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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07화 (207/224)

207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다음 날 아침.

-타다닥, 타닥, 탁.

“으윽....”

나는 어쩐지 익숙한 소음과 함께 잠을 깬다. 머리가 깨질 것 같진 않지만 속이 부대낀다. 과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해장이라도 해야하나.

침대맡의 책상 앞에는 박헌영이 앉아있다. 금발을 질끈 동여맨 채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모습은 내가 방에 돌아왔을 때와 달라진 게 없다.

-타다닥. 타닥.

별로 안 자고 일어났나, 싶었는데 창밖은 이미 아침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박헌영은 그 자세 그대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야 너.... 안 잤어?”

“으어....”

대답 대신 기괴한 소릴 내뱉는 박헌영은 거의 탈진 직전의 모습이었다. 눈밑이 퀭하고 머리가 부스스한 게, 외모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영락없는 폐인의 모습이다.

“아니, 너 꽤 많이 쓰는 편 아니냐?”

박헌영은 우리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글을 쓴다. 그런 박헌영이 밤을 새야 할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많이 써야한다는거야?

“저번에 술먹고 연재후기에 십연참 한다고 써놨어. 써야돼.... 안 쓰면 살해당할거야....”

“십연참이면 뭐, 열 편 한 번에 올린다는 뭐 그런소린가?”

“어....”

“미친, 뭘 믿고 그런 약속을 해?”

“나도 몰라.... 하지만 뱉어진 이상 지켜져야만 해....”

-타닥.... 타다다닥.

박헌영은 혼이 나가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계속 타이핑을 하고 있다. 미소녀니 뭐니 좋아하던 것도 잠시, 박헌영은 별다를 것 없이 글쓰는 기계의 삶을 살고 있다.

이 녀석과 같이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우직한 성실함은 그 결과물의 가치를 막론하고 존중받아야만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글을 쓴다는 것에 있어서 우리 셋 중 가장 성실하며, 그것을 묵묵히 해내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안에서부터 존경심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그 어떤 날도 쉬지 않은 채 하루마다 하루의 일을 마친다. 그 사무적 경건함은 따라하고 싶을 정도였다. 한 문장조차 완성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는 그런 박헌영보다 무조건적으로 못난 인간이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쉼없이 많은 말들을 써내려갈 수 있을까.

생각을 비우고 써내려간다고 말하는데, 그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명제인 것처럼 여겨진다. 생각을 글로 쓰는건데, 생각을 비우면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거지?

하지만 박헌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고,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차이가 박헌영이라는 글쓰는 자를 만들고, 한 문장도 쓰지 못하는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는지.

궁금하지만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만 같다.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짠해질것 같다.

“밥은? 뭐 필요한 거 없어?”

“내 대신.... 잠을 자줘....”

“정상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커피라도 사다줘?”

“으응....”

수업시간까진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기에, 고생하는 박헌영을 위해 커피나 한 잔 사다주기로 했다.

“먹을 건?”

“맞아.... 아침. 아침 해 줄게.”

박헌영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의자에서 일어난다. 나는 요리를 못 해서 박헌영이 대개 아침을 해 주는 편이었다. 물론, 매일 먹는 건 아니긴 해도. 이 꼴이 되어서도 내게 아침밥을 차려주려 하는 꼴이 뭔가 고마우면서도 섬뜩하다.

“아니, 고맙긴 한데 지금 너는 칼도 불도 만지면 안 될 것 같거든? 그냥 글이나 써.”

“아니야. 미소녀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는것만큼 기쁜일이 어디 있다고.... 성스러운 의식을 거를 수는 없....”

“미친놈이, 헛소리 할 정신은 아직 있나보네. 닥치고 앉아있어.”

박헌영은 기어코 주방으로 가려고 하기에 억지로 끌고가 컴퓨터 앞에 앉혀놓았다.

“아침밥은 못 해줘도 사다줄 순 있으니까. 닥치고 기다려.”

“어....”

박헌영은 나를 멍하니 쳐다본다.

“그래, 미소녀가 나 하나뿐인 건 아니었지. 흐흐....”

안에서 무슨 논리가 완성되는지 추측 가능하다는 게 아주 불쾌하고 끔찍하다. 미소녀(박헌영)가 차려주는 아침밥도 좋지만, 미소녀(나)가 사다주는 아침밥도 괜찮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게 뻔하다.

아니, 설원의 생각을 이해하는 건 꽤나 기쁜 일인데 이 빤한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왜 이렇게 불쾌하지?

“부탁해.”

