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신기하네.”
“뭐가?”
한참을 울어댄 박헌영은 침대에 누운 채 나를 올려다봤다. 울 만큼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있었고,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내 우는 걸 보면 좆같고 쪽팔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아.”
지금까지 혼자 숨죽여 울어왔기에 누군가의 앞에서 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보이면서 운다는 건, 그 울음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건 결코 간단한 의미가 아니다.
혼자서 우는 것과, 누군가 자신의 울음을 달래주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박헌영은 미소지은 채 중얼거렸다.
“체념은 빠를수록 좋고, 적응도 빠를수록 좋지.”
“아까 했던 말이잖아.”
“내 이런 모습을 본 건 네가 처음이야.”
“...갑자기 왜 이상한 소릴 하냐.”
“책임져.”
“이런 미친, 갑자기 왜 얘기가 거기로 가는건데?”
박헌영은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네 평생 이런 이국적인 미소녀를 책임져볼 날이 오긴 할 것 같냐?”
“알맹이가 박헌영이라는 걸 아는 이상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지니까 닥쳐.”
“재미없긴.”
박헌영이 갑자기 왜 이런 얘길 하는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다.
이제 울 만큼 울었고, 이런 장난을 칠만큼 괜찮아졌다는 신호다.
“내 여자친구는 퀴어에 대한 헤이트스피치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시는 분이라서, 나는 나가리야. 분명해.”
“교회 다니냐?”
“그건 아니지만, 크리스찬만 그걸 싫어하는 건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물론 그거야 나도 아는 부분이다.
“얘길 해봐야지. 어떤 말을 듣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안 되면?”
박헌영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 때도 울 테니까. 네가 달래줘.”
그렇게 당당하게 울 거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다.
그러면서 박헌영은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땐 새끼야. 오늘처럼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꽉, 안아주란 말이야.”
“뭐라는거야 또....”
“혹시 아냐. 울음에 취해서, 막. 어? 어? 막. 임마.”
박헌영의 음침한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나는 경기를 일으킬 것만 같다.
“너 진짜 상태 존나 심각한 거 알지?”
“언제는 아니었냐?”
박헌영은 낄낄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확실히, 박헌영이라는 걸 알지만 그 외모만큼은, 이질적인 동시에 매혹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선준이 지금 그런 모습인 것처럼.
“이제 너만 남았네.”
“...뭔 소리야 그게.”
“너만 TS되면 이제 우린 삼위일체야. 같이 목욕탕도 갈 수 있을걸?”
박헌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 웃어댔고, 나는 더 이상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미친놈....”
“놈이 아니야. 년이지.”
박헌영은 기분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홀리지 않아야겠다. 어떤 정욕이 끓어오르는 건 아니지만, 친구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넋을 놓게 될 정도였다.
그게 하나 더 늘어버렸다.
여러모로 곤란하다.
팔자에도 없었던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진다.
이선준의 변화처럼, 박헌영도 어떻게든 변하게 될거다. 그리고 박헌영은 꽤 적극적으로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
어디로 가게될까.
그래서 어디에 닿게 될까.
문득, 이선준이 생각났다. 병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내 말을 듣고 내게 보여준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괜찮다고 말하며 억지로 웃는 그 표정이 뇌리에 박혀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 표정의 의미가 뭔지.
생각하려다가 그만뒀다. 생각하게 되면 뭔가가 망가져버릴 것 같아서.
오늘은 박헌영과 같이 있자.
이 녀석은 외로울테니까. 오늘 정도는 하루를 같이 새워줄 사람이 필요할거다.
그 날 밤.
모두가 잠든 병원에서, 나는 간병인 침대에 누워있었다.
박헌영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녀석은 잠이 잘 안 온다며 뒤척거렸다. 통증도 가라앉았고, 퇴원해도 별 상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도 당장 퇴원해도 괜찮을거라 했으니, 병원에서 보내는 밤은 오늘이 마지막일거다.
병실의 불은 꺼져있고, 사람들도 거의 잠들어있을거다.
개인병실이라 방해할 사람이 없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박헌영은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밤에 특히 우울해진다.
“너는 소설 왜 쓰냐?”
박헌영이 물어온다.
다들 글을 쓰러 왔으니 시건 소설이건 뭐건 간에, 이런 걸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대강 둘러대기만 했을 뿐, 제대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우린 꽤 오래 지냈지만, 아주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나와 이선준, 박헌영은 각자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은 박헌영이 내게, 지금껏 말하지 않았던 걸 말했다.
