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어....”
나도, 설원도, 박헌영도.
서혜인의 뜨악한 시선 앞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서혜인은 자기가 잘못 본건가 싶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슥 훑었다.
내 얼굴을 잊진 않았을거고, 설원도 분명히 알아봤을 것이다.
“그.... 선준오빠.... 맞죠?”
“어, 어....”
원피스에 단화, 분명히 이럴 수 있다. 이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 줄은 몰랐다는 시선 앞에서 무참해진다. 그리고 옆에 하나 더 붙은 금발벽안의 박헌영을 보면서, 이건 또 누구인가 싶은 시선까지 더해진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은 오히려 서혜인이 아니라 이 쪽에서 시작되었다.
“나 박헌영이야.”
박헌영이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서혜인에게 인사한다.
“네, 네? 네? 그, 그게 무슨...?”
“박헌영이라고, TS바이러스 발작 때문에 이렇게 됐어. 아직 다들 모르지?”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박헌영은 말도 안 된다 싶을 정도로 태연하게 설명했다. 대학가에서 있었던 자살소란, 그리고 그 때 실려갔던 게 나라고 박헌영은 태연하게 말한다.
하이힐에 치마 차림으로 아주 당당하게도 말한다. 서혜인은 이게 무슨 못된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잘 부탁해. 애들한테 소문도 좀 내주고, 내 입으로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박헌영은 구김살 없는 환한 미소로 서혜인을 바라본다. 박헌영이 내민 손을 서혜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잡는다. 서혜인도 황당하겠지만 더더욱 황당한 건 설원과 나였다.
악수를 한 박헌영은 은근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깐 채 말한다.
“그리고, 혹시 나중에 곤란한 고민 생겼을 때 좀 물어봐도 되냐?”
“그, 그! 고, 곤란한 거라고 하시면....”
“그걸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도와줄거지?”
서혜인은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후려치기라도 당한 양 고개를 끄덕인다.
“네, 네.... 연락하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정도는 얼마든지....”
“고마워! 너라면 도와줄 줄 알았어!”
박헌영은 뛸듯이 기뻐하며 서혜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뭐해? 가자!”
그리고 박헌영은 나와 설원을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느 새 하이힐이 익숙해졌는지 걷는 모습이 그리 불편해보이지도 않는다. 서혜인이 얼마나 얼빵한 표정을 짓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볼만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야, 너. 뭐 그렇게 스스럼없이 말하냐.”
설원의 말에 박헌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죄 지었냐? 그런 것도 아닌데 뭐하러 쫄아?”
괜찮은 척일지도 모르겠지만, 박헌영을 보면서 느낀다. 저 정도면 괜찮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아 보인다.
그리고 내가 곤란해하는 걸 보다못해 자기가 알아서 나선거란 사실도 알고 있다.
아,
정말이지.
병신같지만 멋있다는 말은 박헌영을 위해 존재하는구나.
그런 걸 깨닫는다.
분명히 죄 지은 건 아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도 없다. 수치스러워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박헌영이 대단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박헌영은 그 날 집에 돌아갔고, 나와 설원도 자취방에 돌아왔다.
그리고 박헌영은 내게 국정원 직원을 만났다는 얘기를 했다.
[언니도 국정원에서 찾아왔어?] - 박헌영
이제 박헌영에게 굳이 호칭을 바꾸란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 녀석이 바뀌는 건 지난한 일이 될듯하니, 그저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 포기하자, 언젠가는 적응이 될거다.
그나저나 빠르네, 나는 아직인데 박헌영에겐 벌써 찾아왔다니. 아마 자취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겠지.
[아니 나는 아직, 엄밀하게 따지자면 아직 군인 신분이니까.]
[그래? 막, 신분세탁 해준다고 하던데.] - 박헌영
[뭐라고 말했어?]
[됐다고 했지 뭐. 엄청 힘들거라고 겁주긴 하는데.... 뭐, 어떻게든 알아서 되겠지.] - 박헌영
그래도 국정원에서 이런 걸 신경써주는 게 의외고 신기하다고 박헌영은 주절주절 말했다.
[언니는 만약에 국정원에서 오면 어떻게 할거야?] - 박헌영
[거절하려고 생각 중이야.]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
박헌영이 있으니까 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헌영은 잘 생각했다고도, 그게 낫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잘 될거야.] - 박헌영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메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야지.]
잘 될거다. 그 말을 곱씹는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하게 있어?”
책상에 앉아 책을 보던 설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안 심각한데?”
“엄청 심각해 보이는데?”
“보기에만 그런거야.”
“보기에 그런거면 실제로도 그런거야.”
이건 또 무슨 말놀음인가. 굳이 내가 걱정되어서 이렇게 묻는 게 아니라, 설원의 표정을 보아하니 왜 개소릴 하는지 알 것 같다.
“너 심심하지.”
