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박헌영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서 다시 묻는다.
“그래서, 말해봐. 네 단점이 뭔데?”
“...네가 무슨 말 할지 예측이 되니까 더 말하기 싫어졌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왜 예측이 되는데?”
“.......”
내가 그 말을 하면, 지금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지나친 박헌영이 할 말이란 아주 뻔하다.
말하기 싫지만, 오늘만큼은 박헌영의 장단에 어울려 주기로 결심했다.
“나는 아주 감정적이지. 나를 열받게 하는 새끼가 있으면 그걸 참고는 못 넘어가.”
“네 성격 지랄맞은거야 하루이틀이냐.”
“...그러니까 이런 걸 안 참는다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주먹으로 박헌영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빡!
“악! 아, 아 미친.... 미친놈아 이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해에....”
박헌영이 울상이 된 채 죽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보니, 이제 이 세 명 중에서 완력으로는 내가 정점이다.
힘으로 두 명을 전부 제압할 수 있다니, 내가 달라진 게 아니라 이선준과 박헌영이 달라진것뿐이지만.
“그래서 뭐, 뭐가 더 있을 거 아냐.”
박헌영이 눈물을 찔끔거리며 묻는다.
정말 하기 싫지만, 해야겠지.
“...애정결핍이 아주, 심각해.”
“...그건 의외네.”
두 번의 연애를 거치면서 알았던 사실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 연애를 의식적으로 안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박헌영은 내가 그 말을 하리란 걸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의 애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때문인지, 내가 가진 모든 관계가 가짜라는 생각 때문이었던건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연애할 땐 좋았어. 좋아서 문제였지.”
그건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서로 좋아서 만나고, 사랑하는 것 자체가 내가 살며 획득한 것이고, 동시에 진실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을 사랑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사랑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그렇기에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가짜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연애관계에 처음에는 감동했고 고마웠으며.
나중에는 집착하게 되었다.
애정을 갈구하면서, 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두 번의 연애 전부 끝이 안좋았어. 내 잘못도 있었고, 상대 잘못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 문제의 가장 결정적인 건 애정결핍이었어. 상대가 피곤할 정도로.... 그런다고.”
이선준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다.
박헌영은 그 말을 듣더니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럼 사랑해주기만 하면 너는 홀랑 넘어온다 이거냐?”
“...개소리 할래?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거야. 그리고 나는 연애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애정결핍이 연애 할 생각 없다는 건 무슨 개소리야?”
“같은 문제가 생길 게 뻔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는 현명함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겠냐?”
그런 게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그런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아니라면 나는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을거다.
무엇보다 나는 이별할 때의 그 고통을 다시 겪는 게 두렵다. 영원한 사랑 같은 게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박헌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꼬였어 역시.”
“새삼스럽게 이제 안 척 하지 마라.”
박헌영은 은근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 번, 나를 침대 위에서 머리를 내밀곤 나를 내려다본다.
“그럼, 서로 끈적끈적하게 집착하고 애증하는 관계가 되면 된다는거네? 응? 나 그런 거 자신있거든?”
원래라면 음흉한 미소였겠지만.
지금 그 미소는 아주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
그리고 그래서 더 엿같다.
진심으로, 조금 속이 메스꺼워졌다.
“...씨발, 좀. 내가 너 이딴 개소리 할 줄 알았어.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 왜에에에에에----.”
“너 방금 전까지 여자친구니 뭐니 하면서 우울해하지 않았냐? 왜 지랄이....”
아차.
잘못된 버튼을 눌러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박헌영의 얼굴은 이미 주먹에라도 한 대 얻어맞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미안.”
빠르게 사과해도 박헌영의 굳어버린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일부러 괜찮은 척 하며 농지거리를 하던 녀석의 역린을 아무 생각 없이 건드려버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
초점 잃은 박헌영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인다.
녀석은 천천히 침대에 몸을 말고 누웠다.
“미안해. 내가 경솔했다.”
“아니야. 내가, 너무.... 개소릴 했지. 우울하니 뭐니 하다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하고.”
억지로 괜찮은 척 하는 건 가벼울 땐 이 녀석의 장점이지만.
이럴 땐 정말 치명적인 단점이다. 내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박헌영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내가 생각없이 말했어. 그러니까....”
“그럼 안아줘.”
“......진심이냐?”
“장난이야.”
박헌영은 내게로 다시 몸을 돌리곤, 힘없이 웃어보였다.
사실 전부 장난일 뿐이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짜증이 나서 민감한 문제를 건드려버린 내가 잘못했다.
“나는, 소설 왜 썼는지 알아?”
