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199화 (199/224)

199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그래서 지금, 박헌영의 집 문앞에 서 있다.

-똑똑

그리고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

무턱대고 온 게 잘못이긴 하지만, 박헌영은 지금 전화도 받지 않는데다가 집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오늘은 설원의 집에서 자야하나.

그런 생각이 들 무렵, 불현듯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강렬한 기시감과 함께.

닫힌 문, 연락도 받지 않는 박헌영.

유사준 상병의 경우가 겹쳐 떠오른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괜찮아 보였는데, 그렇게 괜찮은 것처럼 보였는데.

아닐거야. 아닐거라 생각하면서 덜덜 떨며 설원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야, 박헌영 방 비밀번호 뭐였지?]

설원은 곧장 비밀번호를 내게 보내왔고, 나는 손끝을 떨며 비밀번호를 누른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없네....”

박헌영의 방은 비어있었다. 잠깐 어딜 나갔거나, 아니면 무슨 다른 일이라도 하는걸거다.

잔상처럼 뇌리에 박헌영이 목을 매달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내가 우스워진다.

다행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들었던 그 생각은 나를 그 무엇보다도 두렵게 만들었다. 전화를 몇 번 더 해봤지만 박헌영은 받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나는 박헌영의 방에 일단 대충 싸놓은 짐을 내려놓고 앉는다.

시각은 한밤중이었고,

박헌영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곧 돌아왔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박헌영이 현관에서 들어온다.

“어....”

무사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보다 더 먼저.

얼굴이 새빨갛게 부르튼데다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박헌영이 눈에 들어온다. 박헌영은 난데없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며 당황한다.

“어, 형이 여긴.... 왜....”

얼이 빠지니 언니가 아니라 형이라고 부른다.

“너 무슨 일 있었어?”

하지만 나는 천천히 일어나 박헌영에게 다가간다. 옷차림도 운동화에 청바지. 그리고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서 이렇게 우는건가 싶을 정도로, 박헌영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야, 너.... 왜 그래.”

“아, 아니.... 아니....”

나는 조심스럽게 열린 문을 닫고, 현관으로 들어와 우두커니 서 있는 박헌영의 어깨를 잡는다.

“왜 그래, 왜 울어. 무슨 일이야. 말해봐.”

내 우울함 같은 건 박헌영의 드문 눈물 앞에 싹 날아가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녀석이 우는거지? 박헌영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덜덜 떤다.

“아, 아니.... 아니 그. 그냥.... 차여서....”

“차였다고?”

“어, 어.... 으.... 설명하자면 좀 긴데....”

박헌영은 주저주저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평소의 마이페이스는 어디로 갔는지, 울음이 터져버리자 박헌영은 제 감정을 주체하질 못했다.

하지만 복잡할 건 없는 이야기였다.

박헌영은 사귄다는 사실을 숨기고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이 꼴이 되었다.

오늘, 그 TS바이러스 발작에 대해 여자친구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차였다.

간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당사자에겐 절대로 간단할 수 없는 이야기다.

방바닥에 앉아서 박헌영은 이를 악문 채, 분하다는 듯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뭔줄 알아?”

“......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질 알았어.”

“......무슨 소리야?”

“헤어지잔 말을 듣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질 않았다고. 분명히, 분명히.... 서럽고 열받고 화가 나는데. 아쉽질 않았어.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박헌영이 고개를 치켜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알지. 무슨 뜻인지 알지. 내가 무슨 말, 무슨 말 하는건지 알잖아.”

“.......”

그 두루뭉술한 질문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성적 자각에 대한 문제일거다.

“나, 속으로는 내심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계속 만나자고 하면 어떡하지. 나, 나.... 그런 상탠데. 그런 거 못 할 것 같은데. 웃기지 않아?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여자랑 그런 걸 하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질 않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질 않아. 이상해. 이상하지 않냐구.”

박헌영의 울음은 이별을 통보받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뭔가 비틀려버렸다는 걸 자각해서다. 나와 같은 이유다.

