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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89화 (189/224)

00189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술을 조금 더 마실까 했지만, 박헌영이 이미 마지노선을 넘겨버렸기에 나와 설원은 술집에서 나왔다.

"얘 집에 박아놓은 담에 가자."

"야아... 마... 나 별로... 안 취했엄마."

"그래 너 안 취했어."

박헌영이 비틀거리며 담배를 피워물었고, 설원도 담배를 피워물었다. 이제 흡연을 하지 않기에 나는 술집 바깥에서 둘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비흡연자의 고충이 새삼 와닿는걸."

할 일도 없이 담배냄새나 맡으면서 저걸 기다려야 한다니.

"그럼 피우던가."

"싫거든."

설원은 낄낄 웃었고, 나는 흰 숨이 내뱉어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의미있었고.

술에 달뜬 기분은 썩 좋다. 좋은 사람과 마신 술이고, 설원을 위로하려닥 오히려 내가 위로받았다.

이런 삶을 사는 건 나쁘지 않다.

지금을 살자.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기분이 썩 괜찮았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한다.

"한정운이랑 무슨 얘기 했어?"

설원이 뜬금없는 타이밍에 뜬금없는 걸 물어본다.

진작에 물어보지, 왜 이렇게 취했을 때에야 물어보는거냐. 만취가 가까운 시점에 물어오는 건 정말 이상해.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면 끝까지 묻지 않았어야 하고, 의문이 있었다면 진작에 물었어야 해.

하지만, 이제야 물어보는 건 사실 네가 오늘 나와 술을 마시면서 제일 궁금하지만 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게 이 말이란 이야기잖아.

너는 왜 묻지 못했고,

이제야 물을 수 있는걸까.

하지만 말했듯, 나도 취했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네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났을 때 남자가 느끼는 경계심 같은거야.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보면 속 좁은 놈이 되니까.

그래서 못 물어본거고.

술에 취한 지금에서야 은근히, 아무런 질문이 아닌 척 물어오는거야.

그래서, 오늘 너의 본론은 사실 이거인거지.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짓궃은 미소를 짓는다.

네가 본론을 본론 아닌 척 꺼냈으니.

나도 진심이 아닌 척 장난스레 진심으로 물을거다.

"너 나한테 소유욕 같은 거 느끼냐?"

"...무슨 개소리야?"

"아님 말던가."

하하하.

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쉰다.

"요물이 되어가는구만."

"잘 어울리지 않냐?"

"지랄."

여기까지만 하자.

여기서 더 나가면, 더 물어보면, 네 진심을 헤집어버리면. 네 본론을 내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 기저에 깔린 기의들을 파헤치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 끝에 닿으면.

우리가 개박살이 난다는 걸 나는 잘 알아.

"그냥, 내가 걱정된다고 하더라고."

"걱정? 한정운이 왜?"

"글쎄. 내가 너와 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네가 속 편해질만한 대답을 들려줄 수는 없다.

"이것도, 말해줄 수는 없어."

"...그래?"

오히려 더 복잡해지겠지. 하지만 나는 남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남들에게 말하는 건 나쁜 짓이라 생각하기에 그리 말할 수밖에 없다.

"네가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뭘 걱정하지 말라는건지 말하지 않았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제대로 말해버리면 그건 또 돌이킬 수 없으니까 두루뭉술하게, 적당히 알아들으라는 듯 이야기한다.

이런 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설원은 충분한 대답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걱정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내 말을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담배를 비벼 껐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우리는 마주보며 웃는다. 이미 맛이 가버린 박헌영을 설원이 부축하며 우린 걷는다. 아예 뻗어버린 게 아니었기에 박헌영은 취한 채로 중얼거린다.

"아... 집에가서 한 잔 더?"

"꼴값을 떠네. 한 잠이나 푹 자라."

"숙취해소제라도 먹여야겠네 이거."

큰길가에 나온 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숙취해소제좀 사올게. 편의점으로 가자."

"아냐, 다녀와. 이 새끼 무거워서 여기 좀 앉혀놓게."

