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엄밀히 말하면 박헌영은 선전포고를 한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마 그렇게 될테니까.
나에게 멍하니 있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설원과 박헌영이 만약 연애를 한다면? 그건 내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뒷짐지고 구경하건 말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상관이 있다면?
그러면 어떻게든, 너도 알아서 뭐라도 하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박헌영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미리 알려줄테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나는 그 때 이미 말했다고.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인 동시에 나에 대한 변명이기도 할거다.
나는 그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다. 되도록이면, 내가 그런 감정을 갖지 않게 되길 바란다.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설원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만약 박헌영이 설원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란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둘의 관계를 응원해주게 될지 어떨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한 주제에 박헌영은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만 지킨 셈이었다.
다음 날,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박헌영은 내 옆구리에 꼭 매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안아주겠다더니 안겨있는 꼴이라니.
그리고, 어쩐지 그걸 그렇게 불편하거나 징그럽게 생각하지 않는 나 자신이 또 낯설었다. 그저 잠든 박헌영이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는 걸 가만히 바라보면서.
“술 냄새....”
무슨 꿈을 꾸는지 히죽거리고 있는 박헌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응....”
박헌영은 그러면서도, 내 옆구리에 어떻게든 파고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예전이었다면 징그럽다고 밀쳐내는 수준이 아니라 아구창을 때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본다.
이렇게나 귀여워진 박헌영의 모습이라서 그런지, 나는 깨지 않을 정도로 살짝 밀어내기만 할 뿐이었다.
언제고, 나는 세상에 할 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는 사람이고, 내 고민은 이러하다.
세상은 항상 변화발전해왔고, 그 변화발전의 방식은 이러해야만 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글줄로 다 쓰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세상에 할 말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지금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방식이 달라졌다.
나는 세상을 향해 외쳐왔다. 사람들을 향해 말해왔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런 생각들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가.
나는 하소연을 하는 사람이다.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워서. 그 감정들을 견디지 못해 하소연을 할 뿐이다. 왜 내가 이렇게 되어야만 했냐고, 왜 나여야만 하냐고, 왜 이런 상황들을 겪어야만 하냐고 푸념하고 있다.
생각을 말하던 나는 감정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의지가 아닌 것에서 비롯한 문제 때문에 내 인생이 변한 방식에 대해서 그저 토로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제 인과에 얽힌 일만을 겪으며 사는 건 아니다.
기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불행이란 내가 겪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의 불행은 의도치 않게,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찾아온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며, 그것에 분노해왔다.
하지만 내 분노는 모두 타인이 겪은 것에 대한 공감적 분노 이상이 되어본 적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는,
진심으로, 진정으로 불행해본 적 없어서.
남들에게 분노를 종용하며 행동을 강요했지만, 그 분노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타의적인 불행에 분노와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해라, 움직이라고 말해놓고선.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나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내가 얼마나 남들에게 강압적으로 굴었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겸손한 척 하며 세상 모든 걸 아는 척 하는 바보였고, 슬픔과 분노가 뭔지도 모르면서 남들에게 그 감정에 대한 공감과 분노를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내게 임한 이 질병이 내게 진정한 의미의 불행을 안겨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불행이라면, 나는 내 목을 매달아버렸을테니까.
하지만, 그 불행의 편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얼마나 내 스스로의 당당함 이면에 많은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왔는지 깨달았다.
나는 오만했고,
나는 자만했고,
나는 어리석었고,
나는 무지했으며,
가장 최악인 것은 그런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척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우월감에 도취되어 살았을 뿐인,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지금껏 세상에 대고 하려던 모든 말들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그 사고와 사유들은 그대로 내 안에 존재하겠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내가 겪는 삶과, 내가 하는 생각과, 내 안의 사유들이 완전히 변해버렸기 때문에 나는 이제 과거에 했던 모든 말들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되었기에, 이제는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이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말들을 내 안에서 꺼내 쓰게 될거다.
“그거 전기 낭비하는 새로운 방식이야?”
“어?”
맞은편에 앉아있던 설원이, 턱을 손에 괸 채 나를 보며 툭 내뱉는다.
“멍하니 앉아서 키보드도 안 두들기면서 한시간째 뭐 해?”
설원과 나는 지금 카페에서, 각자 소설을 쓰기 위해 앉아있었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던건가? 내가 어지간히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설원은 걱정된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었어.”
이 모든 고민은, 백지인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무슨 글을 써내려가야 할지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글을 쓰는 건 자주 해온 일이지만, 내 삶의 어느 순간에서도 그건 쉬운 일인 적 없었다. 흔히 창작의 고통을 산고(産苦)에 비유한다고들 하지. 물론 나는 그 정도의 고통을 겪은 건 아니다.
하지만, 백지에 검은 글줄을 채워가며 내가 할 말들을 깎고 또 깎아내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사유는 적당한가, 내가 너무 논리를 비약시킨 것은 아닌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
수많은 고민과 고민 끝에 지워가고, 또 채워내고, 또 지워내면서 글을 써내는 건 내게 단 한 번도 즐거운 일인 적 없었다.
