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그래서 박헌영은?”
“지금쯤이면 다 알려졌겠지?”
오늘은 박헌영이 변한 뒤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이다. 오늘 아침, 정말 제대로 차려입은 채 학교로 가는 박헌영을 보며 ‘정말 이래도 되는건가.’싶은 의문을 느낄 정도로 오늘의 박헌영은 본격적이었다.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설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박헌영은 아무래도 괜찮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아무래도 괜찮게 대한다. 그들이 비난하건 경악하건 감탄하건, 박헌영의 마음이 단단할 거란 사실만큼은 안다.
얼마나 지났다고, 박헌영에 대해 모르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초래하고, 또 전혀 다른 것들을 자각하게 한다. 그 녀석이나 나나 타의적인 변화를 겪었지만, 그 때문에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박헌영도 이 카페로 오기로 했기에, 녀석은 두어시간쯤 뒤에 카페로 찾아왔다.
설원도 소설을 쓰는 중이었고, 나는 아직도 무엇을 써야할지 몰라 골몰하는 중이었다.
녀석이 카페에 들어오기 무섭게 시선이 집중되는 게 나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화려한 금발에 인형같은 이목구비는 물론, 옷차림도 블루벨벳 원피스에다가 하이힐까지.
일부러 쳐다보지 않기도 힘들 정도로 눈에 띄는 모습이다. 물론 박헌영은 그런 시선이 어쨌냐는 듯 익숙해진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우리에게 다가왔다.
의외인 건, 박헌영의 그런 시선집중되는 모습에 설원이 별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설원 나름대로 그런 박헌영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지.
“어땠어?”
설원의 물음에 박헌영은 씨익 웃으며 브이자를 그려보인다.
“어땠긴, 애간장을 녹여줬지.”
“아니, 나는 그냥 아무 일 없었다거나, 잘 했다는 대답을 기대한거거든?”
설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묻자 박헌영은 의자에 앉으며 눈을 찡그려보였다. 짓궃은 장난이라도 성공한 어린애처럼.
“아주그냥, 남녀를 막론하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던데? 내가 그렇게나 귀엽나봐.”
으흥, 흥, 하면서 콧노래를 불러대는 박헌영은 설원의 커피를 빼앗아 몇 모금 마셨다. 물론, 설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박헌영의 손에서 커피를 빼앗아갔다.
“네 돈 주고 사처먹어 새끼야.”
“악마의 쓴물을 성수로 만들어줬는데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박헌영은, 상당히 다른 의미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실천하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열받는 언행을 습득해가고 있다. 박헌영은 양팔을 모아 턱을 괸 채,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설원을 바라본다.
“외모란 거 참 재미있다니까.”
“뭐가.”
“다들 내가 박헌영이란 걸 알텐데, 내가 앞에서 막. 이렇게 되었으니 ‘잘 부탁해요★’라는 느낌으로 말하니까 다들, 아주 볼만했어.”
대체 그건 어떤 느낌으로 말하는건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새끼 포메라니안을 봤을 때라거나, 복실복실한 새끼고양이를 봤을 때의 그런 표정이었지. 하지만, 내가 박헌영이라는 걸 아니까 동시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서 용을 쓰는 그런 표정말야. 아주, 아주 볼만했어.”
박헌영은 깔깔거리며 이번에는 내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은 박헌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외견에 압도되어 귀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박헌영의 외모와 그 내면에서 느끼는 괴리감 때문에 귀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속이 메슥거리는 게 사실이니까.
“개총 술자리라도 가면, 아이돌이 될 수 있을거란 아주 강한 확신이 들고 있어. 내 노예가 되라고 하면 발밑에 엎드릴 녀석들 후보가 벌써부터 보이거든.”
“...너 스스로 즐기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도를 지켰으면 좋겠다.”
설원의 말에 박헌영은 여전히, 유혹하듯 설원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그 작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왜, 걱정돼?”
“남자든 여자든 맛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던 너라면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아주 잘 알겠....”
설원은 그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문다. 그리곤 얼굴이 벌개진다.
안그래도 박헌영 때문에 시선집중이 되는 판이고, 거기에 나까지 있다. 그렇기에 반사적으로 설원은 나와 박헌영 둘 사이에 낀 부러운 놈이란 시선을 받고 있었다.
실제로는 조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설원은 여자 둘 앞에서 남자건 여자건 맛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미친소릴 한게 된다.
“어머, 여자 둘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변태.”
박헌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설원은 이를 악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불공평한 게 아니겠지만.... 어쩐지 뭔가, 존나, 불공평한데?”
“꼬우면 너도 걸리면 될 일이지?”
박헌영이 배실배실 웃었고, 다시금 설원의 커피를 마시며 실눈을 뜨고 설원을 바라봤다.
“물론, 난 그런 일 안 생겼음 하지만.”
“...너 뭔가 의도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흐응, 무슨 의도일까나?”
박헌영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고, 설원이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흠칫 물러났다.
“이 미친.... 왜, 왜 건드리고 지랄이야!”
설원이 소름돋았다는 듯 질색을 해도 박헌영은 웃음을 터뜨린다. 아무래도 테이블 아래의 하이힐로 설원의 종아리라도 톡톡 찬 모양이다.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다. 설원은 장난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어제의 대화가 있었기에 나는 그것이 백퍼센트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이 녀석은 장난이겠지만, 그 장난에는 어느 정도의 진심도 섞여있다는 걸 나는 어제의 대화 때문에 알고 있다.
