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203화 (203/224)

203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결국 소란은 뒤로하고, 세 명이 마주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한 줄도 써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나는 내 안의 감정들을 정리해내지 못했기에, 그 어떤 말도 제대로 할 수 있을거란 확신이 없었다.

확신 없는 문장을 쓰지 못하는 나는 여전하기에, 아마 글에 손을 대는 건 아주 나중의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의 나는 마치 이제 갓 태어나버려서, 아직 말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말을 배우기 전까진 문장을 쓸 수 없고, 문장을 배우기 전까진 소설을 쓸 수 없기에.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자연스럽게 박헌영을 쳐다보게 되었다.

박헌영은 웹에 연재할 원고를 작성하는 모양인지 키보드를 두들겨대고 있었고, 사뭇 그 속도가 대단했다. 설원은 인상을 쓰는가 하면 뭔가 죽 써내려다가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지워버리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잘 써지나보네.”

박헌영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내가 변해버린 탓에 소설을 쓸 수 없는데, 박헌영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주르륵 글을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내가 하는 건 사유와 고찰을 담아내는 작업이라기보단 조금 더 스토리텔링의 본질에 가까운거니까. 내가 변했다고 해서 내가 짜놓은 이야기가 변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

뭔가 대단하네.

무엇보다 박헌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알고, 자신의 작업이 영향받지 않는 이유도 명확하게 알고 있다.

박헌영은 이야기를 쓴다는 자의식을 가진 채 소설쓰기에 임한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소설에 내 본질을 담아내려는 자의식을 가진 채 소설쓰기에 임한다. 그렇기에 내 소설은 이야기라는 본질보다는 나라는 사람이 하는 말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전자는 나의 본질이 변한다 해서 변하는 게 아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박헌영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고, 나도 박헌영의 말 때문에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박헌영을 무시해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결국 진지하다는 건 다 같다. 그것에 경중을 나누며 중요도를 논해왔던 나 자신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었다고.

앞으로는 박헌영이 하는 일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그런데, 좀 달라진 게 있긴 해.”

“뭔데?”

“확실히, 뭔 상황을 써도 별로 안 꼴려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불가능해졌어. 고자가 된 상태에서 야설을 쓰는 기분이야. 아, 실제로 그렇구나.”

방금까지 했던 모든 말은 전면적으로 취소다.

박헌영은 상종 못할 미친놈이다.

“이,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내가 버럭 화내자 박헌영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시추에이션은 실격이야. 이거 완결치고 나면 여성향 BL물에 도전해봐야지.”

순식간에 독자타겟이 바뀌어버리는 박헌영은 그야말로 장르판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뭣보다 BL이라니, 그렇다면 박헌영은 그런 게 꼴린다고 말한것과 다름없다. 내가 뜨악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박헌영은 피식 웃는다.

“뭘 새삼스럽게, 남자일 때도 BL은 좀 봤어. 뭐 레퍼런스로 본거긴 하지만.”

“닥쳐, 닥쳐, 닥쳐, 제발 부탁이니까 닥쳐.”

“몇몇 명작들은 취향을 떠나서 실제로 보면 재미있다구?”

“뭔 얘길 해도 좀 작은 목소리로 하라고!”

지금까진 야설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BL얘기로 넘어가버렸다. 박헌영도 지금 이 대화가 심상찮다는 걸 자각했는지 주변을 슬슬 살펴보며 위태위태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헐, 이거 완전 부녀자들 대화잖아 이거? 으흐흐....”

“부녀자 맞는데 뭔 소리냐.”

“아니, 그 부녀자가 아니라.... 뭐, 됐어.”

박헌영은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둬버렸다.

“뭐, 꼴리지 않는 시추에이션을 쓸 순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다음건 BL이야. 주인공은 설원하고 TS전의 언니인걸로. 케미 진짜 개쩔텐데. 잘되면 내가 쏜다.”

그 말에 나는 악몽이 되살아났고, 시종 침묵하던 설원이 서늘한 눈빛으로 박헌영을 노려보며, 한 마디 했다.

“해.”

“어, 진짜? 된다고 할줄은 몰랐는데. 대박!”

“해봐 한 번.”

하지만, 설원의 눈빛은 차가워서 거의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뒈지고 싶으면.”

설원의 살기등등한 눈빛은 엄포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경고였다.