“흐흐흐.... 나를 그렇게 쉽게 차버릴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대해왔다는 것도 화나고, 그렇게 부당한 취급을 당하는데 오히려 안심하는 내가 더 화가 나. 이게.... 이게 뭐야 대체.... 걔가 날 그래도 좋으니까 만나자고 한다면, 걔랑 연애 하면서 불감증 걸린 사람처럼 만날거란 사실을 알아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해. 이런 게, 이런 게 어디있어....”

박헌영은 횡설수설하면서 계속 운다.

의지가 아니라 본능의 변화 때문에 더 이상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박헌영은 그저 차였기 때문에 이렇게 우는 건 아니다.

나도 그게 뭔지 안다.

신기하지.

이렇게나 드문 일인데, 아주 많은 사람들 중 단 몇몇만이 걸리는 질병인데.

너와 나는 같은 걸 앓고 있다.

나는 그게 뭔지 안다. 그래서 위로해줄 수 있다.

처참한 표정으로 우는 박헌영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이래도 될거라 생각하면서.

“나도 뭔지 잘 알아.”

“흑! 흐흑! 윽! 끄윽....”

“울어. 울어내버려.... 네가 말했잖아.”

“흑, 흐흑!”

“우린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한 사람에게만 벌을 주는 세상이 아니고, 그렇기에 우린 우리의 죄가 아니라 그저 불가항력적으로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박헌영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등을 두드려준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있다. 박헌영도 마찬가지로 나를 끌어안고 운다.

신기하지.

너나 나나 둘 다 남자였을 땐 이런 짓 같은 거 하지 않았는데. 울면 등을 두드려줬겠지 이렇게 끌어안아주진 않았을거다.

하지만 지금 나는 박헌영을 끌어안았고, 박헌영도 나를 끌어안았다. 박헌영은 서럽게 울면서 몸을 떤다. 나는 그 등을 계속, 계속 쓸어내린다.

여자가 된 나.

여자가 된 박헌영.

녀석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이 변해버려서, 그 사람에게서 나는 체취마저 변해버렸다.

이제 네 울음에선, 이름모를 꽃향기가 난다.

울 만큼 운 박헌영은 세수를 하고 나오더니 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누른다.

“눈 붓겠다.”

“이 와중에 그런 걸 신경쓰는거냐?”

“그럼 그런 걸 신경써야지.”

박헌영은 후련해졌다는 듯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아무도 없었으면 오늘 콱, 목을 매달아버렸을지도 모르겠어.”

박헌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 웃었고, 나는 그 말에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그나저나 왜 온거야? 설원한테 쫓겨났어?”

박헌영은 그렇게 말하고 내 표정을 보더니,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진짜로?”

“어.... 뭐 그런 셈이긴 한데.”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박헌영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 오늘부터 여기 살아도 돼?”

“문제는 없긴 한데.... 왜, 무슨 일인데.”

이번엔 자기가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듯, 박헌영에 내 앞에 바싹 붙어앉았다. 내가 좀 질린 것처럼 뒤로 물러나도 박헌영은 슬슬 다가왔다.

“왜, 왜 붙고 지랄이야. 부담스럽게.”

“뭐 어때, 아깐 끌어안고 부비부비까지 다 했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생각해보니까 궁금하네.”

내가 뭐라고 말하건 박헌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확실히 안 꼴리긴 하거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위아래로 훑으며 한 말이다. 시선이 확실히 기분나쁘다.

“그런데, 막. 응? 억지로 비비적거리면 그런 기분이 되지 못할 것도 없잖아? 한 번 실험해볼래?”

“진짜 좀!”

내가 버럭하자 박헌영은 뒤로 물러나면서 배시시 웃는다. 방금 전까진 아쉽질 않아서 울어놓고, 이제와선 한 번 실험을 해보니 뭐니 이상한 소릴 하다니.

박헌영은 정말 종잡을 수 없다.

“아쉽네. 그래 뭐, 얘기나 해봐. 왜 쫓겨났어?”

“하아....”

아무래도 박헌영과 같이 살면서, 설원과 살 때와는 다른 의미로 휘둘리게 될 것 같다.

