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결국 박헌영도 어마어마하게 옷을 사는 한편, 나도 박헌영의 지랄을 못 이겨 옷을 몇 벌 더 샀다. 투피스 한 벌에 나머지는 청바지와 니트를 몇 벌 더 샀다.
내가 고른 니트를 보며 박헌영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의실종이라니, 아직 나조차도 각오하지 못한건데 그건.”
“바지 입고 입을거야 미친놈아! 누가 그런대?”
“하의실종이 아닌 상태에서 입는 니트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지?”
“...이건 명백하게 상의라고.”
조금 자락이 길긴 하겠지만 애초에 이건 그러라고 입는 옷이 아니다. 원피스로 고를거였다면 방금 전 산 그것처럼 밑단이 조금 더 긴 걸 골랐을거다.
“그러니까 그 상의만 입는 게 하의실종인거잖아 이 꼴알못아.”
박헌영이 경멸스런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꼴알못은 또 무슨 개소리야?”
“그건 꼴리는 포인트를....”
“닥쳐. 물어봐서 미안하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변태인 건 저 모양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을 모양이기에, 포기해버렸다.
박헌영은 내게 구두도 신어보라 했지만 나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굉장히 실용적인 측면에서 신고싶지 않아.”
박헌영이 어기적거리며 하이힐을 신는 꼴을 보아하니 나도 저렇게 될 것 같아서 그다지 신고싶지 않다. 굽이 낮은 거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나는 결국 단화를 두 켤레 샀다. 언제고 운동화만 신을수는 없고 단화라면 크게 튀지도 않을테니까.
결국 길고긴 쇼핑을 끝내고 나서야 우리는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었다. 박헌영은 택배물 받을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집 옷장 정리부터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까 예전 옷은 다 못입겠네.”
“내다버려야지 뭐. 너 줄까?”
박헌영이 묻자 설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코트랑 야상 몇 개 골라갈게.”
“신발은?”
“신발이야 뭐, 너 부츠 꽤 있지 않냐?”
“어, 그거 좀 가져가.”
설원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박헌영이 은근한 눈빛으로 설원을 흘겨봤다.
“이야 이거 설원, 친구가 이 꼴이 되어서 이득이 아주 장난이 아닌걸.”
“...무슨 이득이야 대체?”
“옷 생겼지. 신발 생겼지. 이게 이득이 아니면 뭐냐? 팬티도 줄까?”
“...필요없어. 그리고, 미친 새끼야....”
설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박헌영에게 낮게 중얼거렸다.
“그 꼴로 지금 네가 나한테 팬티를 준다고 하면, 내가 상당히 이상한 새끼로 오해받을거란 생각은 안 하냐?”
그건 그러네.
금발에 푸른 눈의 아리따운 여성이 남자에게 내 팬티 줄까? 라고 말하는 광경, 생각해보니까 엄청 이상해.
박헌영이나 설원이나 둘 다 변태고, 나도 크게 다를 것 없어보인다. 박헌영은 실실 웃는다.
“흐응.... 왜 오해라고 생각하는거지?”
“뭐?”
“‘예전 팬티’를 준다고 말하진 않았는데?”
그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밖에 없기에, 나나 설원 모두 떫은 표정이 된다. 박헌영은 예전에도 큰 문제였지만, 이 모습으로 변하고 나서 한결같이 미친소리를 하는 게 문제다.
아니, 한결같지도 않다.
거의 육탄공세 수준의 저질 농담을 하는 게 추가됐다. 그리고 그건 알맹이가 박헌영이 아니라는 전제만 있다면 상당한 유효타라는 게 중요하다.
“좀, 닥쳐.”
설원이 제정신 박힌 놈이라는 것에 안도하자.
“오늘 깨달은 중대한 사실은 그거야.”
박헌영은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물며 중얼거린다.
“꼴리지 않아도, 예쁘면 그거대로 아주 행복한 기분이 든다는 거.”
박헌영은 좋은 게 좋은거지라고 중얼거리며 햄버거를 맛있게 먹었다. 이젠 코스프레도 남의 거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할 수 있겠네라며 혼자 뭔갈 상상하는지 쳐다보기도 싫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굳이 글 안 써도 되겠어. 스트리머 같은 거 해도 되겠네....”
멍한 표정으로 코스프레 방송이나 해볼까 하며 중얼거리는 박헌영은 그걸 진짜로 실행해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도, 사생팬 같은 거 생기면 무섭겠지?”
“...무서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인 거 아니냐.”
설원이 이번에는 진지하게 답한다.
확실히 그런 인터넷방송같은 걸 하면 잘 안 될거라 생각하기 어렵다. 속된말로 얼굴 예쁘고 똘끼도 충분하니까 안될리가 없을거다.
“맞아. 그런 건 좀 싫다 그치?”
“...왜 날 보고 말하냐.”
나는 그런 거 할 생각 요만큼도 없다.