해봐라, 뒈지고 싶으면.

한기까지 느껴진 탓에 나는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은 박헌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미소지으면서,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낸다.

“왜 정색하고 지랄이야 미친놈아.”

-딱!

“악!”

눈을 부라리던 박헌영의 이마에 딱밤이 정확하게 명중한다. 짧은 비명을 내지른 박헌영은 이마를 싸쥔 채 울상을 지었다.

“그럼 앞으론 정색 안하고 때려주지.”

“정색하고 때리기까지 한거잖아 미친놈아! 둘 중에 하나만 해야되는 거 아냐?”

진짜 아픈지 박헌영은 이마를 싸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도 맞아봐서 알지만, 진짜 더럽게 아프다.

“애초에 정색하게 하질 마. 사람 많은 데에서 야설이니 BL이니 진짜. 미쳤어? 너는 애초에 개차반이라 모르겠지만 나하고 이쪽은 사회적 생명이란 게 있다고.”

너 그런 거 신경쓰는 사람 아닐텐데?

오히려 설원에게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박헌영을 말로 두들겨패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시원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뭘! 뭘!”

박헌영은 미소녀가 된 자신을 십분 이용해가며 귀여운 척, 화난 척, 별별 요망한 짓거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자기가 귀여운 걸 아는 사람은 정말 악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상황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마저 박헌영을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설원의 인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딱!

“악!”

“지랄하지 말라니까?”

박헌영이 무슨 짓거릴 해도 설원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 당해보니 면역력이라도 생긴건지, 박헌영이 아무리 여우짓(본인이 그래 보이리라 상상하는)을 해도 무덤덤했다.

나도 저런 모습의 박헌영을 보면 짜증나긴 해도, 솔직히 귀엽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것 같은 설원은 그야말로 내가 보기에도 신기할 정도였다.

설원은 비뚤어진 인간이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안다.

하지만, 그 비뚤어짐 때문에 설원은 우릴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건 단 하나의 문제에만 대응하는 건 아닐거다.

결국,

카페에서 나갈 때까지 다들 소설은 별로 쓰지도 못했다.

결국 박헌영과 설원의 푸닥거리 끝에 카페의 자리를 파했다. 설원은 지친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박헌영은 제 나름대로 완벽하게 철벽을 치고 있는 설원의 모습이 저에게 분한지 인상을 묘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야 설원.”

“또 왜.”

카페에서 밖으로 나온 참이었고, 박헌영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설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아니.”

“너무 칼같잖아! 언니도 있는데 왜!”

“라면은 내 방에도 있어. 간다.”

“진짜 가게? 그냥 먹고 가지?”

“널 상대하는 걸로 오늘치 스트레스 할당량 다 채웠어. 피곤해.”

설원은 지쳤다는 듯 발걸음을 제 집 쪽으로 돌렸다. 박헌영은 설원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생각에, 저새낀 고자야. 고자가 아니면 말이 안 돼.”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내 말에 박헌영은 나를 빤히 바라본다.

“하긴. 그렇지.”

“너도 적당히 해.”

“왜?”

박헌영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설원이 네가 이렇게 변했을 때 대놓고 집적거리면 기분 좋았을 것 같아?”

만약 설원이 박헌영이 변하자마자 들이댔다면, 박헌영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좋진 않았겠지.”

당연하게도 그걸 기꺼워할리가 없다. 그런 건 솔직히 기분나쁜 일이다. 외면이 변한 것 따위에 혹해서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상종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박헌영은 웃었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이러는거잖아?”

“안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그러는 점이 제일 악질이야 너는. 안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계속 그런 식으로 건드려도 되는 건 아니....”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박헌영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온다. 박헌영은 조금쯤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웃는다.

“설원은 안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이러는거라는 말, 무슨 뜻인지 몰라?”

“그게 무슨 뜻인데?”

“그래서 좋은거라고.”

설원은 사람을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니까. 외양이 변했다고 해서 본질을 대하는 듯한 그 태도가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런 사람이라서 건드린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사람이라서, 좋다는 얘기다.

전제를 애초에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설원은 박헌영이 변했다 해서 들이대고, 외면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하는 가정 같은 건 필요없다. 애초에 설원이 그런 사람이라서 박헌영은 자신이 이런다는 걸 말하는거다.