설원이 도로 건너편의 편의점을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이 높은 상가건물들 사이에 있는 광장의 벤치에 박헌영을 앉혀놓았다. 길을 건너 편의점에 들어가서 숙취해소제를 셋 샀다.

먹는 김에 다같이 먹는게 좋을테니까. 나와 설원도 술을 적당히 마신 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네, 안녕히 계세요."

-딸랑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오고,

도로를 건너려는데.

"저거 뭐야?"

옆에 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뭔가.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고.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길 건너편, 하늘께를 가리켰다.

하늘이 아니다.

"사람인데?"

"저 사람 뭐 하는거야?"

상가 건물의 옥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옥상에, 누군가가 위태롭게 올라서 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서 있다.

"어,어... 어..."

그리고 그 아래에, 뻗은 박헌영이 벤치에 앉아있고.

설원이 필사적으로 박헌영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야, 야 이 새끼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설원이 소리치지만, 박헌영은 축 늘어져선 일어나지 않는다. 설원이 끙끙거리며 박헌영을 일으켜 질질 끌고가려한다.

이게,

아니. 저대로 떨어지면 부딪힐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이미 그 아래에서 멀찍이 물러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고 있다.

"경찰에 신고해!"

"어떡해!"

"누가 올라가야 되는 거 아냐?"

다급한 외침이 무색하게.

그 하얀 사람은 앞으로 걸었다. 마치 한 걸음 내딛는 것처럼.

그 앞에는 아무도 없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는 곳을 걸을 수는 없기에.

"꺄아아아아아악!"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추락이 시작되었고.

-콰직!

시작하기 무섭게 끝났다.

"어, 어... 어..."

얼어붙은 설원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나.

신호가 바뀌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달려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경악에 찬 소리를 지르고, 공포와 경악의 도가니가 되어버렸다. 설원은 얼이 빠진 채 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 이게... 이게 대체..."

나는 차마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던 망가진 것을 보지도 못했다.

"설원! 설원! 정신차려!"

"아, 아니. 아니, 나는, 내가 아니라 얘, 얘가."

코앞에서 사람이 떨어졌고, 설원의 얼굴과 옷에도 피가 튀었다.

하지만 박헌영은 그 피를 거의 온몸에 뒤집어썼다 해도 될 정도로 끔찍한 꼴이었다. 설원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여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 가자. 가자... 보지 마. 보지 말고..."

사람들은 눈을 가리고 있었고, 나도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토할 것 같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넘어 내장이 비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설원은 그런 구역질보다 더 급한 게 있다는 듯 박헌영을 필사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아니,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왜 그래, 정신차려!"

내 말에 설원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듯 인상을 구기며 소리질렀다.

"그게 아니라! 이새끼 몸이 존나 뜨겁다고 지금!"

"뭐?"

나는 그제야 넋을 잃은 박헌영의 이마를 만져본다.

"읏!"

사람의 몸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뜨겁다. 뭐지, 대체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경악할만한 일에 경악 하나가 더 겹쳐져서 토기는 쑥 가라앉는다. 그 대신 공포감이 내 전신에 뒤덮는다.

나.

이게 뭔지 알아.

"이, 이 새끼 왜 이래. 사람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구급차, 구급차 불러."

아, 아냐... 이건... 이건 그런 게 아냐."

어디선가 앰뷸런스와 경찰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벌써 오고있나? 오고 있는건가?

"아니라니, 뭐, 뭔데 그럼. 이게 뭔데..."

박헌영의 불덩이 같은 몸을 잡고, 덜덜 떨며 중얼거린다.

"발작... 바이러스..."

"바이러스? 무슨 바이러..."

설원은 말을 마치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내가 한 번 겪었던 열병.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열기. 겪었기에 모를리가 없다.

곧, 박헌영의 몸이 흰 연기를 뿜어냈고.

-털썩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 작품 후기 =========================

이미 한번 경험했던 설원을 한번 더 조지는건 너무하잖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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