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술자리를 파하고, 설원은 나를 박헌영의 방 앞까지 데려다준다. 내가 말이 없자, 설원이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내 말없음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아 제발 좀.”
“아니, 나는 생각도 못 하냐?”
내가 눈을 부라리자 설원은 뜨끔한 표정이다.
나를 걱정해서 데려다주는 행위 자체에 내가 어떤 의미화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배웅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는가? 물론 그건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르고, 그저 배려라 받아들여도 되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술자리가 끝난 뒤 여성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행위를 어찌 생각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여성에게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란 말을 하는 부류는 아니었으되,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이 내 곁에 있다면 홀로 돌아가지 않도록 배웅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분은 알 리 없지만, 나는 그 행동을 해야만 하는 종류의 일로 취급했다.
그것의 잘잘못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을 그렇게 배웅했다. 그러니 설원이 내가 하던대로 나를 배웅해주는 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그렇게 사람들을 대했으니까.
이런 일종의 ‘보호행위’는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당할지도 모를 어떤 일에 대한 예방이다. 그러니 내가 원래는 남자였으니 괜찮다는 말 따위는 하는건 지금까지의 나를 배반하는 모순적 언동이다.
그러니 설원의 이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물론, 설원은 내가 그런 생각 한다는 사실을 빤히 안다는 듯 그만 좀 땅 파라며 면박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설원은 음울한 표정의 나를 보며 비웃는다.
“햄릿도 너에 비하면 양반일걸?”
땅 파듯이 고민 속으로 함몰하며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는 햄릿, 차라리 그 햄릿이 나보다 낫다는 소리는 분명히 욕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반박할 수 있다고.
“하, 멍청한 놈.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현실보다 뛰어난 인물상을 제시한다고 했지. 넌 지금 나한테 칭찬을 한거야. 네가 나를 그렇게나 고결한 사람이라 생각할지는 몰랐는데, 고맙다.”
나보다 인용력에서 현저하게 급이 낮은 설원은 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얘기, 좋아. 세상 어딜가도 할 수 없고 오직 이 공간과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이런 대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러면 나를 현학의 레토릭에 취한 놈으로 볼 뿐이니까. 앎을 공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건 축복이다. 그 앎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나누길 원하는 존재가 있는 것은 그보다 더한 축복이다.
설원도 지기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라서, 툭 쏘아붙인다.
“애초에 시학이라니, 기원전에 쓰인 저술이 아직도 인용된다는 건 발전이 없는 거 아냐?”
“또라이냐? 시학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고 해서 그 작자가 완성시킨거겠어? 후대의 연구까지 모두 포함한 총체가 시학이라고. 그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만의 것이라 부를 수는 없어. 계속해서 변화발전해오면서 우리가 지금 접하는 게 시학이고, 그건 계속 새로워지는거야. 오래되었으니 이젠 버려야 하는 게 아니라. 오래되었으니까 중요한거야.”
“뭔 개소리야 또?”
“야 이 등신아. 그건 이천삼백여년 묵은 텍스트가 아니라 이천삼백여년동안 변화발전을 겪어온 텍스트라고, 그런 게 중요하겠냐 안 중요하겠냐?”
오래되었으니 낡은 게 아니라 그것이 겪어온 시간은 곧 발전의 시간이다. 그건 예수보다 오래되었다. 설원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 유물론이냐....”
변화발전.
내가 하도 떠든 탓에 설원이 듣기만 해도 질색을 하는 게 유물론이다. 결국 시학을 발전적 텍스트라 보는 관점도 유물론적 시각에 의거한 셈이다. 다 오래된 건 마찬가지지.
설원은 더 실갱이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젓는다.
“가끔 너랑 얘기하다보면, 그냥 배고픈 돼지가 되는 게 낫다싶어. 머리아파.”
배고픈 소크라테스, 배부른 돼지. 설원은 자신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수 없으니 배고픈 돼지가 되고싶다 말한 것이다.
“갑자기 자학이냐.”
“어, 생각해보니까 좀 그러네.”
“뭐가?”
“배고픈 돼지는 진짜 존나 비참하잖아?”
“아....”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둘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많은 자들이 후자를 택할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전자를 택할 이들은 소크라테스에 가치를 두기에 배고픔을 함께 택할 것이다.
후자를 택하는 이들은 배부름에 가치를 두기에 돼지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배고픈 돼지가 있다면, 그것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고, 배부른 소크라테스도 소크라테스다.
다만, 그 명제에서 돼지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 배부름의 가치가 사람을 유혹하지 돼지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배고픔이 가진 페이소스적 가치만도 못한 존재의의가 돼지에게 부여된다.
그건 설원의 생각이다.
“난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데.”
