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나는 조금의 여지를 남겨둔다. 내 화법이 환멸스럽다. 설원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다.
하지만, 설원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 환멸하고 역겹게 생각할까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설원 또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네가 신경쓰여.”
그건,
무슨 의미인가.
내가 설원이 남자로 보이는 것처럼, 설원은 이미 나를 여자로 보고있다는건가?
친구가 아니라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뜻인가? 설원이 내게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침대에 앉는다.
“어쩌자는거야 그래서....”
나는 힘없이, 우울하게 중얼거린다.
“이런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설원을 바라본다. 설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나를 역겹거나,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슬픈 일을 예감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
죄책감과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 서린 표정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설원은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거야. 나도 네가 남자로 보이고, 너도 내가 신경쓰이는거면....”
그러면 친구로 남을 수 없다는 건 둘째치고, 이제 어쩌자는거야. 연애라도 하자 그런 말을 할 생각인가?
그런 걸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나가.”
“뭐?”
“나가라고.”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얼이 빠져버렸다.
“이렇게 같이 살다가 우리 사고치게 생겼어.”
태연한 얼굴로 설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건 나도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고, 너도 바라지 않는 일이잖아.”
술에 취해서, 술기운에, 아니면 홧김에.
넘으면 안 될 선을 넘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설원이 두 번의 연애 끝에 연애공포증 비슷한 것에 걸려버렸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연애라는 것을 두려워하다 못해 환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은 어찌되었건 연애는 하기 싫겠지.
그 상대가 누구라 한들.
“나도 자꾸 신경쓰이고, 너도 자꾸 신경쓰이는거잖아. 맞지?”
애초에 이 대화는 이상하다.
우린 서로에게 호감 엇비슷한 것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사실상, 나와 설원이 서로에게 그 미묘한 감정들을 고백해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미 늦은거잖아. 하지만 나도 설원의 그 난데없는 말이 무엇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하는지 잘 알고 있다.
서로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
“그러니까, 더 신경쓰이기 전에 나가. 박헌영네 집에서 살아.”
사람이 다 철인일수는 없다. 설원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와 더 오랫동안 함께 사는 걸 원하지 않고, 나도 그 설원의 말이 맞다는 걸 안다.
설원과 함께 있으면 내가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걸 자꾸만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의지하려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갖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설원은 나를 바라보면서 웃는다.
그 웃음은 어쩐지, 울음을 참지 못해 억지로 지어보이는 것 같은 웃음이다.
“네가 무서워하는만큼, 나도 많이 무서워.”
우리의 관계가 비틀려버리는 걸 두려워한다.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설원도 정상이 아니다.
녀석은 좋아하는 걸, 사랑하는 걸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기에 상처를 주게 되는 자기 자신을 안다.
그러느니 사랑해도 서로 연인이 되어버리는 걸 못 하게 되어버린 녀석이다.
“지금 이 상황이, 너하고 내가 서로 좋아한다고 말한거랑 뭐가 다른데?”
둘 다 정신나간 소릴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이 상황이다.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니잖아. 그럴지도 모르니까 조심하자는거지.”
그러니까 그게 일단 말이 되는거냐고.
서로 좋아하면 그냥 좋아하면 되는건데.
나도 그게 무섭고, 설원도 그걸 무서워한다. 우린 둘 다, 이상한 이유로 서로를 좋아하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다.
나는 내가 여자가 되어버린 걸 인정하는 게 싫어서. 나를 잠식한 바이러스에 패배하는 게 싫어서.
설원은 연애가 끝났을 때 느끼게 될 처참하고 더러운 박탈감을 느끼기 싫어서.
너나 나나 정상적인 사람의 범주에서는 너무 많이 엇나가있다.
하지만 너와 나 사이에서는, 네 말대로 하는 게 정상적인거겠지.
나도 많이 무섭다.
나는 아직 유사준의 자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게 아니다.
나와의 섹스 이후에 대체 뭘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걸 내가 깨닫는 게 무서워.
그리고 그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내가 설원이라는 인간에게 끌리는건지, 아니면 단순히 설원이 내 곁에 있는 남자라서 끌리는건지 아는 게 두렵다.
나는 그래서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결국 설원은 놀자고 했지만, 노는 게 아니라 이상한 대화 끝에 내가 설원의 집을 나가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설원도 그것이 썩 유쾌하진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언젠가 하려던 말이었을거다.
“그런데 이거, 그냥 물어보는건데.”