“그럼 그건 나중에 폭삭 망해서 뒤가 없을 때에나 고려해보는 걸로 해야지.”
나중에 스트리머가 된 박헌영의 인터넷 방송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먹던 게 얹힐 것 같은 기분이다.
당연히, 내가 그걸 하게 되는 건 더더욱 상상할 수 없고.
“언니도 충분히 가능성 있잖아. 어때?”
“언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 말하냐? 그리고 나는 애교 같은 건 부릴 줄도 모르고 게임은 잘 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아.”
“뭘 모르네, 못 하는 것도 컨텐츠야.”
“...무슨 소리야 그건?”
“말 그대로, 못 하는 걸 보려고 보는 사람도 있다고.”
“...그거 참 슬픈 광경이겠구만.”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즐기지 않는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알지 못하고 궁금하지도 않다. 지금 당장 내가 속한 세계에서도 할 일이 많고 얼마나 벅찬데.
소설가 지망생에서 프로 스트리머라니.
웃기는 소리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백화점에서 나올 때, 당연하게도 나는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기에 니트 원피스에 검은 레깅스, 그리고 단화 차림이었다.
박헌영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이힐에 원피스, 블레이저 재킷 차림이었다.
확실히 시선이 집중되는 게 피부에 와닿을 정도다. 나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박헌영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박헌영은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튀는 외모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건 불공평해.”
박헌영이 설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불공평한데?”
“누가봐도 너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새끼잖아?”
가운데에 설원, 그리고 양옆에 나와 박헌영. 누가봐도 설원은 한 명도 보기 힘든 사람 둘을 양옆에 두고 걷고 있다.
물론 그 말에 설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야 또?”
“뭐라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이 구도, 너한테만 이득이잖아. 쳇, 재수없는 새끼.”
박헌영이 경멸스럽단 표정으로 설원을 바라본다.
“재수없을 건 뭔데?”
“나는, 네가 지금 존나 부럽다고. 새끼야.”
“미친, 부럽긴 또 뭐가 부러운데?”
“내가 아니라 네가 TS됐으면 지금 네가 받는 시선은 내가 받았을거잖아! 부러워! 부러워 죽겠어! 설원이라는 인간을 알게 된 이후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지금 이 순간 네가 부러워서 미치겠다!”
“적당히 해 새끼야.”
-딱!
“악!”
결국 박헌영은 설원에게 꿀밤을 얻어맞은 뒤에야 씩씩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웃기는 소리다.
설원에게 향할 시선이 부럽다니, 박헌영은 오늘따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계속 주워섬긴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문득 깨달았다.
“야.... 잠깐.”
“왜?”
“아는 사람 만나면 어떡하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걸 보인다면, 일단 박헌영이야 사람들이 모른다 쳐도 나는 아니다.
내가 이 모습이 되었다는 걸 일단 과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원피스 차림에 이렇듯 여성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모습을 보인다면?
나도 모르게 입술이 달달 떨린다.
쪽팔려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남자인 채로 여장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인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기분을 느낄거란 생각이 든다.
설원이 천천히 고갤 끄덕인다.
“그래.... 뭐, 곤란할 수도 있겠....”
“그게 뭐 어쨌다고?”
하지만 설원의 말을 박헌영이 잘라내며 치고들어온다.
“보라고 해. 뭐 어때?”
박헌영은 참.
박헌영답다고 할 수밖에 없다.
녀석은 아무 걱정 말라는 듯 나를 보며 웃는다.
“만약 누가 나쁘게 말하거나 나쁘게 본다면, 그건 그 사람들 잘못이지 언니 잘못은 아냐.”
그건 맞는 말이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내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니건 나를 나쁘게 볼 권리는 그들에게 없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설원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힘들겠지만, 못난 놈들 시선에 하나하나 맞춰가며 살지 말자.”
그 말에 나는 멍하니 설원, 그리고 박헌영을 바라본다.
나대로 산다는 것.
그건 사실 박헌영이 제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박헌영은 변하기 무섭게 예쁜 옷을 사고, 그에 적응하려 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야말로 박헌영은 내가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고 살지 않는 게 맞겠지. 하지만 타인이라는 걸 배제하고 살아갈수는 없는거다.
배제하곤 삶을 견디기 힘들 것 같다 생각하는 너희 둘도 결국 타인이다. 그러니 타인을 신경쓰고 살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은 타인에게 위로받기도 한다.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일단 둘째치고, 가장 명확한 사실이 있다.
“그래야지.”
지금의 나는, 이렇게 차려입은 나는.
아주 예쁘다.
그러니 내게 환멸 섞인 시선이 올지는 몰라도, 이런 나를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거라 자신한다.
내 아름다움을 질시하거나 역겨워할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하는거지 내가 객관적으로 역겨운 건 아니다.
그 반대에 더 가깝다.
쉽게 생각하자.
물론, 대학가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서혜인을 마주했을 때에는 쉽게 생각하자는 그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후기]예전 팬티를 준다고 하지는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