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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9화 (19/224)

00019 우동을 먹는 이유 =========================

내가 질려있자 멀리 달아났던 박헌영이 다시 돌아왔다. 또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묻지는 않았다. 나를 돌봐주기 위해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수업에 원래는 가려고 했는데 그걸 전부 안 나간 것이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묻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서 전혀 티를 안 내고 있다니, 정말 기분 나쁘다.

거짓말이야. 기분 안 나빠. 짜증날 정도로 고맙다. 아니, 짜증도 취소, 진심으로 고맙다. 또 눈물 날 것 같아.

내가 이러고 있으면 이 인간은 내일도 수업에 안 나갈 게 뻔하다. 저도 졸업해야 하는 주제에, 문창과에서 학점 잘 따봐야 전혀 소용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잘 챙기는 사람들은 취직도 잘 하는 모양이니 어쨌든 소중한거다. 여기서 밍기적거리면서 이 인간의 출석점수를 갉아먹고 싶지는 않다.

집에 가야지.

그런 마음을 먹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는 말이 있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준비했다. 사실 가져갈 거라곤 지갑하고 갈아입을 옷이 전부였다. 엄마, 아빠, 남동생 이렇게 셋이 산다. 엄마 옷이 맞을리가 없고, 당연히 여자옷이 없을거다. 박헌영은 제 방으로 갔고, 이선준은 방으로 들어왔다.

“뭘 그리 급하게 가?”

“그냥, 마음먹은 김에 해치우려고.”

나는 종이가방에서 후드티 하나, 청바지 하나, 속옷 세트 몇 개를 꺼냈다. 양말도 꺼내고 이것저것 꺼냈다.

“야, 이거도 가져가.”

이선준은 자기가 사왔던 보따리에서 옷가지들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산 옷들은 전부 외출복이다. 집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은 안 샀다. 트레이닝복과 끈나시, 반팔티 이런 것들이었다. 뭐야, 이 인간. 왜 이렇게 섬세해? 나도 챙기지 못한 부분을 저가 알아서 사오다니.

“이봐요. 아저씨.”

“왜?”

“솔직히 말해.”

“뭐가?”

“원래 여자였다가 TS한거지? 진짜 개수상해.”

“맞을래?”

“악!”

이선준이 내 머리를 거칠게 쥐어박았다. 장난이 아니다. 살살 때린 것 같은데 눈물이 핑 돌만큼 아팠다.

“맞을 거냐고 물어보면서 때리는 건 어느 나라 법도냐 이 무뢰배야!”

이선준이 만약 진짜로 TS한거였다면? 생각해보니 진짜 웃겼다. 저 얼굴로 여자라니, 방금 진심으로 소름 돋았어. 음? 하긴 나도 내 원래 얼굴로 TS한건 아니니까 딱히 별 상관은 없으려나, 저런 성격으로 예쁘장하면 그것도 이상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입에 걸레짝 물고 있는 주제에 귀엽고 예쁜 나부터가 이상하다. 망상하게 된다. 병신처럼. 그래, 가볍고 쿨하게 가는거야. 인생 뭐 있나. 일부러 우울해할 필요 전혀 없어.

나는 짐을 다 챙겨서 큰 스포츠백에 넣었다. 이 몸에 이런 스포츠백이라니, 바닥에 질질 끌릴 지경이다. 이선준이 날 뚱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무슨 시선인지 의미가 너무 명백하다.

“안 무거우니까 괜찮거든?”

아까는 짐을 떠안겼지만 왠지 더 신세지는 건 싫다. 뭐 제멋대로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때, 원래 사람이란 건 일관성이 별로 없다. 현실의 인물들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이라고.

“터미널까지 데려다 줄게.”

“됐어. 진짜 됐어. 그냥 집에 있어주지 않을래?”

“나야말로 됐다.”

그러면서 이선준은 스포츠백을 기어코 내게서 뺏어 들었다. 아, 진짜 열 받는다. 이선준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우동이나 한 그릇 해야지. 오랜만에.”

“아….”

“뭐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이제 와서 그러냐?”

