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205화 (205/224)

205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고민이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만을 포함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이 순간, 별별 생각들이 다 나를 찾아온다.

왜 써지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은 왜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간다. 글은 왜 쓰여지며, 글을 쓰는 자들은 왜 발생하는가.

그리고 결국 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간다.

서사는 무엇이고, 스토리는 무엇이고, 플롯은 무엇이고, 문장은 무엇이고, 결국 그 모든 것과 다른 구성요소를 합한 소설이란 것은 무엇이지?

“또 별 개지랄같은 생각 하고 있지? 닥치고 처먹기나 해.”

“자꾸 날 읽지 말라고.”

내가 노려보자 설원은 어깨를 으쓱한다.

“염병, 이건 읽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보인다고 말하는거야. 굳이 읽을 필요도 없어.”

“내 얼굴에 내 고민이 써있기라도 하냐?”

“아주 적확한 언어로 명시되어있지. 받아쓰기라도 해볼까?”

“꺼져.”

설원이 말장난을 하며 내 잔에 소주를 따른다. 어이가 없어져서 웃음이 나온다.

술을 사준다더니 고작 오뎅탕이라, 물론 감사해 마지않는다만.

“박헌영은?”

“마감 밀려서 써야된다나봐.”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오늘의 술자리는 나와 설원뿐이다. 나와는 달리 녀석은 계약으로 묶여있으니까 쓰지 않으면 법적 문제가 발발한다. 마감이 곧 영감이라는 수많은 자들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 나는 이따금 궁금하다.

“나도 쓰지 않으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라면, 안 써지는 글도 써지려나?”

과연, 이 모든 고민들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데드라인이라는 말 앞에서 사라지고 내 손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처해보지 않은 상황을 어찌 추측한다한들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은 모르는 일이다.

“글쎄, 되고 아니고를 떠나서 납득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겠지.”

“납득이라니?”

설원과 나는 한 잔을 비운다. 술이란 이상하지, 차가운데 어째서 몸을 데우는가? 차가운데 어째서 가슴을 뜨겁게 만들지?

잡념만 가득하다.

설원은 비운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내게 술을 따른다.

“쓰여진 글과 쓴 글. 둘 중 뭘 원하는지 굳이 고민이 필요해?”

그런 말이었나.

데드라인에 밀려 ‘쓰여진’ 피동적 텍스트.

스스로 ‘쓴’ 능동적 텍스트.

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쓰여진 글을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 역시 그 또한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분명히 후자를 원할 것이란 것 정도는 안다.

물론, 그건 최선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당장은 쓰여진 글이라도 누가 쓰게 해준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야.”

텍스트의 진정성에 관한 논쟁 따위는 아무 의미 없다. 지금은 그저 안 쓰인다. 써지지도 않고 쓰여지지도 않는데 대체 그 두 구분이 무슨 소용인가!

“결국 누가 뒤에서 쫓아오면 글이 써질지 써지지 않을지 궁금한거야?”

“뭐, 그냥 그렇다는거지.”

“데드라인이라면 합평날짜가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내 소설을 발표하는 날짜가 잡혀있다한들 그것은 절대적인 건 아니다. 펑크내는 녀석들이야 무수히 많고, 나도 그 중 하나가 된다해도 성적에는 치명적일지언정 그건 어떤 굉장한 데드라인이 되진 않는다.

설원은 내 얼굴을 보곤 한숨을 쉰다. 마감이 어쩌니 하는 얘기를 진지하게 할 만큼 정말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이 기분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그래.

“누가 내 머릿속에 상자를 넣었어.”

“좋네, 네가 원하는 건 거기에 있겠지.”

내가 무슨 얘길 하는지 바로 알아듣는 걸 보면, 우리가 오래 만나긴 했다.

그나저나 점점, 이 녀석은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들어서 좋을 게 없으니 이해는 한다만.

변해간다. 모든 것이.

슬프진 않지만 안타깝다.

“그런데, 나는 어린왕자가 아니라서 상자가 처넣어졌으면 뚜껑을 따야한다고.”

신경질적으로 소주를 들이킨다. 뭔가가 던져지면 알아야 한다. 나는 그 안을 상상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종류의 인간은 결코 아니니까.

“그 뚜껑이 안 따진다?”

“그래.”

그걸 열어야 뭔가를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는데, 도대체 그 상자는 열리지도 않고 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그 상자의 외부에 내팽개쳐진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누가 머릿속에 상자를 넣었다는 표현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열 수 없는 거대한 상자가 되어버렸다.

“내 정체가 뭔지 모르겠어.”

이상한 말이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그냥 되먹지 못한 하소연이나 투덜거림 이상이 될 수 없어. 그래서 못 쓰겠어.”

“그러면 왜 안 되는데? 그냥 투덜거려. 그냥 하소연해. 그러면 되잖아.”