“뭐가?”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은 대개, 이 명제를 받으면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고싶다 말한다. 물론 그것은 합리적이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라거나, 배고픈 돼지라는 건 애초에 있을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그것은 이 명제를 잘못 이해한거라 여긴다.
“배고프면 소크라테스가 되고, 배부르면 돼지가 되는거야.”
난 그걸 같은 존재에 대한 문장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일 것인가, 돼지일 것인가가 아니다.
배부름과 배고픔만을 선택할 수 있다. 배고프다면 존재는 소크라테스가 되고, 배부르다면 존재는 돼지가 된다. 그러니 나는 설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주장한다.
설원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 웃는다.
“재미있는 소린데, 좀 더 해봐. 말만 그럴듯하면 뭐해. 설명을 제대로 해야지.”
“공복은 포만을 갈망하지. 하지만 포만은 무엇을 갈망하지?”
“흐음.... 그러게.”
포만은 만족이다. 만족(滿足)은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 충족된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에 포만은 그 어떤 갈망도 포함하지 않는다. 만족의 관념에 완벽하게 합치하는 상황에 처해진다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갈망은 사람을 갈망의 객체에 닿기 위해 생각하게 만들지.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되는거야. 반면, 만족에 닿아버리면 더 이상 갈망할 것이 없기에 생각도 멈춰. 그러면 돼지가 되는거지. 결국 소크라테스와 돼지는 중요한 게 아냐. 배고픔이 소크라테스고, 배부름이 돼지인거지.”
어때, 그럴듯하냐라고 가슴을 쭉 펴며 빤히 바라보자 설원은 피식 웃는다.
“그래서 그건 누구 인용인데?”
“누구의 인용도 아니야.”
그러자 설원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놀란 시선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원의 눈은 어떤 모호한 감정이 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좋네. 그럼 배가 불러버린 소크라테스는 돼지가 된다 이건가. 그럼 모든 사람은 다 돼지가 되는거야?”
“너 바보냐 진짜?”
나는 설원의 말이 재미있어서 깔깔대며 웃는다. 내 웃음소리가 이상하지만, 이젠 점점 적응이 된다.
“포만은 아무것도 갈망이 없지만, 알아서 꺼져.”
만족은 무엇도 원하지 않는 상태지만, 결국 포만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라져간다. 영원한 포만이 존재하지 않듯, 영원한 만족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라는 건 계속, 돼지와 소크라테스를 오가며 사는거야.”
물론 내 논리에는 비약이 있고, 무리한 레토릭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의 과정의 설득력은 의문스럽다 하더라도, 하고픈 말만큼은 명확하다.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되며, 누구도 돼지가 된다. 다만 그 상태는 영원할 수 없다. 그 두 상태의 오감 속에서 사람은 절망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결국.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설원이 묻는다.
“그래서 지금 너랑 나는 돼지야? 소크라테스야?”
말은 그렇게 했다손 쳐도 나 자신을 소크라테스라 칭하는 건 결국 낯부끄러운 짓거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 나 둘 다 돼지라는 이름의 포만을 가지진 않았지.
“그건 모르겠고 새끼야.”
“억!”
나는 설원의 옆구리를 푹 찌른다.
“자꾸 너, 너 할래? 요즘 맞먹는다?”
예전에는 설원이 내게 너라하건 이 새끼야라고 하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설원은 훌쩍 물러나더니 웃는다.
“뭐야, 서열정리 하려면 한참 늦었거든.”
갑자기 왜 지랄이냐는 듯한 설원의 말에 나는 한숨을 푹 쉰다.
“인정했지 저번에?”
“뭘?”
“내가 마초였다는 거.”
기억난다는 듯 설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내가 마초적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것이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절대적인 구분을 내 안에 갖고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봐봐, 내가 그때 네가 나를 야라고 부르는 걸 그냥 받아들였던 건. 지금 생각해보자면 그마저도 존나게 마초적인거였어.”
“무슨소리야 대체?”
“이를테면, 네가 내게 그런 식으로 맞먹으려고 들어봐야 얼마든지 서열정리를 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네 그런 행동들을 넘어갔던거야.”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고, 그 과거의 나와 대화할 수 있다면? 내 지금 말에 과거의 나는 극렬하게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타자화되어버린 지금 나는 과거의 내 심리를 그 때의 내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맹수로 비교하자면 나는 설원이 내 무리에 들어온 짐승이라고 여겼다. 녀석이 내 앞에서 까불어도, 내게 아무리 깐족거려도 나는 그걸 받아들였다. 당시의 나는 내가 설원과 친밀하게 지내고 싶기에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내가 이해심이 많은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설원을 내 아래로 보고 있었다. 언제든 서열을 정리할 수 있으니 설원을 내버려뒀다.
