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전역증을 받았다. 전역신고를 하기 위해 형식상으로나마 가야했고, 그 과정만 부리나케 마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복귀 이틀 전,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내 전역증을 들고왔다.
국정원에서 나왔다는 자기소개에 반사적으로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렸지만, 곧 한정운의 말과 박헌영의 말을 떠올리니 조금이나마 입을 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 어떤 악의 흑막도 아니고, 그저 사무에 조금 지쳐보이는 배 나온 아저씨일 뿐이었다.
진원물산 과장 김현식이라 쓰여있는 명함을 받기 무섭게, 나는 대답부터 했다.
“안 받습니다.”
“저기,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무슨 말 하실지 이미 알고 있어요. 안 받습니다.”
신변보호 프로그램을 요청할 생각 같은 건 없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내게 도움을 주러 온 사람이라한들, 나는 그렇다 해서 이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미 내가 했던 모든 것에서 떠나왔지만, 그건 그 집단에 대한 환멸이었을 뿐 내 사고에 대한 환멸을 한 게 아니다.
그렇기에 오래 마주하고픈 대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주거지가 확실치 않을 게 분명한 나를 이렇듯 제대로 찾아왔다는 게 소름끼쳤다. 나는 박헌영의 집에 있는 것도 아니라, 지금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조차 거부하는 내 단호한 태도에 그는 일은 결국 일이라며, 지정된 이메일로 증명사진을 보내라는 말, 무슨 일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한 뒤 돌아갔다. 새 신분증이 필요하니 그의 말은 맞았다.
터덜터덜 돌아가는 검은 양복 입은 중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쩐지 모든 게 우스워졌다.
그 돌아가는 모습에선, 내가 그렇게나 증오했던 폭력적 실체의 어떤 향기도 맡을 수 없었기에.
“하하....”
물론 이건 눈앞에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국가권력은 때로 폭력적인만큼이나, 때로는 무던하니까. 나는 무던한 국가권력을 마주한 것뿐이다.
다만 그것이 눈앞에서 내 말 몇 마디에 몸을 돌리는 것이 우스워서.
세상에 악마적 인간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론 그들을 악마라 생각던 나 자신을 깨닫는다. 악마가 있다한들 스스로를 천사 혹은 중립 혹은 피해자라 여기는 이들만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도.
그 뒷모습의 처연한 인간성 속에서 나는 내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렇기에, 결국 내 자신이 너무 우스워져서.
“하하하....”
그저 열없이 웃음만 계속 흘렸다.
전역신고라는 인생의 한 고비가 허무하게 건너가버린 것에 안도하면서도, 나는 그 일종의 시험이자 굴곡을 넘기지 못한 사실 자체가 묘하게 찝찝하게 느껴졌다.
굴곡진 것이 인생이라면, 굴곡 그 자체 또한 인생을 함의할 수 있지는 않을까?
굴곡은 그것을 넘는 경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굴곡은 그 자체만으로도 실체적 의미를 갖는다. 사람은 마음 속으로 그 굴곡을 타넘는 나를 예감하고, 상상하고, 괴로움에 대비한다. 그렇기에 그 굴곡은 넘어서는 순간 무의미해지는 허상이라한들, 굴곡에 아직 닿지 않았다 해도 사람은 그 굴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달라진다.
수많은 미필자들이 아직 입대하지 않았음에도 군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듯, 또한 입대하지 않았음에도 군 때문에 인생을 바꿔버리듯. 굴곡은 거기에 실존하는 것만으로도 삶에 영향을 끼친다.
전역신고라는 평이하지만 색다를 게 분명하며, 부담스러웠던 하나의 야트막한 굴곡이 사라져버렸기에 나는 그간 그 상황을 예비하며 준비했던 모든 시간이 무의미해졌다.
후련하면서, 동시에 허탈한.
내 군생활은 무엇으로 내게 남았는지에 대해 상상하면, 그저 막연한 상실감뿐이다. 전역증에 찍힌 내 옛 모습은 이상하다.
“.......”
내 얼굴이다. 훈련병 시절 아무 벽에나 세워놓고 대충 찍은 까까머리의 나. 어림잡아 20개월 전쯤의 내 모습. 현역 때에도 낯설었던 훈련병 시절 모습이니 낯선 건 당연하다. 내가 변해서 낯선 게 아니라, 오래 전의 모습이라 낯선거다.
하지만,
너무, 너무.
너무 낯설어.
이렇게까지 낯설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멍하니, 멍하니 뚫어지게 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본다.
너는 누구냐.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려본다. 너는 누구냐, 대체 누구냐, 대체 누구였냐. 사실, 그 말은 잘못되었다. 나 자신을 타자화하는 건 예술적으로는 가능할지라도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니까.
너는 누구냐는 물음은 나 자신을 기만하는 말이다.
나는 누구지?
라고 해야 한다.
나는 누구냐.
물영의 이원론도 아닌 육(肉)만의 이원론에 빠져버린 이 모순의 실존은 무어라 이름붙여야하지?