그래, 사실 그랬다. 내가 예민한 거구나. 사실 바래다 준다고 낯간지럽게 말할 것도 없다. 말만 다르게 했지 우리는 서로 헤어질 때 항상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까지는 지하철로 대략 세 정거장 정도였다. 태원시, 그리 크지 않은 주제에 내선 지하철까지 있다. 노선은 서울에서 온 1호선과 내선순환 열차 이렇게 딱 두 개밖에 없다. 용산으로 가면 기차 타고 갈 수도 있지만 버스 타고 가는게 마음이 더 편하다. 나는 기차의 그 뭔가 텁텁한 것 같은 공기가 싫다.

버스는 삼십분 후 출발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벌써 저물고 있었다. 나는 터미널 내에 있는 간이 테이블을 보며 손짓했다. 이선준은 피식 웃었다. 원래 오 분 뒤에 바로 차가 있었는데, 나는 일부러 삼십분 뒤에 차를 끊었다.

태원시 터미널에서 파는 우동은 정말 기본맛에 충실한 우동이다. 우동면, 파, 육수, 유부, 김이 전부였다. 우동에 필요한 것만 넣고 끓인 거였다. 프랜차이즈도 아니었고, 간이로 만든 조리대에서 맨날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저씨가 대충 끓여주는 우동이었다. 간판도 없다.

이선준과 나는 정말 급하지 않은 이상, 저녁을 먹지 않은 이상 이 터미널에 오면 항상 이 우동을 먹었다. 가끔 김밥도 시켜서 먹었다. 내가 군인일 때에는 이선준이 날 바래다 줬다. 내가 전역하고 이선준이 휴가를 나오면 내가 바래다 주며 우동을 먹었다.

뭘 사내새끼들끼리 데려다 주냐 마냐 하겠지만, 애초에 그리 먼 거리가 아니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선준과 나는 시덥잖은 마초이즘으로 뭉쳐 있었다. 그래서 그게 왠지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데려다 줄 때에는 으레 버릇처럼 ‘우동 먹으러 간다.’ 라고 말해왔다. 아, 이러니까 뭔가 게이같아. 내가 생각해도 좀 느끼하다.

하지만 가끔 박헌영도 같이 왔다. 게이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내가 게이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부정해도 된다.

그냥 그거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라는 건 정말로 소중한거다. 단순하게 친구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어둘 수 있는게 아니야. 이해 못 한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어. 그냥 그랬다는 말이다.

어쨌든,

이 우동은 먹으면 그다지 별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엄청 맛있다거나, 엄청 맛없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우동이다. 말 그대로 우동!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하다.

양념과 후라이드 양대산맥이었던 치킨도 이제는 전문 치킨집에 가면 열 개가 넘는 조리법이 있다. 오븐, 프라이드, 베이크 등등…. 맛은 다변화되었고, 점점 자신들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찾는 경쟁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이런 기본적인 맛에 끌린다. 치킨이 먹고 싶었는데 거기에 치즈가루 뿌리고 허니버터 바른게 오면 왠지 서운한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아? 기본으로도 충분히 먹을만하고, 오히려 그런 쪽이 항상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래.

이선준도 그렇다. 나하고 비슷하다. 입학 때부터 같이 다녀서 그런지 입맛도, 생각도, 여러모로 비슷해져가고 있다. 박헌영은 그야말로 자신의 병신 같은 오리지널리티를 구축해서 닮았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다. 초등생 강간소설 같은 건 아무리 오래 함께해도 닮을리가 없잖아. 이선준이 우동을 후루룩 먹으며 말했다.

“우동이네.”

“우동이야.”

이선준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낄낄거리며 먹었다. 아저씨는 나와 이선준의 그런 대화를 보며 눈썹을 씰룩였다. 어, 이거 실례일수도 있는 말이네, 하지만 칭찬입니다 아저씨.

뭔가 맛있다. 버스 시간 얼마 안 남아서 급하게 먹는 우동이었지만 뭔가, 뜨거운 국물이 몸 안을 타고 흐르는 이 느낌이 아주 좋았다.

맛마저 전부 특색을 찾으려고 깊은 맛보다는 자극적인 맛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시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다 보니 맛의 스펙트럼은 점점 획일화되고 있다. 맵다. 짜다. 달다. 그리고 느끼하다. 혹은 그 맛들이 섞여있다. 맵고 짜거나, 달고 짜거나, 느끼하고 달거나…. 등등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탓에 오히려 동일해지는 기이한 현상이다. 세상은 참 신기하다.

