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한 때는 남자였던 둘이.
둘 다 여자가 되어서 소주를 기울인다. 박헌영은 금발, 나는 갈색머리.
알맹이는 그대로지만 겉모습은 너무나 달라져버렸다.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길 한다.
“생리 해봤어?”
“아직.... 안 왔는데. 하려나?”
“하겠지. 임신도 한다는데 뭘.”
“이, 임신?”
생각지도 못한 걸 듣자 갑자기 멍해진다.
초경도 안 왔는데 임신이라니. 그런 걸 하게 된다면 대체 무슨 기분일지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박헌영도 그건 못 견디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솔직히 그것까지 생각해보는 건 무리야....”
“대부분의 진짜 여성들에게도 무리일걸?”
모든 여자가 임신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공포만큼 다른 여자들이 임신에 대해 느끼는 공포도 있을거다.
웃긴다.
박헌영이기에,
또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핑크색인데.”
“어, 어, 어, 어, 어쩌라고!”
취소.
박헌영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박헌영은 무지막지한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곤 나를 빤히 쳐다본다.
“존나게 당황하는 걸 보니 그쪽도 ‘그런’ 모양이지?”
“닥쳐 제발, 부탁이야. 제발.”
“몸은 솔직한 주제에 항상 입으로는 그런다니까. 위선자. 왜, 핑크색을 사랑하는 건 보편적인 인류라는 증거라고. 수치스러워할 필요는 없어.”
“제발, 마음속에만 담아둬야만 하는 말도 있다는 걸 생각하자.”
물론 나도 그 쪽인 건 맞지만 너처럼 당당하게 말하고 싶진 않아. 박헌영은 그저 내가 당황하는 걸 보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보여줄까?”
그렇다고 말만 하면 당장 벗기라도 할 것처럼 박헌영이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내가 소주잔을 집어던지기라도 할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자 박헌영은 농담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한참을 더 마셔댔다.
“나, 주량 좀 는 것 같은데.”
“그렇네.”
박헌영은 평소라면 이미 넉아웃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마셨음에도 꽤 말짱했다.
“이제 우리 사이에 흡연자는 설원뿐인걸로.”
셋 다 남자였다.
동시에 셋 다 흡연자였다.
둘은 여자가 되었고, 둘 다 피우던 담배를 본의 아니게 끊게 되었다.
“진짜 왕따라도 된 기분인 거 아냐? 만약에 나였으면....”
“너였으면 좋아서 입이 벌어졌을 것 같은데.”
박헌영은 내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흐음....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름대로 그림 괜찮은데? 설원, 부러운 새끼 같으니라고.”
“정작 본인은 별로 즐거워보이진 않아 보이던데.”
“뭐, 그런 놈이니까.”
그런 놈.
제 자신에게 엄격한 설원은 나와 박헌영을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할거다. 실제로 그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내게 집에서 나가란 소리까지 했으니까.
박헌영은 소주를 한 잔 더 비우고, 가만히 중얼거린다.
“우린,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걸까?”
자조가 섞인 말은, 지금껏 과잉된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되묻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떨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좋아해야지 뭐. 그럼 어쩔거야? 내가 꼴리는 쪽을 사랑하는 게 사람인데, 내가 만약 남자한테 꼴리게 된 거라면 남자를 좋아하게 되겠지 뭐.”
그 태연한 받아들임이 놀랍다. 말만 그렇게 하는걸지도 모르겠지만, 박헌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꽤 괜찮은 남자였으면 좋겠어.”
박헌영은 어쩐지 슬픈 것 같은 표정으로 배시시 웃는다.
“쓰레기 같이 구는 놈을 좋아하게 되면 존나 골치아프잖아. 솔직히 남자는 이제 더럽게 꼬일 것 같긴 하거든.”
“그렇겠지....”
나도 특출난 편이지만 박헌영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 독보적이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활달한 성격까지.
여자가 되면서 남자인 박헌영의 단점들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좋은 사람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겠지. 뭐, 나는 별 생각 없지만.”
나는 아무것도 각오할 생각이 없기에, 박헌영처럼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 같은 걸 하고싶진 않다.
“좋은 남자라....”
박헌영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소주를 마시는 나를 흘긋 쳐다본다.
“일단 지금 생각나는 건, 설원 정도뿐인데.”
“푸웃!”
“으악!”
나는 황당해서 뱉어낸 술을 휴지로 닦아낸다. 박헌영도 자신의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의외야?”
“아, 아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설원이 좋은 남자라는 데에 이견이라도 있어?”
“없는 자리에서 욕할 생각은 없다만, 그 녀석은 지나치게 예민해. 좋은 남자라 보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다고.”
결국 그 예민함 때문에 내가 쫓겨난거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박헌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예민한 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도 신경써주잖아.”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거냐? 거기다가. 그 애정결핍에다가 연애혐오증은 또 어떻고?”
“애정결핍이 심한 사람한텐 그만큼 사랑을 퍼부어주면 되는거야. 연애혐오는? 그건 연애가 끝나지 않으면 되는 문제고.”
박헌영의 그 말을 듣자 나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다.
이 자식.
이거 농담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었잖아.
“너.... 진심으로 말하는거야?”
“어.”
박헌영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인다.
“진심이야. 나는 설원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주를 한 잔 따르면서, 말한다.
“그리고, 내가 혹시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리고 따라놓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면서.
나를, 바라본다.
“그게 설원일거라고, 확신해.”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박헌영의 표정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잘 해보자.”
그 얼굴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뭘 잘 하자는 건지, 내가 뭘 해야 한다는건지 말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박헌영은 웃고 있었다.
입만,
입만 웃으면서 눈으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무슨 표정인가를 지으며 묻는다.
“너, 무슨, 나를 벌써부터 사랑의 라이벌. 뭐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나는....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나도 알아.”
박헌영은 내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웃는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알아.”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의 어떤 경계선 같은 것을, 내가 아닌 박헌영이 알고 있다.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라서,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후기]구와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