예술론은 현실과 자체의 본질 사이에서 길을 헤매이고,
사상은 미래와 현실과 과거를 넘나들며 실질의 세계에서 답을 궁구하고,
철학은 존재와 본질과 근원과 실존에 대해서 말하지만.
어떤 예술론도, 어떤 사상도, 어떤 철학도.
나를 규정하는 말과 이론을 만들어주지 않았어. 그 셋 모두, 같은 개념을 공유하니까.
인간은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가 아닌 사실을 공유하니까.
두 번 태어나버린 존재는 대체 어떻게 규정해야만 하지?
안타깝게도, 위대한 지성들의 시대에 이 질병은 존재치 않았다.
지금 존재할 위대한 지성들은, 저들에게 주어진 답을 찾아헤매일지언정 이 소수라 부르기도 민망한 소수의 실존과 존재에 대해 고민해주지 않겠지.
애석하게도, 나는 어떤 사상과 어떤 철학과 어떤 예술을 받아들일 수는 있을지언정, 새로운 존재론을 떠올릴만큼의 지성은 갖고있지 않다. 내게 주어진 건 이해력뿐이라는 처참한 사실을 깨닫기에, 더더욱 비참해진다.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건 나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다.
존재에 대한 고민 따위는 한 푼 짜리 위로를 낳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다.
억만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막막한 고민만 던져주기에, 차라리 본질과 존재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은 해악에 가깝다.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나는 나다. 나는 나야. 관념의 바다에 나를 던져야 할 때가 아니야. 아무것도 건질 수 없는 바다에 빠져봐야 심연으로 가라앉을 뿐이니까.
나는 나다.
싸구려 위로로 자위하자.
하지만 그것이 싸구려 위로라고 자각한 이상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될 수 없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심지어 싸구려라니.
위로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위대한 고민이라도 하는 표정인데?”
“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갤 치켜드니 거기에는 설원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고민을 하는 건 맞다. 위대하다라, 고민에 경중을 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만약 내 고민이 위대하다면 모든 고민은 위대한거다. 저녁메뉴에 대한 고민이 더 위대하겠지. 그건 최소한 만족감이라는 효용이라도 안겨줄테니.
이건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자학일 뿐이란 사실을 잘 안다.
“위대하긴 무슨.”
어쩐지 그렇게 말해버리니 마음이 묘하게 가벼워져선, 한숨을 푹 쉬어버린다.
그 한숨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고민은 아니지만, 그 한숨에 실어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처럼 내쉰다.
“그냥, 쓸데없는 생각이지.”
“그거야말로 다분히 우리에게 어울리는 일이잖아.”
쓸데없는 고민.
한 비평가의 말에 의하면, 글이란 쓸데가 참 없다지.
그렇다면 글을 쓰는 행위도 쓸데가 없는거고,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행위도 쓸데가 없는거다.
그러니 우리는 쓸데없는 짓거리에 인생을 거는 얼간이들이다. 아직 작가조차 아니니 설원과 나의 무용함이란 말할것도 없다.
무용한 존재들.
너와 나.
“잘 써져?”
설원이 앞에 앉으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젓는다.
“한 문장도 못 썼어.”
쓸데없는 것들에겐 쓸데없는 것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게 있다. 문학이 그러하듯, 존재 또한 그러하겠지.
“뭐, 그럴 수밖에.”
설원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비웃는 게 아니다. 이해하니까 하는 말이다.
쓸데없는 우리들의 유일한 쓸모는 하나뿐이다.
쓸데없는 서로를 위로하는 것.
“그럼 그냥 술이나 처먹을까?”
“미친놈아냐 이거?”
“내가 산다.”
그 말에 나는 곧장 노트북을 덮는다.
“안 일어나고 뭐하냐?”
"태세변환하는거보게?"
위로.
그것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슬프지만.
결국 그것만이라도 주어졌다는 사실에 서럽게 감사할 뿐이다.
쓸데없는 걸 하는 나다.
하지만 글이 쓸데없다 말한 그처럼, 나는 진정한 가치는 무가치에서 발생한다고 믿는다.
“사실, 오늘 전역증 받았다.”
“그럼 축하주도 퉁치고 좋네!”
그러니, 우리의 쓸데없는 위로를 위해서.
오늘은 건배하기로 한다.
[작품후기]오랜만이네요.
연재가 안 되었던 건 기존 유료연재도 있긴 했지만 거대한 난관에 봉착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작중 이선준은 철학은 물론 각종 이론과 사상에 통달한 녀석인데, 아주아주 애석하게도 작가인 저는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쓰다보니 그냥 이선준이 본편의 설원과 다를 게 없어지더군요.
제가 일단 뭘 좀 알아야 이선준의 언어를 구성해낼 수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학교 다니는 김에 공부나 좀 열심히 하는 와중에 이선준이라는 캐릭터도 차차 완성해나갈 예정입니다. 연재는 그리 자주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공부도 해야 하니까요.
필자가 멍청하니 손발하고 머리가 같이 고생합니다. 공부 열심히 할걸 그랬어요.
작고한 문예비평가 김현 선생의 비평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문학은 도무지 써먹을데가 없다. 그런데, 문학은 그 쓸데가 없다는 사실을 써먹고 있다.'라는 논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