하지만 박헌영 쪽에서 먼저 화제를 돌려준다. 이런 걸 보면, 박헌영은 결국 남이 괴로워하는 걸 두고 못 보는 녀석이다.
너의 장점이겠지.
“글쎄, 모르겠는데.”
“너는 소설이 너 자신을 마주보는 방법이라고 했지?”
“그랬지.”
박헌영은 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박헌영에게 소설이란 무엇일까.
박헌영이 내게 궁금해한 것처럼, 나 또한 박헌영에게 궁금하다. 박헌영은 장르문학을 하고 있고, 그것을 좋아한다.
입학한 이후부터 그건 달라진 적 없었다.
“나는 세상을 외면하려고 소설을 보기 시작했어.”
“외면한다고?”
“그래. 우리 집은 가난했으니까.”
찢어지게 가난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유복하지 못한 집안들이 대개 그렇듯 결코 행복하다 볼 수는 없는 시절을 보냈다.
“어디서 얻어온 컴퓨터가 있었어. 그걸로는 게임이 안 돼. 인터넷도 간신히 켜지는 컴퓨터로 대체 뭘 하겠냐? 생각해보니 인터넷을 용케 쓰고 있었네.”
남들 다 하는 게임조차 안 돌아가는 컴퓨터였기에 박헌영은 집에 오면 할 게 없었다.
판타지 소설에 나는 흥미가 없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대강 알고 있다. 박헌영의 추천으로 몇 개는 봤으니까. 용과 마법, 칼, 이종족. 그런 것으로 대표되는 가상의 존재들이 나오는 이야기다.
흥미는 없지만, 재미는 있었다.
“소설은 그냥, 매일 싸워대는 엄마아빠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려고 봤던거야. 사실, 그 때 컴퓨터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거였다면 나는 그냥 게임을 했겠지. 소설이라는 건 그 낡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 뭐 그런거였을 뿐이니까.”
웃기지 않냐? 라고 말하며 박헌영은 웃었다.
낡은 컴퓨터 때문에 불법 텍스트 파일을 다운받아서 보기 시작했다. 그게 박헌영이 소설을 처음 접한 계기였다.
“판타지 소설의 주제는 뭐 각각 다르지만 결국 재앙에 대해서 다룬단 말이야. 마왕을 잡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면 주인공이 마왕이기도 하고, 용도 나오고. 세계의 재앙이 일어나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대책없이 깽판을 치는 놈이 주인공이기도 하단 말이지. 세상을 구하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망가뜨리는 이야기도 나오기도 하니까.”
나는 그래서 안 본다만.
박헌영에겐 그것이 의미있을 수 있었을거다. 내가 즐기지 않는 문화라 해서 매도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저 모든 취미가 그렇듯 취향 차이일 뿐이다.
박헌영은 과거를 생각하는지 먼 곳을 보는 표정이 된다.
“중요한 건 말이야. 그 판타지 소설들이 다루는 주제가 아니야.”
“그럼 뭔데?”
“판타지의 모든 이야기는 거시적이야.”
박헌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삶의 미시성 같은 걸 다루는 판타지 소설은 없어. 적어도 내가 그때 봤던 것들 중에는.”
거시란 무엇이고 미시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미시적 판타지라는 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시적 삶을 살아간다.
삶의 미시성이란, 각각의 이야기가 모두 다르겠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비루하고 비참하다.
“거기에 한 푼 돈이 아까워 부부싸움 하고, 두들겨 패고 울고 그릇 깨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단 말이지.”
“.......”
“술에 취해 자식을 패는 부모 같은 건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등장하면 다행이지.”
“.......”
“세계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얘기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 같은 게 있겠냐?”
현실의 절망과 우울함, 비루함을 잊기 위해 박헌영은 그런 것이 없는 세계를 읽는 걸 택했다. 적어도 그 이야기들을 접하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만약 박헌영이 삶을 다루는 문학을 읽었다면, 아마 자신의 처지를 더더욱 비참하게 고찰했겠지.
물론, 그 과정에서 내 불행은 불행도 아니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헌영은 판타지 소설을 보며 세상을 외면하는 걸 택했다.
비난당하거나 칭찬받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그런 선택을 한 것뿐이다.
“볼 만큼 봐서, 이제 어지간한 건 지긋지긋해지니까 쓰고 싶더라. 처음에는 그냥 흥미였어. 그래서 썼지. 인터넷에 올리고, 사람들 반응을 보는 게 재미있었어. 댓글이 하나 둘밖에 안 달려도 신기하더라고, 남들이 내가 쓴 글을 보고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접시가 깨지고, 부부싸움을 하고, 나를 불러내서 패고. 그래도 괜찮았어.”
“.......”
