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세상에 안 어려운 게 어디있냐? =========================
나는 그 슬픔에 압도되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녀석은 거의 무감정한 것처럼 행동하고 지냈다.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이 녀석은 감정이 없는게 아니라,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다.
녀석은 과거형으로 말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건물 옥상에서 투신했어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한정운은 말했다.
“임신 팔주째였대요. 산부인과에 다녀왔나봐요, 형 자취방에 임신 테스트기랑, 진료통지서가 있더라고요.”
“…….”
한정운이 답지않게 나를 보살펴주고, 관심을 갖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한정운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TS발병자가 무슨 일을 겪게되는지는 그 아저씨에게 많이 들었다. 그것도 첫 번째 발병자라면, 많이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아직 나는 그런 일을 겪지 못했다. 하지만 곧 겪게 될지도 모른다. 단순한 오지랖이 아니다. 한정운 이 녀석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괜히 이 녀석에게 성질을 부렸던 내 자신이 머저리같았다.
“나, 나는…. 몰라서….”
“괜찮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에요. 좋지 않아요. 상처받게 될 거에요. 인간에게 실망하고, 남자에게 실망하고, 여자에게 실망하고, 삶에 대해 실망하게 될거에요.”
한정운은 한숨을 쉬더니 나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밝히지 마세요.”
“…….”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 녀석은 경험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가족이 발병했다. 기억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자신의 형제가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알고 있다. 이건 간섭이 아니라 순수한 걱정이다.
뭐야, 조금 감동할뻔했다.
“그렇게 따져봐도…. 사실 그렇잖아.”
“뭐가요?”
“숨기고 사는 사람들 쪽이 어떨지, 정말로 그게 행복할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잖아. 오히려 더 불행할수도 있잖아.”
한정운은 말이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삶에 거짓을 끼워넣지 않기로 어제 다짐했다. 이선준에게 그렇게 말했다. 박헌영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반대쪽 의견을 만나니 내 결심이 생각보다 확고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더 불행할 수도 있어. 진짜로 부담스럽다고, 남자한테 고백받거나, 스토커 같은거 생기거나 하면…. 진짜로 엄청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
“기정사실처럼 말하시네요.”
“당연하지.”
나는 한정운을 보며 씨익 웃었다. 번복할 생각은 없다. 이미 결정했다.
“나 지금 엄청 예뻐. 당연한거 아냐?”
그 말에는 한정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뭔가 승리한 기분이다.
지금까지의 모두가 불행했다고, 나까지 불행하리라는 법은 없다. 아니, 사실은 좀 불행해도 괜찮아. 불행은 항상 문학적 토대가 되어주니까. 장기적으로 보면 나는 나만 쓸 수 있는 문학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TS발병자이면서 동시에 소설가가 될 수도 있다.
오직 나만의 영역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왠지 기운이 났다. 동기부여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다.
“선배는 항상 보기보다 마음이 강하네요.”
“…항상?”
“네, 항상요.”
한정운은 그렇게 말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뭐야, 저 자식. 나에 대해서 별 관심 없지 않았나?
학과장과의 면담은 잘 끝났다. 처음에는 누구냐에서 시작해서 구구절절 설명하고, 내 구 신분증을 내밀자 어느 정도 납득하는 눈치였다. 나같아도 갑자기 TS됐어욧! 하면서 누가 나타나면 일단 미친년이 아닌지부터 의심할거다. 혹시 몰라서 챙겨온 진단서가 다행이었다. 의료행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증명서 역할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진단서를 받아든 학과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날 걱정해줬다. 그리고 학교를 끝마치려는 용기가 가상하다는 말도 전했다.
출석인정 요청에 관한 부분은 내가 직접 교수들을 찾아가는게 불편할 수도 있으니 학과 조교들을 통해서 통지를 해놓겠다고도 말했다. 배려 고맙습니다. 우리 학과장, 좋은 사람이다.
“집에서는 알고있니?”
학과장은 내 눈치를 보니 다 알겠다는 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 많이 혼란스럽고 힘들겠지. 나는 그래도 가족들이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주 수업 전부 학과장 권한으로 출석으로 확인해놓을게, 교양과목 듣는거 있어?”
“아뇨, 다 전공이라서.”
“그럼 편하겠네, 집에 가서 좀 마음의 안정도 취하고, 다음주부터 학교 다시 나와, 편한 마음으로.”
수업 빠지면 발제나 이런저런 중간고사 불이익이 있을수도 있다. 당연히 수업을 못 들으니까.
하지만 대학생이라는게 뭐 그렇게 되던가. 빠져도 된다고 하니 솔직히 기쁘다.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감사합니다….”
아 또 눈물 날 것 같아. 진짜 왜 이래? 세상의 쓴맛을 아직 덜 봤지만, 국정원 아저씨도 그렇고, 별 생각 없었던 학과장도 이렇게 따뜻하게 나올 줄이야.
하긴, 이 상황에서 누가 욕을 한다면 그게 정신병자겠지. 걱정 해주는게 어쩌면 당연하다. 나는 내가 듣는 수업과 시간표를 출력해서 학과장에게 제출했다. 진짜 집에는 알려야 해. 밍기적거리고 있으면 점점 더 말하기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알려야 했다.
상담을 마치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옷 잘 어울린다.”
학과장이 나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학과장은 시인이다. 그 말이 썩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노란색 후드티에 청바지.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 세상. 뭔가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닌가봐.
