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박헌영은 대단했다.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속옷을 사고 입는데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건 둘째치고, 원피스를 시착해보곤 나와 설원을 보며 묻는다.
“흠, 잘 어울리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욘 없겠어.”
박헌영은 전신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곤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질문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잘 어울리니까.”
박헌영은 좋아 죽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곤 다른 옷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언니도 몇 개 사지 그래? 내가 사줄 수 있어.”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박헌영은 날 보며 눈을 찡긋해보인다.
“물론, 바지 말고 치마만.”
“언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박헌영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시착해볼 다른 옷을 들고 탈의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확실히, 잘 어울리긴 하네.”
설원은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더 역겨운거야.”
내 말이 맞다는 듯 설원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린다는 말이 새삼 필요치 않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박헌영이라는 걸 알기에 다만 그 꼴을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헌영에게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내게도 다르진 않을거다. 하지만 박헌영이 입는 원피스란 결국 노출도니 뭐니를 떠나서 내가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받아들이고, 그런 옷을 입고, 나 예쁘냐고 묻는듯한 시선을 줄 수 있는거지.
박헌영의 신경줄이 어떻게 되어먹은건지는 예전부터 미스터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 실시간으로 더더욱 미스터리가 되어가고 있다.
“전부 주세요.”
박헌영은 투피스에 원피스를 비롯해 수많은 옷가지들을 결재한 뒤, 들고갈 여력이 안 될 것 같으니 택배로 부쳐달란 말을 가게마다 남겨뒀다.
난데없이 횡재를 한 브랜드 의류점 점원들은 화색이 만연했다. 박헌영은 구두를 비롯해 스타킹까지, 말 그대로 한 명의 여성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쓸어담았다.
“구경만 하는거 지루하지 않아?”
“지루하진 않아.”
설원이 말했고.
“감당하기 힘들 뿐이지.”
내가 받았다.
박헌영은 지금 상아색 쉬폰 원피스에 회색 롱블레이저 재킷을 걸치고, 재색 하이힐을 신은데다가 커피색 스타킹까지 신고 있었다.
물론, 하이힐을 신어본 적 있을리가 없으니 박헌영은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왜 안 익숙한 걸 억지로 신고 다니는거냐....”
내 말에 박헌영은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는 꼴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으며 말했다.
“익숙해져야지. 당연한거 아냐?”
그 말에 나는 마음에 뭔가 무거운 게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익숙해져야한다라.
너는 그걸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거냐?
물론 익숙해져야 하겠지. 그러는 편이 무조건적으로 나을거고, 하지만 손바닥 뒤집듯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헌영의 말이 맞지만, 나는 능동적으로 익숙해지려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렇게 하는 방식으로 익숙해지려 하고 있다.
완전히 정 반대의 포지션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차라리 박헌영처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어기적거리고 있지만 하이힐을 신고, 제대로 걸어보려 하는 박헌영.
운동화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그저 살던대로 살아가려는 나.
아주 간단하지만 극명한 차이다.
시도하는 박헌영.
시도하지 않는 나.
진취적인 인간이라며 스스로를 세뇌하고 살아왔던 순간들이 새삼 무참해진다.
나는 폐쇄적이며 보수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
박헌영의 우스운 걸음걸이를 비웃었던 내가 갑자기 초라해진다.
박헌영이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다.
저 녀석은 이렇게 되자마자 뭔갈 하려고, 적응하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주변에 대고 변하지 말라고 계속 소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주변이 변하는 걸 감각하며 주변을 감쌀 껍질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들은 어떻게 이런 걸 지금까지 신고다닌거지?”
박헌영은 투덜거리면서도 점점 걷는 것에 적응해나간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건, 신기하게 쳐다보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애초에 파격적이다 못해 범죄적인 소설을 수업시간에 들고나왔을 때부터 박헌영이 보통 낯두꺼운 인간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된다.
박헌영은 낯이 두꺼운 게 아니다.
자신이 하는 일과 모든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는거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자기 스스로 잘 알고 있는거다.
나 스스로 부끄러운 인간이 아니라면, 내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감출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범죄적인 소설을 썼지만, 박헌영이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다.
그런 단순한 사실이 있는 한 자신은 잘못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변해버렸지만,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나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수치심을 느낄 필요도 없고, 어기적거리며 걸어도 그 어기적거림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는거다.
나는 어땠지.
타인의 모든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생각하면서.
아,
힘들어.
괴로워.
그런 말만 계속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를 나아지게 하지 않는 자기혐오와 고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혐오한다는 생각에 빠져서. 변해야만 하는데 변하지 않고, 변하는 것들을 미워하기만 하고 있었다.
“왜 멍때려?”
설원이 나를 툭 친다. 박헌영을 보면서, 그저 비웃고 얼떨떨하게 생각하고 있던 내 자신을 깨달았다.
박헌영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평범한 수준조차 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삶을 대하고 있었다.
주변 탓을 하면서, 변하지도 않은 채 그저 남자로 살겠다고 떼를 쓸 뿐이었다.
겨우 치마 따윌 입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남자로 살 수 있는게 아니다.
구두를 신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인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치마 따윌 입는다고 해서 내가 온전한 여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변해야만 한다.