“알아,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쓰는 자는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말만을 해야 하는가? 물론 그건 아니다. 내가 납득하지 않아도 그것은 세상에 던져버리는 것으로 각자에게서 완성된다. 문학이란 때로 그러하다.

세상은 내 글을 의도한대로 읽을지도 모르지만, 의도한대로 읽지 않는 자들도 있다. 글이 완성되는 순간은 내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아니라, 그것이 읽혀지는 순간이다.

그것이 읽혀지고, 읽는 자의 안에서 의미화되는 순간에 글은 완성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의도로 썼건 글은 독자들에게 다르게 읽히고, 그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뿐이다.

음울하게, 오뎅을 씹는다.

“너는 그럴 수 있겠지.”

설원은 그렇게 소설을 쓴다. 자신의 안에서 토해지는 말들을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던져버리고, 모호함 속에서 사람들이 의미를 찾아내라고 말한다. 문학론 속에서 설원의 소설은 ‘물론 그럴 수 있는 것, 때로는 그래야만 하는 것.’의 범주 안에 속해있다.

하지만, 독자에게 있어 그것은 아주 불친절한 글쓰기다. 나는 말하겠다. 너는 알아서 이해해라. 설원의 태도는 언제나 그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소설을 쓸테지.

“나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알지, 다만 나는 그걸 추구하지 않아.”

할 수 있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다. 설원은 퍼즐을 던지고 네 멋대로 짜맞춰보라고 말하는 소설을 쓴다. 모양이 나와도 될테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건 설원의 글쓰기다.

나는 퍼즐이 아니라 완성된 그림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아라, 이 그림은 의도되었다고 말한다. 이 그림에는 너희들이 의미화할 수 있는 이러이러한 미장센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건 나의 글쓰기다.

나의 글이 ‘짜여진 것’을 제시한다면, 설원은 ‘짜여질 것’을 제시한다.

“또 긴 논쟁을 시작하려고?”

설원이 질린다는 듯 말하자 나는 고개를 젓는다.

“이젠 그런 데에 쓸 기력 없어.”

“하긴, 웃기는 일이지.”

설원과 내가 가진 글에 대한 관점차이는 근대문학론에 관한 오랜 논쟁과 맥을 같이한다.

그렇기에 설원과 내 소설은 사실 양립한다. 한 때는 설원과 문학관이 잘못되었느니 그건 문제적이라느니 하면서 밤새워 논쟁을 벌인 적도 심심찮았다. 나는 설원에게 그건 소설이 아니라 말했고, 설원은 네 소설이야말로 보수의 상징이자 구태의 답습이라고 말했다.

주먹다짐을 할 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게 신기할만큼, 우리는 말로 다투는 걸 너무 잘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좋아했던 것 같아. 그 다툼 자체를 설원도 나도 좋아했다. 다투기 위해 다퉜다. 애들도 아니고.

“우리 둘 다 그 두 사조의 대표도 일원도 아니잖아?”

습작생이 예술을 말할 권리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 수많은 논쟁의 날들을 지나치고 지나쳐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서로의 소설관을 부딪히면서,

그렇기에 설원의 그 말은 자조다. 우리들은 작가가 아니면서 먼저 예술가가 되려 했다. 그렇기에 예술가적 자의식만 가진 습작생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자학적 실체를 갖고 있다.

설원은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죽을거면 너 혼자 죽어. 왜 나한테까지 확산시키냐?”

거기에 나까지 비웃었다.

“흐흐, 글을 쓰지 못하는 습작생과 괴설만 쓰는 습작생. 살 가치가 없어.”

설원이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 표정에 깃든 자조에서 나는 뭔가 서늘한 기분이 든다.

뭔가 트라우마 스위치를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설원이 자신의 소설을 괴설이라 말할만한 트라우마라면....

“...너 아직도 한정운한테 들은 말 때문에 그러냐?”

“...씨발! 그래!”

설원이 소주를 훅 들이킨다. 나만 영 상태가 안좋은가 했더니 결국 설원도 상태가 안 좋았던 건 매한가지다. 시간이 좀 지났는데, 이젠 잊어버릴 때 되지 않았나?

아, 물론 의미있는 한정운의 합평을 잊어버렸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네. 하지만 곱씹을수록 자괴감만 늘어날걸 생각하면, 되새김질하는것도 못 할 짓인 건 같다.

-쪼르륵

설원이 제 잔에 소주를 따르고, 내 잔에도 따른다. 설원이 의미불명의 웃음을 질질 흘린다.

“흐흐흐.... 너하고 하던 논쟁은 차라리 나았어. 그 때 까이는 건 내 소설이었지만 사실상 사조의 대립이었으니까. 아니, 비난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저놈 리얼리스트다! 하면 대부분의 비난은 쿨하게 무시할 수 있었으니까.”

