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자냐?] - 설원
자취방에 있던 내게 설원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한다. 밤이 깊었다. 이제는 자야 한다는 걸 안다. 다른 뭔가 할 게 있는것도 아니기에.
잘 시간이지만 잠들지 않고 있다.
그 메시지가 휴대폰 알림화면에 뜨는 걸 본다.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시계를 본다.
새벽 한 시.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했냐는 말을 듣는다면 할 말이 없다.
설원은 생각이 많은 녀석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집에서 안 자고 있었다는 말에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우울해한다거나, 내가 침울해져있다거나,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답장하지 말자, 자고 있었던 걸로 하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본다.
생각이 많아진 건 나다.
안 자면 안 잔다고 그냥 말하면 된다. 예전엔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답장하기 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리하고, 설원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 정리한다.
설원이 자꾸만 나를 걱정하니까.
그렇게 걱정하게 만드는 게 싫으니까.
자꾸 생각만 많아진다.
이런 건 내가 아니다.
그런 내가 싫어서 이를 악물고 답장을 보낸다.
[안 자.]
[뭐 하는데?] - 설원
[누워있음.]
[누워서 뭐 해 안자고.] - 설원
[자려고 누워있지 뭐하겠냐?]
[내가 자는데 방해했어?] - 설원
[아니, 잠이 안 와.]
[박헌영이랑은 얘기 잘 했냐?]
[이 새낀 물건이야.] - 설원
[잘 적응해서 살 것 같은데?ㅋㅋ] - 설원
[내 생각에, 그 새낀 퇴원하자마자 옷부터 사러 갈거다ㅋㅋ]
[ㅇㅇ그럴듯ㅋㅋㅋ] - 설원
[ㅋㅋ자라, 나도 자게.]
[ㅇㅇ]-설원
메시지라는 건 이상하다.
웃고 있지 않은데 웃음을 표현하는 자음을 쓰는것에 주저함이 없다.
이런 건 어떤 종류의 약속이 아닐까 싶다. 내가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웃지도 않으면서 ‘ㅋ’이나 ‘ㅎ’같은 자음들을 섞어보낸다.
그리고,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걸 생각하는 나도 이상하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 내게 알려주진 않을거다. 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설원이 아니라 박헌영에게 물어보면 알려주겠지.
하지만 내가 묻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나는 그런 부분들은 각자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자존심 때문에라도 묻지 못할거다.
오늘은 조금.
심심하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사실 거짓말을 했다.
나는 사실 자려고 누워있진 않았다. 불을 꺼놓긴 했지만.
지금껏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뭘 원하는걸까.
뭐가 어떻게 되길 바라는걸까.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오고, 그 달빛은 내 발치보다 조금 먼 곳에 내려앉은 채, 그저 방바닥만을 비추고 있다.
달빛이 비치는 그 바닥을.
나는 조금쯤 떨어져서 가만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박헌영은 괴물이다.
괴물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옷 사러 가자!”
퇴원하자마자 눈을 빛내며 내게 소리치는데, 나는 대응할 말이 없었다. 설원과 우스개로 했던 말이 사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날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괜찮냐, 잘 될거다. 잘은 몰라도 내가 어느 정도는 알려줄게.
그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박헌영은 나를 만나기 무섭게 그렇게 말했다.
“오.... 옷이라고?”
“그럼, 옷 사야지.”
“......아니 뭐, 사러 가야 하는 건 맞다만....”
박헌영이 입고 있는 건 설원이 사다줬는지 단출한 트레이닝복이 전부였다. 그러니 옷도 사고 속옷도 사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지금 박헌영의 기세는 사뭇 어마어마하다.
분명히 나도 옷을 샀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옷을 산것뿐이다.
“흐흐흐.... 원피스도 사고, 스타킹도 신어보고, 롱코트도 입어보고.”
나는 박헌영과 같이 온 설원을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고, 그건 설원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식.
활기찬 건 좋다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건가 싶은데.
“박헌영, 너는 거부감도 안 드냐?”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박헌영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박헌영은 죽을 때까지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다.
“박헌영이라니?”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오늘부터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야. 엘리라고 불러줘.”
상큼하게 윙크를 하는 모습을 보자 나는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때리고 싶다.
진짜로 때리는 걸 넘어서, 두들겨패고 싶다.
-빡!
“악!”
“적당히 해 미친년아.”
응징은 나보다 참을성이 부족한 설원이 대신했다.
설원이 경멸스런 표정으로 박헌영을 내려다봤고, 박헌영이 머리를 싸쥔 채 으르렁거렸다.
“왜 때리고 지랄이냐!”
“좀, 적당히 역겨워야지. 부탁이야. 제발.”
설원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박헌영의 정도를 넘어선 또라이짓을 감당하는 게 힘든 모양이었다.
십분 이해가 간다. 나도 아침을 안 먹은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니까.
“역겹긴 뭐가 역겨워! 귀엽기만하지 않냐?”
“제발, 네 외연이 네 모든 걸 대변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주지 않을래? 나는 아직, 너를 보면 남자 박헌영이 윙크하고 애교를 떠는 모습이 자꾸 겹쳐보여서 속이 부대끼거든?”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야 친구여. 받아들이도록 해.”
설원이 으르렁거리다가 지쳐선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미친년이라니.
호칭이 그 새 변한건가? 뭐, 좋은 의미의 호칭은 전혀 아니지만. 설원이 나를 보더니 박헌영을 삿대질한다.
“이제 나는 여자니까 당당한 여성으로 대접해달라던데.”
“.......”
적응이 빠른건지, 그냥 나사가 풀린건지 알 수 없다. 걱정한 나만 등신이 된 기분이다. 박헌영은 그런 나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들었지? 난 오늘부터 미소녀의 삶을 고통스럽지만 겸허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모습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어.”
“네 그 발랄한 표정 어디에 고통이 있는건데?”
내 말에도 박헌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팔짱을 껴왔다. 뭐야, 왜 이래?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가자구.”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언니.”
거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말로 나를 공격해왔다.
-오싹
“으, 으으으으으으악!”
거의 전율에 가까운 경기를 일으키며 나는 박헌영에게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이 미친새끼가!”
박헌영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너갔다. 아니, 저건 건너간 게 아니다.
비행해서 날아간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박헌영은 요망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렇게 되길 기다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적응이 빠른건지, 준비를 한건지는 알 수 없지만.
둘 중 뭐건간에 기분나쁘다. 하지만 나와 설원의 표정이 어떻건 박헌영은 힘차게 외쳤다.
“오늘 백화점 거덜낸다!”
남자로 대체 어떻게 지금껏 살아온거냐 묻고싶을 정도로.
박헌영은 행복해보였다.
[작품후기]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