박헌영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씨익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뭘까.
너는 이런 걸 못 할거야. 그런 의미인지, 아니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건지.
아니면 그저 웃는건지.
잘 모르겠다.
박헌영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지만, 알 수 없는 것도 역시 생겨버렸다.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거냐?
설원은 결국 못 참겠는지 박헌영의 양 볼을 부여잡고 쭉 늘렸다.
“으으! 으프드그!”
“적당히 하지? 이 꼴로 뒈지게 쳐맞으면 얼마나 아플 것 같냐?”
“으르쓰! 으르뜨그! 으프! 으프으!”
결국 설원에게 응징의 철퇴를 맞은 다음에야 박헌영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꼴이 자기가 화가 났다고 시위하는 모양새다.
“아파! 학내 성폭력위원회에 상담받을거야.”
“해보시지.”
“이건 젠더권력을 이용해서 여성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주요사례로 학내 인권교육매뉴얼에 기록될거다 너?”
“네 적응은 빠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이용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흥이다!”
화났다고 보기에는 그냥 귀여울 뿐이다.
아니, 알겠지. 자기가 저러면 귀여워보인다는 걸 알고 저러는거다. 그런 면에서 박헌영은 지독할 정도의 악질이다.
자신이 그 누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는 걸 알고 이용하는 사람은, 이렇게나 꼴불견인가.
그리고, 꼴불견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미워할 수도 없는건가.
사람에게 눈이 최고의 감각기관이라는 게 이토록 가슴아픈 일일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행동이 웃긴지 깔깔거렸다.
“아무리 내가 진성 개씹덕이라지만,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속성을 따라하는 여자는 역겹다고 생각했거든? 흥! 이라거나, 따, 딱히 널 위해서 한 건 아니니까! 같은거말야.”
“......그게 왜?”
“또 무슨 개소릴 하려고?”
“그런거 다 필요없어.”
박헌영은 나를 보며, 양눈을 동시에 찡그린다. 그거, 설마 윙크한거냐?
“그냥, 예쁘면 뭔 개지랄을 해도 그냥 다 어울려. 예쁘면 돼.”
중요한 건 외모라고! 외치면서,
외모지상주의에 격렬하게 동의한다는 듯 박헌영은 마구 고개를 끄덕여댔다. 물론, 그런 박헌영의 태도가 진짜 짜증난다는 생각은 들지만.
역시, 나도 그 외모지상주의를 부정하진 못하겠다.
과거의 박헌영이 눈앞에서 이랬다면, 노트북으로 머리를 내려쳤을텐데.
지금 나는 그러고 있진 않으니까.
나도 할 말 없는 건 마찬가지다.
“언니도 한 번 해봐.”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물론, 그 개소릴 참아줄 생각이 있다는 건 아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조심하라고. 이 모자란 새끼야.”
설원이 자꾸만 끼를 부리는 박헌영에게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듯 쏘아붙였고, 박헌영은 약간 주춤한 듯 하더니 작게 물었다.
“걱정돼?”
“안 되겠냐. 네가 아무한테나 그러고 다닐 게 뻔한데. 너도 알다시피 세상에 미친새끼들은 허다해. 그리고 그런 놈들을 네가 안 만날거란 보장도 없는거고.”
애교를 부리고, 끼를 부려대면서 누군가는 정말로 착각하거나, 박헌영이 별 신경을 안 쓴다 생각하고 접근할지도 모를 일이다. 박헌영의 이런 행동들은 충분히 착각할법하다.
박헌영이 겁없이 이런 짓을 하다가 해코지라도 당한다면, 아마 이 녀석의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일은 없을거다.
그러니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알아서 조심하길 바라는거다.
“뭐래, 내가 아무한테나 이럴거라고 생각해?”
“그럼 아니냐?”
설원의 퉁명스러운 말에, 박헌영이 실실거리며 물었다.
“내가 아무한테나 그러는 거, 싫어?”
“그럼 좋겠냐?”
“그럼, 너한테만 그럴까?”
“나한테도 하지 말라고!”
설원이 지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헌영이 이런 의미심장한 말들을 할 때마다 오히려 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다. 저 말에 깃든 진의를 설원이 알아채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왜에, 난 네가 나한테만 그러라고 하면 그렇게 할건데.”
“끼도 좀 적당히 부리지? 아무한테도 하지 말고, 나한테도 하지 마.”
“...야.”
그리고 박헌영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진다.
“너.... 농담이 아니라 내가 진짜 아무한테나 이럴거라고 생각하는구나?”
그 말에 설원의 표정도 굳어졌다.
“아니, 그럼 뭐.... 아니야?”
“하.”
박헌영은 어쩐지 싸늘한 표정으로 설원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건 조금, 실망이야.”
“실망하고 말고 할 게 어디있는데? 뭐야? 너 화났어?”
설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자, 박헌영은 잠시 침묵했다.
“당연히 장난이지 등신아. 쫄았냐? 쫄았어? 미소녀가 화내니까 쫀거지? 맞지?”
박헌영이 깔깔거리면서 설원의 등을 팡팡 때린다. 설원이 왜 정색하고 지랄이냐고 화를 냈고, 박헌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감춰진 박헌영의 오른손이, 창백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을.
[작품후기]앗....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