나는 학과장실을 나왔다. 집에는 대체 언제 가야할까. 우리 집은 대전이다. 그렇게 멀지도 않지만, 그렇게 가깝지도 않다. 오늘이 수요일이고, 일요일에는 다시 올라와야 하니까 빨리 가는게 낫겠다.
이선준과 박헌영은 피씨방에 있는 모양이다. 나는 학교를 나왔다. 도중에 아는 얼굴들을 마주쳤지만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차츰 알게 될거다. 굳이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고, TS발병자인 것을 자랑하듯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대로 산다고 했지, 자랑하고 다닌다고는 하지 않았다.
.
PC방에서 게임을 몇 판 했다. 종목은 롤, 누구나 하지만 누구나 잘하지는 않는 그 롤이다.
졌다.
“아니…. 왜 거기서 들어가? 신호하면 들어가랬잖아!”
“타이밍은 좋았는데….”
“좋긴 뭐가 좋아! 리신이 봐도 아니었거든?”
롤 얘기는 그만하자. 우리는 두 판 더 했고, 두 판 더 졌다. 그리고 나왔다. 박헌영은 플래티넘 1, 다이아 5보다 더 쳐준다는 그 플래티넘 1이었고, 나는 전시즌 다이아였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은 골드다. 뭐지 씨팔. 실력은 달라진게 없는데, 그래, 내가 아니라 세상이 변한거다. 롤쟁이들이 상향 평준화된 것 뿐이야.
그리고 이선준은 언랭이다. .
그래, 사람이 못 하는 것도 좀 있어야지. 이런 인간적인 면이 그나마 나를 기쁘게 한다. 이선준은 패배의 느낌이 썩 좋지 않은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당구나 치러갈까?”
“나 당구 싫어.”
나는 당구를 못 친다. 박헌영은 당구를 치느니 아이마스 정주행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마스가 뭐냐고 물어봤다가. 프로듀서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고 무슨 일본 여자애 이름이 나오는데 아무것도 못 알아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박헌영의 입을 막았다.
“웁!”
“물어본 내가 나빠. 그만해.”
모 웹툰의 유명대사를 말하자 박헌영은 볼을 긁적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박헌영은 잠시 멍때리더니 내게 물었다.
“야, 너 손에 뭐 발랐냐?”
“바르긴 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아니, 좋은 냄새 나서. 야, 야야야야! 왜 이래?”
“어쩐지 너 기분나빠.”
내가 폴짝 뛰어서 박헌영의 귀를 잡아당기자 녀석이 질질 끌려왔다. 그래, 힘이 안 되면 급소를 공략하면 된다. 박헌영은 자신의 귀를 소중하다는 듯 움켜쥐더니 말했다.
“이건 솔직히 네 잘못이지. 유녀같이 생겼는데 냄새까지 그렇잖아. 반칙 아니냐?”
“유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성희롱이지? 진짜로 죽여버리겠어.”
내가 다시 달려들려 하자 박헌영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누가 보면 어른 남자가 여자애를 놀리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겠지.
자꾸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좀 심하게 작은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 여자 평균보다 조금 작은 편이지, 심각하게 키가 작은 건 아니다. 그냥 평범하다. 어른인데 로리라니, 그런게 세상에 있기는 한가? 나는 멀찍이 돌아가는 박헌영을 보고는 이선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학교 일 주일 쉬라더라.”
“박경률이?”
박경률이라 함은 우리 학과장 교수의 이름이다. 이선준은 학과장을 매우 싫어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집에도 좀 다녀오라고 하더라고.”
“그래? 흠, 다행이네.”
“맞아, 그러고 보니까 물어볼 거 있어.”
나는 이선준에게 아까 들었던 의문을 말했다. 개강한지 시간이 꽤 지났다. 4월에 전역하고 복학을 하면 제대로 수업을 들을 수 있냐는 물음이었다.
“어? 원래 교수들한테 오리엔테이션이랑 그 다음 수업은 빠진다고 메일 다 보내놨어. 답장 전부 확인했고, 전화도 해봤으니까 괜찮아.”
지금은 개강 삼주차였다. 3월 18일 수요일이다. 전역은 아직 멀었다.
“무슨 소리야? 이 주만 빠지는게 아니지, 31일부터 바로 수업 나온다 쳐도 4주치를 못 듣는데?”
이 사람이 무슨 소릴 하는거지? 분명히 다음 주 금요일 복귀고, 그 다음 주 화요일 전역이라고 나는 분명히 들었다. 아무리 군 복학이라 해도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우면 출석을 쳐준다 해도 수업을 너무 많이 못 듣는다. 그걸 해주던가? 칼복학 군번이 아니었던 나는 잘 모른다.
“수강신청 다 해놨는데 뭘.”
“어?”
“전역예정서류 내고 복학하면 돼. 그리고 강의를 왜 못 듣냐?”
“왜 못 듣냐니, 전역을 해야 듣….”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한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뭔가 질린 것처럼 뒤로 슬슬 물러났다. 수업을 못 듣긴 왜 못 듣나, 이 인간은 군인이긴 하지만 지금 휴가를 나와있다. 말년휴가.
“뭐, 뭐야. 설마 말년휴가 나와서 수업 들으려고?”
“안 될건 뭐냐?”
“미, 미친…. 미친놈….”
놀아도 모자랄 말년휴가에 나와서 수업을 듣겠다는 인간이 내 친구중에 있었다니, 내 인생은 뭐가 잘못된거지? 어째서 이런 성실병에 걸린 사람이 내 옆에 있을 수 있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