박헌영은 몸을 돌리더니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사람이 바뀌어도, 하는 짓은 어지간하면 바뀌지 않는건가. 박헌영이 금발의 미인이 되어버렸어도 하는 짓거릴 보면 뭔가 여전히 박헌영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학과내의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지 박헌영을 볼 때 사람들의 복잡다난한 시선을 보면 나도 동시에 착잡해진다.

미워하고 싶은데 미워할 수 없는 요물을 보는 눈빛들이다. 미워하고 싶다니, 애초에 그건 미워하지 않는단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니 무의미한 말이다.

이러건 저러건, 박헌영을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혐오스러워하는 사람은 적을거다.

-덜컥

박헌영의 방을 나서자, 이제 막 따스해지는 것 같지만 여전히 서늘한 아침공기가 내게 훅 끼쳐온다.

박헌영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이 적다면.

나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적을까.

생각해보지만, 선뜻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박헌영이 미움받는 이유와, 내가 미움받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박헌영에 대한 사람들의 미움이 혐오감에 가깝다면, 내가 받는 미움은 증오에 가깝기에.

혐오감은 혐오스럽지 않은 외양으로 무마될지도 모르지만, 증오라는 건 외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감정이니까.

아침으로 부담스러운 걸 먹어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맥모닝 두 세트를 시켜놓고 음료는 커피로 골랐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가만히 앉아있는다. 많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저 나름대로 아침을 해결하러 나온 사람들이 오간다.

나는 구석쪽 자리에 앉은 채 벽을 보고 있다.

비어있는 창가자리도 많은데 굳이, 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자리에 앉은 나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다.

그냥 앉은것일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도 모르던 내 어떤 반사적 행동의 의미를 알게 된다.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마주칠지도 몰라 나는 여기에 앉았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 아는체라도 할까 두려워 구석에 앉은거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저 아침거리를 사러 나왔을 뿐인데, 이래야만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 생겨버렸음을 자각한다.

물론 내가 과거에 잘못한 일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된 뒤에 다른 어떠한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나는 과거에 그랬듯 아무렇지 않게 다녀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한다.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지도 모르는 채,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까 두려워 이런 꼴로 앉아있는 것 자체가 비참해진다. 사람들이 날 공격해야만 할 어떤 당위가 존재하지도 않을텐데. 그런 생각은 생각만으로 그친다.

누가 날 공격하지도 않고, 나를 보고 수군거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피해망상이라는 건 실질적으로 발생하는 피해 때문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아니다.

피해가 일어나지 않아도, 폭력이 발생하지 않아도 사람을 미치게 하기에 피해망상이다.

-지이이잉....

전화가 온다. 모르는 번호였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 그, 그.... 그 혹시. 이선준 병장님 휴대폰.... 맞습니까?]

갑자기 몸이 굳어진다. 이건 익숙한 목소리다. 유사준 상병의 후임이자, 내 다음 분대장.

이기훈 상병의 목소리다.

“아.... 기훈이? 응, 맞아.”

[아 예, 이기훈입니다. 전역 축하드립니다 이병장님. 목소리가 그, 너무 변해서 잘못 건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전역했으니까 이제 굳이 그렇게 극존칭을 하진 않아도 되는데, 나는 잠시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에 쫄았던 내가 바보같아진다.

“휴가라도 나왔어?”

[예, 뭐 그렇습니다. 전역신고도 안 하셨으니까 잘 계시나 안부전화라도 할 겸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그래, 고마워.”

네가 기억하는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를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닌데 나는 과거의 내가 어딘가 먼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는 걸 안다.

[잘 지내십니까?]

“어 뭐. 그렇지.”

[집적거리는 놈들은 없습니까?]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네. 그런 게 있겠냐?”

[아니 뭐, 있을수도 있잖습니까. 어휴, 부대는 난리도 아닙니다 지금, 지휘관 헌병대에서 조사받고 부대 계속 뒤집어지고.... 다 죽을 맛입니다.]

유사준의 죽음으로 인해 부대 전체가 몸살을 앓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 덜컥 마음이 무거워진다. 유사준의 죽음은 상당부분 내가 원인일 것이다. 그런 나는 바깥으로 나왔고, 관련없는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내 고통에 함몰해 그걸 잊고 있었다. 사실 나는 세상에 하소연할 자격조차 없었다. 이기훈 상병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다.

[혹시, 그거 들으셨습니까?]

뭔가 두려운 예감이 들었다.

“무슨.... 얘기?”

[그, 유상병 여자친구 말입니다.]

“어?”

어쩐지,

무슨 말이 나올지 대답을 듣기 전에도 알 것 같다.

그건 거의 확신에 가깝다.

[자살했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 나왔고.

“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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