그냥 물어보는 건 아니지만 그냥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내가 그.... 저 옷 입은거랑 상관있어?”
내가 가리킨 건 오늘 박헌영이 사 준 옷이자 내가 입었던 자줏빛 원피스다. 지금은 벗어놓고 옷걸이에 걸어뒀다.
내가 계속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니다가 제대로 된 옷을 입은 것과 굳이 오늘 네가 이런 말을 꺼낸 게 상관이 있냐는 물음이다.
“...없다고는 못하지.”
설원은 떨떠름한 표정이지만, 또 굳이 부정은 않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새삼스럽게 내가 그런 옷 입은 거 보고 뭐 설레기라도 했다 이거야?”
나는 따지듯 묻는다. 옷차림 따위에 현혹되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묘하게 충격이다. 그러면 차라리 오늘 한껏 차려입은 박헌영 쪽이 설원의 마음을 흔들기에 제격이었을거다.
하지만 박헌영이 아니라 왜 나지?
“아니. 설렌 건 아니야.”
설원은 그 말만큼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면 뭔데?”
설원은 주저하면서, 자기 자신도 힘겹게 웃었다.
“그냥, 네가 엄청, 엄청 작아졌다는 게 실감이 나서....”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덜덜 떠는데, 그 모습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옷을 입은 내 모습에 현혹된 게 아니다.
그런 옷을 입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떨고 있는 내 모습을 본거다. 내가 작아졌고, 그런 나를 견디지 못해 두려워하고 겁먹은 모습을 말하는거다.
그 모습이 네게 어떻게 다가왔던걸까.
“가만히 놔둘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자꾸 들었어.”
제 스스로 나에 대한 연민을 견디지 못해서, 자꾸만 무슨 마음이건 들어버렸을 것이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분명히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있건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설원의 목소리에 진한 슬픔이 섞인다. 내 이 변화를 설원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
“그랬던 이선준이 겨우 원피스 하나 입었다고 겁먹은 짐승처럼 떨고 있는 걸, 나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어.”
“......미안하네, 그렇게 되어버려서.”
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동정하면 너는 그걸 싫어하겠지. 그런 눈으로 보는 것도, 그런 마음 때문에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것도 싫어할거야.”
“그래, 지금 네 말 듣는 것도 엄청 괴롭고 짜증나.”
나는 더 움츠러든다.
설원은 내게 설렌 게 아니다.
고작 원피스 따윌 입은 것 때문에 세상이 두렵다는 듯 행동하는 나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연민을 내게서 느꼈다.
그리고 그 연민 섞인 마음을 스스로 참지 못해서, 나를 붙잡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거다.
자기도 뭘 원하는지 모르면서, 그저 내가 불안해서 내게 가까이 오고 싶었다는 그런 감정. 나는 그런 감정을 이젠 모르지만 설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당장에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사람이 있으면, 백이면 백 그 사람의 손을 잡아줄거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설원은 그 누구보다 잘 알거다.
설원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 이유가 사랑이나 호감이라도 싫겠지만 연민이라면 더더욱 싫어할 나를 설원은 잘 알고 있다.
나는 설원을 보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아름다움에 유혹당한 게 아니라, 내 불안정함과 두려움 때문에 내가 신경쓰인다는 말은 나를 비참하게 한다.
그래, 그런거였어.
너는 나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게 아니야.
네가 나를 신경쓰는 건, 예전과는 달라진 내가 위태로워보이기 때문이야. 내가 무너질까봐. 내가 부서질까봐 걱정되는거야.
그리고 그 걱정 때문에, 사랑이 아닌 감정 때문에 너는 언젠가 내 손을 잡아버릴지도 모르고, 끌어안아버릴지도 모르지. 내가 그토록 위태로워 보인다면.
그런다면 사랑이 아닌 감정 때문에 너는 내게 실수할지도 모른다.
연민과 동정은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의 위로, 혹은 육체적인 위로를 네게 원하면, 너는 그 동정과 연민 때문에 나를 받아들여버릴지도 몰라.
그래서 설원은 자신이 그런 실수를 하기 전에 나에게서 멀어지려는거다. 최소한 다른 곳에서 살자고 말하는거다.
설원은 내가 여자로 보인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신경쓰인다고 했을 뿐이다.
설원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
그래서 다행이지만.
어쩐지, 그것을 온전히 기껍게 여기지만은 않는 나를 발견하곤.
“차라리 설렜다고 하지.”
그러면 차라리 덜 비참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