“미친놈아.... 그건 쿨한 게 아니라 정신승리잖아!”

이 미친놈이 내가 그래도 열심히 생각해서 한 말을 그런 식으로 퉁 치고 정신승리해버렸다고? 이거 충격인데.

내가 부들부들 떨건 말건 설원은 고개를 숙인 채 마음이 꺾인 노새마냥 중얼거린다.

“인수분해....... 당했다고....”

그렇게나 가혹한 경험이었던거냐. 설원은 몸을 부르르 떤다.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 한정운뿐만 아니라 바르트의 멱을 따고 싶어졌다고.”

“...한정운은 그렇다 쳐도 죽은 인간은 왜 또 죽이려고?”

“내 앞에 롤랑 바르트의 화신이 있었고 그게 한정운이었다니까!”

“...애초에 너 그 양반 책 안 읽었잖아.”

“그래! 골치아픈 저서는 안 읽었지만 롤랑 바르트가 부활했다면 그게 한정운일거야! 확신해!”

“뭐라는거야 미친놈아....”

아무래도 롤랑 바르트를 인용한 말들로 분쇄당한 모양이지.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확실히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고, 그만큼 자주 인용되는 사람이니까.

“렉시아(Lexia)니 뭐니 하면서 내 소설을 분해해버렸다니까? 그건, 폭력이야 단언할 수 있어.”

아니, 진짜 맞은 놈도 너처럼 화내진 않을걸. 설원은 의기소침해져선 술을 또 한 잔 마신다. 너무 빨리 마시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한정운이 설원의 소설을 좋다고 했던 건 진짠가보다. 렉시아라니, 그런 수준에서의 합평을 해줬다고?

“사람을 패려면 최소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패야할 거 아냐....”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네 무지를 부끄러워해야하는 부분 아니냐. 렉시아는 의미단위란 소리야. 네가 사용하는 의미단위들이 형편없다고 지적해준거면 차라리 고마워해야지. 네가 가장 잘 하고픈 부분에서 네가 어떻게 해야 더 잘 할 수 있는지 생각해준거잖아? 그거 배려야.”

뭔가 재미있어져서 설원을 놀린다. 요새들어 너 너무 의기양양해있었지, 이렇게 의기소침해져있는 꼴을 보니 이러면 안 되는데.

좀, 신나.

“배려도 가끔은 폭력이라고!”

“하, 그렇게 소설 봐 주는 놈 우리과에 없거든? 그게 폭력이라면 감사하는 마음에 울면서 맞았어야지.”

내가 빈정거리자 설원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린다.

“너까지 이러기냐....”

브루투스에게 찔린 시저의 표정으로 설원이 날 바라본다. 하지만 놀리는 건 놀리는거고, 하고픈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친구를 위하는 마음인 동시에 네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폄훼하길 바라지 않는 마음이지 새끼야.”

확실히 설원이 한정운을 그렇게나 증오하고 있다면 그건 잘못된거다. 설령 한정운이 설원을 싫어해서 그렇게 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누가 날 싫어해서 내 소설을 그런 식으로 봐준다면 고맙다고 말할 것 같은데?

“아니, 그건 맞는데 말이지....”

설원은 내가 제 편을 들어주지 않자 의기소침해져선 시무룩해졌다. 그러고보니 내 고민 때문에 술 먹다가 갑자기 설원에게 화살이 돌아가버렸다.

이상하긴 한데, 우습네. 그래, 하지만 결과적으로 설원이 이러는 꼴을 보니 재미있어져서, 해결은 안 됐어도 기분이 풀린 건 사실이다.

그리고, 괜히 놀려댄 것만은 아니다.

“모르는 말때문에 기분이 개같았으면, 해결책은 뭐지?”

“굳이 그렇게 물어볼거냐? 공부하란 얘기잖아. 애 취급하냐?”

“애 맞잖아.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린애.”

내가 실실 웃자 설원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술잔을 내민다. 어린애들에겐 많은 게 필요하지.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건, 빤하고.

“공부할래?”

모르는 말, 이해되지 않는 말이 있다면 그걸 알면 된다. 나는 그걸 혼자 했지만, 설원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도와줄테니까.”

내가 있으니까.

설원은 내 말에 잠깐 멍해진 것 같더니, 한숨을 푹 쉬며 잔을 내민다.

-챙

“결국 그 얘기냐....”

“그룹으로 하자는것도 아니고 일대일로 하자고. 어차피 나도 글 써야 되는 건 마찬가지니까. 넌 공부하고 난 글쓰고.”

“아니, 저도 글 써야 되거든요? 염병할?”

“그건 네 사정이고.”