그러니 나도 말해야 할 것이다.
“토해내기 위해서.”
“뭘?”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비워내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지 아마.”
“무슨 감정인데?”
“나는 사실 고아야.”
“.......”
나는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주 어릴 적 입양된 고아고, 그것을 부모가 말해주기 전에 친척들의 험담을 엿듣고 알았다.
억지로 착한 아이를 연기하며 살았던 시절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동생이 엇나가기 시작하고, 녀석이 가출하고, 동생을 개 패듯 팬 다음 자살시도를 한 이야기까지 했다.
“착한 자식으로 남아야만 버려지지 않는다는 강박이 있었어.”
그래서 억지로 선량하고 착하고, 말 잘 듣고 동생에게 잘 해 주는 형을 연기했다. 사실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
해결되지 않은 내 안의 감정들은 뒤틀리고 왜곡되어서 폭력성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학교에서 툭하면 싸우고 폭력을 휘둘렀다. 가족들에겐 그 누구보다도 선량했지만, 오래 만나지 않을거란 확신이 있는 대상에겐 무관심했다.
그리고 그들이 날 자극하면 비정상적으로 폭력적인 행동을 했다.
물론 그런것도 오래간 건 아니었다.
“누굴 때린다고 해서 내 감정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지. 해결하지 못한 감정들에 짓눌려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공책에 내가 느낀 감정들을 썼어. 그건 소설이라고 부르긴 어렵겠지.”
그것은 정념(情念)의 덩어리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내 소설은 시작이 그러했기에, 지금도 그 원형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고전 같은 걸 읽기 시작했고,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
고등학생이 되었고, 동생이 가출한 사건 이후.
나는 병원에서 부모님에게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그러라 했고 나는 이 학교에 왔다.
“그러니까 나는 내 감정을 토해내기 위해서 소설을 썼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을걸.”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을 토해내서 비워버리기 위해서. 그것을 소설로 빚어내는 의미화의 과정을 아직 능숙하게 해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 소설은 특징적이고 상징적이되 완성적이진 않다.
“그래도 토해내고 나서 천천히 그걸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무슨 생각?”
“내가 가진 관념과 정념들을 읽어내면. 내가 쓴 건데도 내가 신기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 싶고.”
그런 의미에서 내게 소설쓰기란 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과정이라 봐도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소설을 쓸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한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라.... 이유가 뭐 그런거라 치고. 내게 소설이라는 건 나 자신을 마주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봐야겠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한다. 직시한다. 관찰한다. 감각한다.
소설쓰기란 내게 그런 의미다.
방금 전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걸, 박헌영의 질문 때문에 생각하다보니 알게 된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깨닫게 되는 게 있다.
“그래서 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장점은 모르겠지만, 내 단점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야 그거 슬프잖아....”
“자기 자신의 단점을 안다는 건 아주 큰 자산이야 새끼야.”
“자기 단점을 아는 게 왜 자산이냐?”
아주 큰 자산일 수밖에.
“단점이 뭔지 알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거든.”
자신이 실수하는 포인트를 알게 되니까. 부족한 부분을 알면 부족한 부분에서 과신하지 않을 수 있다.
또, 말하다보니 깨닫는다.
내 장점, 하나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내 장점은 내 단점을 잘 안다는거야.”
“자학도 그 정도면 예술점수를 줘야겠는데. 미친놈아.”
박헌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침대 위에서 웃는다. 하지만 나는 진짜로 그렇다.
“그래서, 네 단점은 뭔데?”
박헌영이 침대에서 얼굴을 빠끔 내밀고 나를 내려다본다. 박헌영의 이 행동은 당연히 위화감이 느껴진다.
“너 지금 끼부리는거냐? 평소엔 절대로 안 할 짓을 왜 하고 자빠졌어?”
“지금은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말 그대로,
이래도 될 정도라는 박헌영의 말에는 십분 동의한다. 확실히 그 외모에는 죄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짓거리를 하는 박헌영의 마음이 죄다.
감히 귀여운척을 십분 발휘하는 박헌영의 머리를 밀어 침대에 내팽개쳐버린다.
“아 진짜. 철벽치는거봐.”
박헌영은 그러면서도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웃는다.[작품후기]요오오오망하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