내 안에 쌓이던 스트레스는 이제 내 몸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정말로, 걱정하지 마.”

내가 겪는 것은,

공황장애 초기증상이다.

[작품후기]작년에 좀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만.

그거 찾아보니까 공황장애라고 하더군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질환이 생겼다가 모르는 사이에 나았다고 생각하니 쫌 기묘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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