“서열정리에 누구보다 열심인 것들이 누구일 것 같냐?”
“음....”
설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스스로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서열에.... 제일 민감한 놈이겠지.”
“그래, 제 서열이 불안한 놈들이 서열정리를 하는거야. 나는 옛날엔 나 자신이 서열정리라는 행위조차 불필요할 정도로 물리적, 정신적 우월성을 획득했다고 믿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이건 자기비하인가, 아니면 자기변호인가. 뭐라 이름붙여야할지 모를 말이다.
어찌되었건 나는 서열에서 단독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서열정리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든 제압하고 짓밟을 수 있는데 왜 서열에 민감하게 군단 말인가? 그건 내 마초적 자존심과 자존감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설원은 내 그런 말들을 보며 뭔가 어설픈 미소를 짓는다.
“그, 그래서 뭐.... 지금 이 얘길 한다는 건....”
“어떤 속성이라는 건 내가 이렇게 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아.”
남성성이 사라지고 여성성이 발생하는 게 아니다. 결국 어떤 성별의 특정성이란 본질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환경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남성성은 무엇이고 여성성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규정하고 정의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내 남성성이 편견이라한들, 그 편견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어떤 편견은 여전히 내 안에 있고, 그것에 남성성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면?
내 어떤 남성성은 사라지지만, 어떤 남성성은 더더욱 강해져버린다.
“그러니까, 지금 서열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껴. 내 서열이 불안해서.”
결국 내 말은 자기비하의 논지로 전개된다. 과거라면 설원이 내게 뭐라 말하든 상관없었지만 이젠 상관없지 않아졌다.
서열정리를 할 필요가 없던 나는, 서열정리를 하려고 한다. 그건 내가 약해졌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고 내 서열에 불안을 느낀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추락했음을 인정하는 비루한 말이다.
이것은 편견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주장할 수밖에 없다. 설원이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미, 미친.... 그, 그래서 어쩌라고.... 맞짱이라도 뜨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소리냐는 듯 설원의 입술이 달달 떨린다.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칼이라도 쥐고 있지 않은 한 설원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런 건 언어도단이다. 나는 서열정리를 하고픈거지 살인을 하고픈 게 아니니까.
물론, 설원의 착각일 뿐이다.
“뭐래 이 야만적인 새끼가. 내가 너랑 맞짱을 왜 떠? 날 팰거냐? 어?”
내가 눈을 부라리자 설원은 버럭 소리친다.
“그, 그럼 뭐!”
“형이라고 왜 안 부르는데?”
“그, 그야.... 사람들 시선도 있고.... 뭐랄까. 그렇게 부르면 불편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이 자식이 왜 나를 너라고 부르는지정돈 당연히 나도 안다. 형이라는 발음을 하려다가 다물어버리는 걸 몇 번이나 봤다.
그건 본인의 부끄러움도 있고, 내가 느낄 부끄러움에 대한 걱정도 있다. 형이란 소릴 듣는 여자라니, 그거 대체 언제적 운동권이냐?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말을 할 때마다 나와 설원을 이상하게 생각할거다.
거기에서 TS바이러스라는 결론에 닿아봐야. 나를 향한 이상한 시선이 추가될 것이다.
그런 건 당연히 바라지 않는다.
어떤 남성성은 강화된다.
어떤 여성성은 발생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이 과연 존재한다 말해도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어찌 칭할지 주저하고 고민하는 설원의 표정을 보는 것도 짜증나고, 그 말을 들으며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는 나도 짜증난다.
서로를 부르는 데에는 불러야 한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것에 사고를 소모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하나다.
“됐고. 씨발.”
이 녀석이 나를 뭐라 부르건, 그런 것이 나를 규정하진 않는다.
“그냥 누나라고 불러. 짜증나니까.”
취해서 다행이다.
술 덕분에, 내일 후회하게 될지라도 해야만 하는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설원은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누나라고 불러라는 한 마디 하려고 이 긴 얘길 한거야?”
“그래! 뭐 잘못됐냐! 서열정리 받아들일거야 말거야?”
술에 취해도 결국 중언부언에 헛소릴 늘어놓은 것도 사실이다. 설원은 한숨을 푹 쉰다.
“진짜 존나 복잡하네.”
너나 나나, 설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 뒤 내 어깨를 툭 치며 앞서 걷는다.
“가자.”
“대답부터....”
“누나.”
“.......”
내 모든 말을 그 말 한 마디로 묶어버리곤, 설원은 앞서 걷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설원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궁금하진 않다. 지금 나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설원의 표정이 궁금할리가 없다.
원하는대로 되었다.
원하는대로, 정리가 되긴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서열은 아닌 것 같았다.
[작품후기]아, 돼지의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