“그냥, 그걸 쓰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고민과 슬픔은 하찮아졌거든. 규모가 큰 이야기를 쓰다보니까, 나는 점점 세상을 잘 외면할 수 있게 됐지.”
세상을 마주하지 않고,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헌영은 소설을 썼다. 쓸데없는 잡념과 절망, 좌절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의도는 다르지만 결국 나와 다를 게 하나 없다. 나도 소설을 썼고, 박헌영도 소설을 썼다.
의도만 다르다.
“계속 쓰다 보니까 반응이 좋은 것도 꽤 있었어. 인기도 꽤 많았으니까. 쓰고 쓰다가.... 출판제의도 몇 번 왔지만 무서워서 거절했고. 수능 볼 나이가 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무슨 생각?”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소설을 썼는데. 언제까지나 도망칠수는 없잖아.”
박헌영은 신기한 녀석이다.
“세상에서 도망치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보면 어떨까.”
소설은 박헌영에게 도피처였다.
하지만 단순히 도피처일 뿐이었던 소설을 어느 새 박헌영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보면 어떨까.
세상을 외면하던 수단이, 세상을 마주하는 수단이 된다. 그 뒤의 이야기는 내게 했다. 부모와 싸우고 가출했으며, 대학에 왔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틈틈이 소설을 써왔다.
박헌영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이게 지금이야.”
“.......”
새삼 분한 기분이 든다.
결국, 박헌영은 소설을 써서 이제 꽤 돈을 벌고 있다. 꽤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많이 벌고 있다.
“꽤, 잘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같지 않냐.”
“그래. 너 정도면 충분히. 아니 충분히가 아니라 훌륭하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단해. 솔직히 부러워.”
내 글은 정념 덩어리라는 말밖에 듣지 못하는데, 너는 네 소설을 이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걸로 돈을 벌고 있구나.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야.
심지어, 네가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택한 방식이 네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이 되었다는 그 과정이.
너무 멋지잖아.
이제 나는 내 힘으로, 온전히 내 능력으로 세상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도망치지 않고, 이제 세상을 소설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본다는 지금의 박헌영이.
외모의 이야기가 아니라.
멋지다 못해 아름답다.
“힘드네.”
이렇게 변해서.
박헌영이 중얼거린다.
“그런데, 무너지진 않을거란 확신이 있어.”
박헌영은 담담하게 그리 말한다.
“나는 이미 똑바로 서는 법을 알거든.”
박헌영이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바이러스 발작이 일으킨 변화 때문에 박헌영은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무너지지도 않을거라고 말했다.
박헌영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결국, 하나의 말을 하고 싶었던거다.
나는 괜찮아.
자기최면이 아니라 확신을 말해주기 위해서, 나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 긴 이야기를 한거다.
정반대의 길로 가다가 완벽한 턴에 성공했고, 그렇기에 좌절하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이미 지긋지긋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겪고 일어나봤기에 다시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너져도 상관없다.
다시 일어나는 법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힘든 건 그냥 잠깐 지나가는 열병 같은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 이런 사람이었을줄은 몰랐는데.”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박헌영은 밝게 웃는다.
“매력적이지?”
뻔뻔한 말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래.
라고 말하려다가 잠깐 멈칫한다.
그리고 곧,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래.”
라고 소리내서 말한다.
만약 내가 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은 우습지만, 너무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우리 셋 중에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무너졌을거다.
박헌영이 다시 일어선 것과 다르게, 나는 단 한 번도 일어서본 적 없다. 지금의 나 자신을 추스르고 나 자신을 긍정하는 것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기에.
이선준이 제일 강하다고 생각해왔다. 그 강한 건 육체적인 강함이 아니라 마음의 단단함을 말하는것이었다. 분명히, 이선준은 단단하다.
하지만 단단한 건, 의외로 쉽게 깨진다. 무너져가는 이선준을 보고 있는 나는 그걸 느끼고 있고, 그것이 안타깝다.
박헌영은 웃고 있다.
그것이 우리 셋 중에 누가 가장 강한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행이네.”
아마 누가 이 꼴이 된 내게 다행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자의식 과잉이 심한 편이니까. 하지만 박헌영에게는 그런 배려가 필요치 않다.
박헌영은 그런 것에 상처받지 않으니까. 오히려 다행이네라는 내 말을 바랄거다.
“그나마라는 말을 붙여야지 임마.”
박헌영은 내게 장난스레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곧 웃음을 터뜨린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변한 박헌영은 정말, 웃는 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박헌영을 보니, 자연스럽게 이선준 생각이 나면서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작품후기]이번 외전은 어떻게보면 설원 이외의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설명해주는 일종의 후일담 같은 역할도 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