나는 설원과 나눈 대화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박헌영에겐 어느 정도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것이고, 납득할만한 이유가 필요할거다.

“뭐야, 둘이서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끈적끈적한 상황까지 갔다 이거야?”

모든 설명을 들은 박헌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곤 ‘쳇, 이미 늦었나.’같은 의미불명의 말들을 주워섬겼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미리 알아서 조심하자 이런 수준인거야.”

“그런 얘길 진지하게 둘이서 나눈 시점에서 이미 뭔가 시작된거거든?”

“......시끄러.”

박헌영의 말에 진지하게 답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이 맞다는 걸 내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침울해져있자 박헌영은 냉장고를 뒤지더니 소주를 두 병 꺼내왔다.

“확실히, 그런 건 있어.”

“뭔데?”

“나는 이제 누드 에이프런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이거야.”

“또 무슨 미친 소릴 하려고?”

“요리 잘 해. 돈도 많아. 누드 에이프런까지 해줘. 나 같은 여자 세상에 어디 있겠냐?”

박헌영은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린 채, 득의만연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줄 설 녀석들 생각해보면 머리 아플 지경이네.”

박헌영은 냉장고에서 뭔갈 꺼내더니 뚝딱거리며 만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박헌영은 설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요리를 잘 한다.

우울하니까 술이나 마시잔 얘기겠지. 그리고 박헌영이 직접 요리를 해주겠다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다. 마침 저녁도 제대로 안 먹은 통해 배고픈 참이었다.

녀석은 콧노래까지 흥흥거리며 요리를 한다.

현모양처라는 말은 가부장제의 산물이지.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다만.

박헌영은 말 그대로, 현모양처의 모든 조건을 갖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조금 변태적인 걸 제외한다면 확실하게.

청소는 좀 하고 살았다면 더 완벽했겠다만, 그 정도는 충분히 봐줄 수 있는 부분이겠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시종일관 심각하고 사유에 골몰하는 나 같은 것보단 유쾌하고 이젠 발랄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게 분명한 박헌영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일거다.

물론,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해 아쉬운 건 아니지만 그저 객관적인 평가가 그럴 뿐이다.

“또 또 잡생각 하면서 땅 파고 있다. 그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박헌영이 내 침묵을 감지하고 그렇게 말한다.

“...남이사.”

“밥이나 먹고 술이나 먹고 잠이나 자자. 오늘부턴 내가 매일매일 꼭 안아줄게. 생각만해도 좋지?”

박헌영이 실실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젓는다.

“개소리 좀 그만 하지?”

“어머, 나 같은 미소녀가 꼭 안아주겠다고 하면 당장 줄 설 놈들이 한다스를 될건데 고맙게는 생각하지 못할망정.”

“그렇게 따지면 너나 나나 크게 다를 건 없거든?”

“호오, 지금 나와 미모를 견줘보겠다. 뭐, 이런 의미인 걸로 받아들여도 되는 부분?”

“그런 쓸데없는 걸 왜 해야 하는데?”

내가 너 같은 걸 끌어안고 자는 게 전혀 영광일리가 없겠다는 말일 뿐이잖아.

박헌영은 조잘거리면서도 훌륭하게 오믈렛을 만들어냈다. 배를 가르자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오믈렛은, 보는 것만으로도 환상적인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잘 먹을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언니는 칭찬에 너무 인색해.”

박헌영이 투덜거렸고, 나는 소주를 까 잔에 따르며 피식 웃는다.

“낯간지럽잖아.”

“나는 그런 간지러운 말 아주 좋아하거든?”

한 잔을 넘기면서 박헌영은 씨익 웃는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

그러니까 칭찬이건 비난이건 관심이건.

말해야만 알 수 있는거라고 박헌영이 덧붙인다.

[작품후기]이선준하고 박헌영이 TS바이러스의 비밀을 일찍 깨닫는 건 이게 외전이라서 이미 설명된 부분을 빨리 알아채게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같은 내용 그대로 죽 나오고 나중에 또 충격받고 이러면 그냥 설원 마크투잖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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