요즘 나오는 음식들, 그냥 치즈만 처바르면 되는 줄 안다. 치즈는 요즘 보면 맛가루보다 더 많이 쓰인다. 특히 피자치즈. 그건 사실 대부분 진짜 치즈도 아니잖아. 치즈의 시대가 시들해지나 싶더니 이제는 버터의 시대다.

그런 면에서 이런 우동은 독립투사 같은 것이다. 자극의 시대에 밋밋한 맛을 내세워 무자극으로 승부한다. 현란한 부재료로 화려함을 꾀하는 시대에 단순한 고명으로 승부한다. 다양성의 시대에 메뉴판에는 우동, 김밥, 어묵, 단 세개로 승부한다. 물론 메뉴판에는 오뎅이라고 쓰여 있지만 나는 문학도니까 어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오뎅이라는 말이 더 맛있어 보이기는 하다. 나만 그래?

언젠가 이선준과 나는 이 우동집에 대해서도 술 마시며 토론한 적이 있다. 과연 이 우동집 아저씨가 과연 맛에 대해 그런 신념을 가지고 김밥과 우동, 그리고 어묵을 파는 것인가?

결국 그 토론으로 우리는 밤을 샜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냥 귀찮아서 편하게 만드는 거라고 했고, 이선준은 ‘그런 저열한 태도로는 그런 맛을 낼 수 없다.’라며 일갈했다. 문학적으로 보자면 이선준은 이상주의자고, 나는 염세주의자다. 그런 태도는 생활 전반 이곳저곳에서 드러난다.

그냥 그 시간에 여기 와서 물어보면 되는데, 우리도 참 등신같다. 결국 그 날 토론의 승자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우동을 먹었지만 아저씨에게 그런 신념에 대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래, 가끔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환상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좋다. 굳이 그 장막을 들춰서 진실을 확인하기 싫을 수도 있는거다. 그 실체가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아.

뭣보다 중요한 건 우동이라는 단순한 주제로 밤을 새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이다. 여자 얘기, 돈 얘기, 클럽 얘기 이런 것들이 아니라. ‘태원 터미널의 밍밍한 우동이 이 시대에 가지는 호소력’ 같은, 전혀 영양가 없고 웃기는 주제로 밤새며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우동보다 그런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선준도 나도, 서로가 없었으면 이 우동은 안 먹었겠지. 그런 친구니까. 바래다 주는 정도는 서로 해줄 수 있는거다.

다만 우리는 이 무참한 시대에 환상을 가질 뭔가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이대로, 가끔씩 이 우동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서 내가 오 분 뒤에 탈 차를 이십오분 더 기다리면서까지 우동을 먹어야 했던 이유다. 이런 우동, 먹고 싶다는 생각 안 드나?

우동을 다 먹자 버스 시간이 가까워졌다. 속도 좀 좁아졌는지 나는 약간 더부룩한 느낌이었다. 이선준은 스포츠백을 버스 짐칸에 넣어놓았다. 나는 버스 앞에서 이선준과 마주했다.

“가라.”

“어.”

손을 흔들고 가려다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이 켕긴다. 왠지 따라올 것 같은 불안감이 불쑥 들었다. 그 정도면 진짜 싫어할거다. 안 만날거다. 그쯤 되면 더 이상 우정의 단계는 아니다. 나는 친구에서 피보호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나는 말했다.

“수업이나 잘 들어 등신아.”

“어?”

나는 손을 흔들고 버스 좌석에 앉았다. 이선준이 창 밖에서 날 쳐다보고 있다. 아, 반대편 자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손바닥을 창에 붙였다. 입모양으로 말한다.

‘꺼져.’

이선준은 피식 웃더니 터미널 안으로 들어간다. 대전 가는 버스는 평일이라 그런지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옆에 누구 앉으면 불편하다. 아무도 없으면 편하게 잘 수도 있고 좋잖아. 나는 버스에서 잘 잔다. 사람도 별로 없고 쾌적하다. 집에는 아직 연락을 안 했다. 그냥 무서워서, 집 근처에 가서 연락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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