“어떻게 알았냐? 책 존나 재미없어. 유럽계 작가놈들이 상 받았다 뭐다 하는 건 전부 소설을 얼마나 재미없게 썼는가에 대한 포상일거야.”
“자랑이다 임마.”
설원은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테이블에 휙 던지며 하품을 한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한다.
“놀아줘.”
“왜 이래?”
징그럽게시리.
“박헌영이 그 꼴이 되었다고 이제 네가 박헌영 포지션을 가져가려는거냐?”
“...무슨 오해를 하는건지 모르겠는데 박헌영의 포지션은 강화되면 강화됐지 바뀌진 않았어.”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확실히 박헌영은 그 외양을 가짐으로 인해 자신의 변태적인 면모를 더 강하게 어필하면 어필했지 그 반대가 되진 않았다.
그래도 설원의 눈빛.
뭔가 부담스러워.
“놀면.... 뭐 하고 놀건데?”
그렇게 말해놓고도 내 말이 뭔가 이상하다. 노는 건 그냥 놀자는 말 없이 노닥거리면 그게 노는거다. 술을 마시건 노래방을 가건 뭘 하건 말이지. 그런데 난데없이 그냥 놀자고 하면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설원은 남자고 나는 여자다.
남자랑 여자가, 이런 좁은 원룸 안에서 놀 수 있는 거라고 하면.
“...뭐야, 얼굴이 왜 빨개져?”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냐.”
“존나, 이상한 생각을 한 표정인데?”
“뭐, 뭐가! 내, 내,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그래!”
내가 미쳤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한거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면 방금 생각한 것이야말로 중범죄다.
“지금 온몸으로 나 지금 이상한 생각 했다고 보여주고 있잖아?”
“아니라고! 이, 이상한 생각은 무슨! 미친.”
“설마 진짜냐?”
설원이 갑자기 정색하며 물어온다. 표정이 굳어버린 설원이 내게 그렇게 물어오자 나도 얼어붙어버린다.
화난건가?
그런 생각을 해버려서?
“아니, 나도. 나도 모르게.... 그냥.... 아니, 이걸 왜 캐묻고 지랄이야....”
묻지 말라고.
이런 걸 캐내버리면, 말로 해버리면 뭔가 이상해져버리잖아. 적당히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설원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고 조용히 말한다.
“미안....”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원쪽도 아니고 내 쪽에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버렸으니까. 그리고 그걸 들켜버렸으니까.
“내가 남자로 보여?”
하지만 설원은 캐물어야만 하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집요하게 물어온다.
왜 그러는건데?
그 물음 속에서 어떤 해답을 찾고 싶어서 그런 걸 묻는건데?
“그럼 여자로 보이겠냐?”
“짜증나네,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설원의 태도는 심상찮다. 이건 장난으로 물어오는 게 아니다. 직설적으로 물어오는거다.
내가 이성으로 보이냐고. 설원은 내가 말을 계속 돌리고 대답을 회피하면 화를 낼거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왜 그러는데, 나는. 그냥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든거고 그런 생각을 한 게 나 스스로도 쪽팔려서.... 그런거야....”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잖아.”
내가 남자로 보이느냐.
당연히 남자로 보인다는 식의 말장난은 통하지 않는다. 설원은 내가 이성으로 보이냐 묻는 것이다. 변해가는 관계에 민감한 건 나뿐만이 아니다.
설원도 그걸 계속 신경쓰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사실대로 말할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고 싶다.
“나도, 나도 생각을 좀.... 해볼게. 잠깐만.”
설원은 알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본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본능이 바뀐 걸 직시한 순간부터 나는 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앞으로 더 먼 미래를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가 곧,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설원을 사랑하게 될거란 사실을 안다.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두 명이 박헌영과 설원이었고, 설원에게 더 많은 부분을 기대고 말하고 이야기했다는 걸 알고 있다.
박헌영은 여자가 되었고, 박헌영을 사랑하게 될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안다.
설원은 나를 신경쓴다.
설원은 나를 살펴본다.
설원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설원은 내 고민을 함께 고민해준다.
설원은 나와 항상 같이있다.
설원은 나를 계속 지켜본다.
설원은 나보다 더 나에 대해서 생각해준다.
내가 남자일 때라면 몰라도, 나는 TS바이러스라는 것에 내 성애의 방향마저 비틀려버렸다. 이 와중에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 항상 함께 있고,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난다.
항상 밥을 같이 먹고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인데.
그리고 나는 남자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내가 설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내가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불가능해.
나는 세상이 두려워졌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병적으로 신경쓰게 되어버렸다. 그런 내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는데.
사랑이 아니더라도, 집착하게 될거란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설원의 말에 생각을 해보니 알게 되어버렸다.
친구로 남는 건 지금은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리라는 걸.
“지금은 아니지만.”
나는 설원을 바라보지 못한다.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모욕적이라서. 나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서.
자조적으로 고백한다.
“그렇게 될 것 같아.”
될 것 같아가 아니라 그렇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나는 조금의 여지를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