여자가 된 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이 있다. 내 남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내 여성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지금의 나로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죽어가고 사라져가는 내 남성성을 붙들어놓을 수 있다.
“나도 입어볼래.”
“뭐?”
“뭐, 뭐엇!”
그리고 그 말에, 설원이 놀란 건 물론이고, 박헌영은 발을 삐끗하더니 그대로 자빠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탈의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그 결정을 후회했다.
안돼.
이런 게 가능할리가 없어.
내가 이런 걸 입을 수 있을리가 없어.
자줏빛 롱 니트 원피스를 눈앞에 두고, 나는 무참해져버렸다. 이걸 입으면 당연히 아래가 시원할거고, 그 시원함을 견뎌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추울 것 같아서가 문제가 아니다.
그 허전함을 감내하는 게 내게 가능한 일이란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박헌영은 같이 입으라며 어디서 사왔는지 검은색 레깅스까지 내게 준 참이었다.
레깅스를 입고, 그 위에 니트 원피스를 입는다.
그만큼이나 간단한 말이 없겠지만 내게 그 말은 지금 불가능을 조금 길게 늘여놓은 말처럼 여겨진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
나가자, 나가서 그냥, 아직 시즌은 아니겠지만 반바지 같은 거나 입어보자. 치마는 조금 더 나중에 준비가 되면....
“내가 재미있는 거 알려줄까?”
밖에서 박헌영의 말이 들려온다.
“뭐가 재미있는데?”
“지금 안절부절 못하는거 안 봐도 훤하거든?”
“...그게 왜?”
“이미 결제했어.”
“뭐, 뭐라고?”
“샀으니까 빠꾸 없다.”
-찌익!
그리고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방금 영수증도 찢었고.”
“미, 미친! 뭐라는거야!”
내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박헌영은 몰래 옷을 결제해버렸고, 심지어 영수증까지 찢어버렸다.
“그러니까 내 성의를 봐서라도 입고 나오지 않으면 상당히 서운할거야.”
미친놈.
말도 안 돼.
나한테 그렇게까지 이런 옷을 입히고 싶은거냐 너는?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물론, 박헌영에게 입으라고 줘버릴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내게 이렇게까지 했는데, 내가 그렇게 한다면 진짜로 실망할거다.
결국 저 녀석도 제 나름대로 나를 걱정해주는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내가 먼저 입겠다고 했는데, 이제와서 못 입겠다고 하는것도 머저리같은 짓이다.
눈 한번 딱 감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
검은색 레깅스에 자주색 니트 원피스.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인데다가 레깅스까지 입고 있으니 민망한 곳이 보일만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탈의실 바깥으로 나갔을 때에는 정말, 부끄러워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
설원과 박헌영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왜 아무말도 안하냐.”
“진짜로 입고 나올 줄은 몰랐거든.”
“...나도.”
박헌영이 얼빠진 표정으로 말하고 설원도 크게 다를 건 없다.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뻣뻣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아래가 허전하고 뭐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아래보다 상체가 더 허전하다. 원피스라서 그런거겠지. 전신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있고, 정말 ‘이대로 괜찮은건가?’라는 문장을 얼굴에 써놓은 것 같은 표정의 내가 거울 안에 있다.
이제 나는 이런 얼굴이고, 과거의 얼굴은 다신 볼 수 없을거란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표정이 어떻건, 내 기분이 어떻건.
내게 이 옷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에는 두 말할 여지가 없다. 확실히 트레이닝복은 그저 옷이 없으니까 입고다닌거지 잘 어울리니 뭐니란 말을 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저 원피스 하나에 레깅스를 입었을 뿐인데. 확실히 달라졌다.
“잘 어울려.”
박헌영이 내 팔짱을 끼며 내게 말한다.
“지, 징그러 미친놈아....”
내가 팔을 슬쩍 빼려 하자 박헌영이 내 팔을 더욱 세게 끌어안는다. 미묘한 감촉, 이젠 별로 좋지도 않지만 그것이 박헌영의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섬찟하다.
“잘 어울린다고.”
하지만 내가 어떤 반응이건 박헌영은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럼 된거야.”
박헌영의 그 말에 할 말을 잊는다.
잘 어울린다.
그거면 충분하다. 다른 그 어떤 고뇌나 생각도 필요하지 않다. 여자다운 건 뭐고 남자다운 건 뭐냐.
잘 어울린다. 예쁘다. 그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모습인걸로 충분하다.
말은 쉽지.
별 생각이 다 들 수밖에 없어.
지금 내 꼴은 분명히 그래. 잘 어울린다는 말로 설명 가능한 수준이 아니야.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모습의 여자를 봤다고 생각하면.
분명히 첫눈에 반해버렸을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쩐지. 왕따당하는 기분인데.”
설원이 나와 박헌영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말에 박헌영은 설원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너도 이렇게 되면 된다니까? 같이 여탕 한 번 가보는거야!”
“크게 말하지 마 미친놈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기에 나는 박헌영의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설원은 또 무슨 개소리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게 점원들은 우리가 무슨 미친소릴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쪽팔리지만.
박헌영 같은 미친놈과 친구라는 게 제일 쪽팔리다.
그래서 이런 복장을 한 쪽팔림은 어느 정도, 무마되었다.
[작품후기]이선준의 의지가 시험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