“진심이냐?”

“글쎄?”

박헌영은 내가 얼이 빠져있자 웃음을 터뜨렸다. 박헌영은 말도 안 되는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준비한 것처럼, 박헌영이 배시시 웃는다.

“그런 컨셉으로 살 생각이야.”

박헌영에겐 이게 무슨 캐릭터 놀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물론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만 박헌영이 그렇게 살겠다 말하면, 그렇게 살 것이다. 그 방향을 강제할 수는 없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장난을 잘 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이란 건 분명히 있다. 거짓말쟁이기에 가질 수 있는 위치가 있다.

나는 거짓말과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타인의 불신을 믿고 수많은 말들 속에 진심을 섞어넣는다는 걸 안다.

설원에게 치는 수많은 농담과 장난 속에서, 오늘 보여줬던 유혹 아닌 유혹 속에서. 설원은 결국 박헌영의 모든 말을 불신하게 될거다. 그러면 박헌영은 그 때야말로 제대로 설원에게 진심 섞은 농담을 던질 것이다.

그런다면 거절에 의한 상처 없이, 매 순간마다 고백을 할 수 있으니까.

박헌영은 장난스런 구애를 할테고, 설원은 때로는 신경질을 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넘길거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짓말쟁이들이란 사실 가장 많은 진심을 말하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다.

박헌영의 설원에 대한 악의 섞인 구애는 점점 애정 섞인 구애로 변해갈거다. 설원도 그걸 눈치채겠지.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는 모든 장난을 거짓말이었다는 한 마디로 넘어갈 수 있다.

아무 때에나 고백할 수 있고, 차여도 장난이었다 말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다시 같이 있을 수 있는 위치.

박헌영은 그 포지션을 가져가겠다고 말한 셈이다.

박헌영의 저 말은 그저 캐릭터 잡고 컨셉놀음을 한다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 안에는 묵직하고 단단한 뼈가 들어있었다.

설원이 연애문제에 민감하다는 걸 알기에 그런 위치에 서려고 한다. 제대로 고백하고 제대로 차여버리면 설원과 친구로 남을 수 없으니까.

장난스럽게 유혹하고, 도발하고, 고백하는 그런 위치에서 설원을 못살게 굴거란 얘기다. 설원은 박헌영의 마음이 진심이 아닐거라는 확신 속에서 박헌영을 적당적당히 받아주다가, 어느 새 박헌영의 그런 애정 섞인 장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거다.

그러면, 그건 사실 연애랑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다.

조금 지나치게 매달릴 뿐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신을 자각한 설원은, 그 때 박헌영을 어떻게 보게 될까?

이제와서 거절하기엔 너무 길었던 장난과 농담의 시간들 때문에라도, 그 땐 박헌영을 쳐낼 수 없을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꽤 섬뜩한데.

이 새끼, 대체 어디까지 멀리 본거지?

“너 좀 쓸데없이 치밀하네....”

“그치?”

박헌영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들은 게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러니까 만화를 많이 봐야 하는거라니까 사람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박헌영은 발랄하게 한 걸음씩 걸어갔고, 나는 그 뒤를 한숨을 쉬며 따라갔다.

확실히, 저렇게 귀엽고 예쁜데다가 진심이기까지 하면, 안 넘어올 남자가 어디 있을까 싶긴 하다. 본질이 어쨌건 보이는 건 외양뿐이니까.

만약 설원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며칠만에 넘어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설원이다.

거의 병리적인 수준의 연애혐오를 가진 설원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박헌영의 생각은 꽤 간단해 보이면서 치밀하지만, 그게 설원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이제와선, 차라리 그러길 바란다.

연애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는 연애로 해결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지금의 박헌영은 설원이 시달리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밝고, 활달하고, 꽤 치밀할 정도로 제 애정에 열심이지 않은가.

나는 설원의 친구고, 박헌영은 설원을 친구로 보지 않기로 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나쁜 게 아니다.

설원이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나 또한 그런 박헌영과 설원이 잘 되고, 온전히 애정 넘치는 연애를 통해 서로의 문제를 치유해주길 바라야만 한다.

응원해주는 게 맞다.

응원,

해줘야만, 한다.

그게 당연할거다.

아마도.

[작품후기]이.... 이건....

장난을 잘 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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