설원에게 공부 좀 하란 얘길 예전엔 지긋지긋하게 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도 공부에 회의적이 되면서 설원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설원이 그걸 하고싶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설원은 한 잔 마시며 한숨을 쉰다.

“나 사학년이야.... 이 나이에 스터디를 하라고?”

토익이나 취업에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술 및 철학에 관한 스터디라니, 솔직히 언어도단같은 짓거리긴 하지 이 시기엔.

“네가 스스로의 무지에 만족한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

“......썅, 한정운하고는 다른 의미로 말을 좆같이 한다니까.”

설원의 말에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팔짱을 낀다. 오, 지금 꽤 멋진 웃음 짓고 있을 것 같은데.

“너랑 친하다는 점에서 더 악질 아니냐?”

“본인 입으로 그런 말 할래?”

설원은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듯 손을 부들부들 떤다.

“너 솔직히 이런 기회 쉽게 오겠냐. 나 같은 대지성인이 개인과외를 해주겠다고 하는데. 수많은 이들에겐 절대 주어지지 않는 기회라고.”

물론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중엔 나 자신도 포함된다. 혼자 공부할때 진짜 얼마나 힘들었는데. 물론 나 자신을 대지성인이라 표현한 건 그냥 장난이고.

“이런 순간, 앞으로는 안 와.”

그건 나라는 사람에게 배울 기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대학생활은 끝을 앞두고 있다. 공부할 시간 같은 건 앞으로 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공부할 수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일거고, 마지막이어야만 한다. 졸업 이후의 공부라는 건, 선배들의 예로 봐선 대개 비참하니까.

“마지막이야. 이게.”

내 말에 설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술을 한 잔 다시 마신다.

“알면 뭐가 달라져?”

“나는 달라졌어.”

그게 좋은 달라짐인지 나쁜 달라짐인지는 확실히 정의하기 어렵다. 나는 그 공부들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그건 아닌 것만 같다. 견고하다 믿어왔던 내 이성은 이렇듯, 여자가 되면서 무너져버리는 하잘것없는 모래성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달라져서 이걸 해야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나는 달라졌다. 많은 것을 배우려 들면서 달라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긍정하는 이유가 사람을 변하게 해서가 아니다.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여자가 되었고, 내가 쌓은 무력은 허망하게 사라져버렸고, 나는 세상이 어느 정도 두려워져버렸다.

“이렇게 된 내게서 달라지지 않은 유일한 것이라서, 하자고 하는거야.”

그건 내가 쌓은 것중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글을 쓸 수 없지만, 내가 쌓은 지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오직 그것만이 변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며,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주체성과 자존감과는 달리, 지성은 독존한다. 나는 주체성이 흔들리고 자존감이 추락했으나, 지성만은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내가 쌓은 그 모양 그대로,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내 안에 있다.

그것은 내 정체성과 본질에 구애받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그것에 위로받지도 못한다. 그것이 날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규명해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지성의 실존과 불변은, 그것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지탱한다.

설원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말하면 안 한다고 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지.”

“악질이네 진짜.”

내가 내 존재까지 걸고 공부하라고 말하는데, 그걸 어찌 거절하겠냐는 듯. 설원이 슬프게 웃는다.

그래, 이렇게 말하면 네가 한다고 말할거라 생각했지.

너는 나를 잘 아니까,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았다.

나는 너를 잘 알아서, 네가 거절하지 않을거란 걸 알았다.

나는 나와 설원의 서로에 대한 앎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앎이 우리를 슬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느낀다.

나는 과연, 네 공부만을 위해서 함께 공부하자는 말을 한 것인가.

그것은 사실인가?

변치않는 지성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것이 나를 지탱해준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지탱이란 결국 의존 혹은 집착이라 명명해도 될 터다.

내 지성은 내 관념을 지탱하며, 고로 나는 내 지성에 집착한다.

관념이 내 마음을 지탱한다면.

현실에서 나를 지탱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나를 지탱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의존과 집착이란 이름표를 붙일 수 있겠지.

과연, 나는 설원이 공부하길 원하는가. 그것뿐인가?

자문해보고,

‘물론 사실이다’

라는 대답이 내 안에서 즉시 발생하지만.

반사적으로 발생한 대답이 너무 빨랐다.

자문에 이은 자답의 속도 때문에, 나는 그것이 반사적이라는 걸 안다. 반사적으로 만들어낸 대답은 대답이 아니다.

몸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척수반사를 하듯, 마음 또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척수반사적 사고라는 걸 하는가. 이 추론은 사실인가. 아마 사실일거라고, 이번에는 사고를 통한 대답을 얻는다.

마음을 지키기 위한 대답이 즉각 발생해버렸다면, 그건 대답이 아니다.

핑계일 뿐.

다만 무엇에 핑계를 대려 함인지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작품후기]저놈 리얼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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