설원처럼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을 토해내는 것도, 내겐 불가능했다.
박헌영처럼 글을 즐겁게 쓴다는 것 자체를,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울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다른 학우들에게도 공감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나는 글 쓰는 걸 업으로 삼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좋아할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왜 쓰는걸까.
그것에서만큼은 나는 여전히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설원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말.”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할때만큼 우리는 항상 진지했다. 비웃지도 않고, 농담으로 넘기지도 않는다.
“그래야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나는 이제 내가 예전에 했던 모든 말들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왜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나는 이제 과거의 나를 신뢰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설원을, 나는 가만히 바라본다.
솔직하게,
아주,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 말이 맞아.”
“뭐가?”
“나는, 마초였어.”
“.......”
처참한 기분이지만 나는 담담하게 고백한다.
“나는 남성우월주의자였어.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이 우월하다기보단,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것을 내 안에서 완벽하게 분리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절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설원이 이따금 나를 마초라고 비난할 때, 나는 그것이 그저 우스개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된 뒤 가장 먼저 상실한 나의 남성성과, 내가 여자가 되어서 잃은 것들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수준의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구분만큼은 명확하게 하고 있었다.
만약 남성성과 여성성에 그다지 큰 집착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혼란을 느낄지언정 나만큼은 아니었을거다.
나는 내가 남성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생각해왔고, 부정하면서도 내 남성성을 떳떳하게 여겨왔기에 더욱 쉽게 무너져버렸다.
내가 쌓아올린 남성성이 강할수록, 굳건할수록 나는 내 변화에 민감해진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버린 지금, 나는 더더욱 빠르게 무너져버릴거란 단순한 사실이 눈앞에 있다.
“이렇게 되니까 오히려 알겠어.”
내가,
지독할 정도의 마초이자.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선입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과거의 나는 선입견이 선입견인줄도 모르면서, 오히려 나 자신이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나 스스로 믿고 있었어.”
그렇기에.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나를 신뢰하지 않아.”
오만했고, 자만했으며, 독선적이었던 순간들을 이제 다른 나 자신이 되니 똑똑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나를 신뢰할 수 없기에 과거에 했던 모든 말은 쓸모가 없어졌다. 그 모든 사유들은 이제 변해야만 한다. 변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게 된 나는, 그런 최소한의 발전이나마 건져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덜 억울하다.
“인간적인 성장을 이룬 부분에선 칭찬을 받아도 되겠어.”
설원은 내 말에 슬퍼하기보단 씨익 웃으면서 기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좀 우는 표정이라도 지어주면 어디 덧나냐?”
“사람이 성장을 했는데 왜 우울해해야 되는데? 박수치고 기뻐해주는 게 도리지.”
내가 볼멘소리를 내뱉자 설원이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린다. 그래, 성장을 기뻐해주는 건 그런 면에선 맞는거지, 사람이 모두 다른 것처럼, 위로에도 수많은 다른 방식들이 있는거다.
울어주는 것도 위로겠고, 웃어주는 것도 위로일거다.
“등신아, 성장은 아픔을 동반하는거야. 아프다는데 처웃고 지랄이야?”
성장은 곧 그만큼의 아픔을 함의한다.
그러니 내 아픔에 공감하라고, 내가 씨익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설원은 더더욱 깔끔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이미 오래전에 다 커서, 성장통 같은 건 잊어버렸거든?”
나를 놀린다.
그건 키를 말하는건지, 다른 부분을 말하는건지 모호하다. 아마 알고 그러는걸거다. 중의적인 말을 통해 이렇게 말장난을 하는 건, 우리가 자주 하던거니까.
설원은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라도 났는지, 문득 내게 말한다.
“그런데말야.”
“왜?”
“성장이 아픔을 담보하는걸까, 아픔이 성장을 담보하는걸까?”
“흐음....”
흥미로운 질문이다.
아프면 성장하는걸까, 성장하기에 아픈걸까.
“예전이었다면 전자라고 생각했겠지.”
자라기에 아프다. 성장하기에 아프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인간은 성장해야만 하고, 발전해야만 하는 존재니까. 그런 껍질을 깨나가면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아픔이 곧 성장통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다.
“지금은, 후자가 맞다고 생각해.”
아프니까, 어쩔 수 없이 성장하게 되어버린다고.
아픔을 견뎌내기 위해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자라게 되어버리는거다.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몸과 마음을 가져야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껍질을 깨기 위해서 성장하고, 그래서 아픈 게 아니다.
깨는 게 아니라 깨지지 않기 위해서다.
아파서, 성장한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
이번 내 말에, 설원은 웃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웃지 못했다.
그저 이를 악문 채, 어떤 감정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려는 것처럼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작품후기]아픔이 성장을 담보할까요?
성장이 아픔을 담보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