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8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우리는 진탕 마셨다.
둘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셋이다.
셋인 만큼 우리ㅐ는 더 많이 마셨고, 더 많이 이야기했다. 오뎅탕을 시켜놓고 결국엔 눈치가 보여서 메뉴를 하나 더 시킬 수밖에 없었다.
"오뎅탕만 처먹는게 눈치가 보여서 매운오뎅탕을 시키다니."
나는 어이가 없어져선 헛웃음을 터뜨렸다. 박헌영과 설원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었다. 설원은 아직 꽤 괜찮은 것 같지만 박헌영은 나와 설원만큼 술을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은 꽤 상태가 좋은지 잘 마시고 있었다.
설원이 묻는다.
"야, 너 그러고 보니까. TS바이러스니 뭐니 노래를 부르지 않았냐?"
"아 뭐... 그랬지."
박헌영은 TS바이러스가 세상에 강림한 유일한 기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말은 끔찍한 농담이 되어버렸지만. 내게 이건 기적이 아니라 재앙이다. 박헌영은 내 눈치를 살살 보고있었다. 그게 재미있다. 박헌영이 그런 말을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건 아니다.
비감(悲感) 따위는 이미 술기운에 옅어졌다.
어쩐지 짖궃은 생각이 들어 물었다.
"네가 이게 걸렸으면 어때, 좋았을 것 같냐?"
"농담하지 마."
박헌영은 쓴웃음을 짓는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런 일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거니까."
"...그래?"
그런 건 또 의외다. 하긴, 박헌영은 트랜스젠더 희망자는 아니니까. 적어도 내가 알기론.
물론, 내 앞에서 나였으면 완전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내게 실례니까 그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내 눈치를 아는지 박헌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진짜.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내 성정체성에 상당히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이 자리에서 명확히 해야겠어. 그냥, 그런 건 찾아올 일 없는 일에 대한 농담이라고. 농담을 설명해야 하는 비참함을 나한테 느끼게 하지 말아줄래?"
박헌영이 나와 설원을 번갈아 쳐다봤고, 어쩐지 우스워져서 나는 꺌꺌거리며 웃었다.
"뭐야, 이제 그렇게도 웃어?"
설원이 내 웃음소리가 신기하다는 듯 그리 말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떻게 웃을까?"
술을 한 잔 더 마시며.
"이젠 여자야. 남자로 살겠다고 했지만, 그건 부정 할 수 없어."
생물학적 성별은 완벽하게 여자라는 걸 절대로 부정하지 못한다. 젠더감각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
아니.
포기라고 불러야겠지.
설원이 나를 보며 말한다.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
"안 상했어. 안 상했으니까 사과 안 해도 돼."
힘없이,
웃으면서.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섬세하게 다루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다.
막말을 해도 좋고, 그래. 너희들이 말 그대로 내게 성희롱 같은 말을 해도 좋다. 다른 놈들에겐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거고, 상처받고 분노하겠지만 너희라면 괜찮아.
너희라면 나를 편하게, 예전처럼 말을 막 해도 좋고, 스스럼 없이 팔을 붙잡아도 좋고, 심하면 주먹다짐을 해도 좋으니까.
너희들에게만큼은 그런 취급을 받고 싶어.
"험하게 대해도 돼."
"위험한 발언이라고 그런 건."
박헌영이 역시 그런 쪽 생각이 활발한 녀석이라 그런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나는 취기에 홀려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렇게 약해지진 않았어 건드려도 부서지지 않아... 부러지지도 않아."
"편하게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편하게 말할게 그럼."
설원이 말한다.
"응... 말해."
나도 설원을 바라본다.
"지금 너는, 불면 날아갈 것처럼 생겼어."
좋지 못한 발화(發話)지만.
너에게는 그런 말을 들어도 서운해하거나 상처받지 않기로 했으니까.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형'이 아니라 '너'라고 부른 것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조심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야."
박헌영은 침묵하고, 설원은 진지하다. 만취가 아닌 그 어디쯤에서야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아슬아슬하게 취해서야 서로를 비난하거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서로를 칭찬하거나.
서로에 대한 진심을 말한다.
상처를 주기 두려워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생긴 나라서. 설원은 조심스럽게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래, 솔직히 내가 불면 날아갈 것처럼 생기긴 했지."
나는 설원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그럼, 불어봐."
설원이 말을 잊고, 박헌영도 거의 숨을 멈춘다.
"...무슨 짓이야?"
"말 그대로의 뜻이지."
취해서 그런건지.
그저 이러고 싶은건지.
나는 웃는다.
"한 번, 불어봐."
내가 날아가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설원은 이게 무슨 광대놀음이냐며 질색했지만, 나는 웃음을 표정에서 지운다.
"불어보라고."
그건, 애교나 애정표현 같은 게 아니다.
"왜 그래?"
화 났냐는 듯 설원의 표정도 굳어진다.
"그냥 한 번 불어."
이건 강요다.
해보라고.
"화내기 전에."
박헌영도, 설원도 내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다. 결국 설원은 한숨을 푹 쉬며, 내 얼굴을 향해 숨을 푹 쉰다.
"...술냄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원에게서 천천히 떨어진다.
"불면 날아갈 것 같겠지."
"......"
"그런데 날아가지 않잖아."
결국 그런 말이 하고 싶었다.
정색을 하면서까지,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막상 그러고 나니 나는 견딜 수 없어졌다.
부끄러워서 사람이 죽는다면, 아마 지금이겠지.
하지만 할 말은 한다.
"날아가지 않는다고.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부서지지도 않아.
그러니 나를 가냘픈 유리잔처럼 대하지 말라는 의미를, 둘 다 알아들었을까?
알아들었을거라고 믿는다.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리는데.
-딱!
갑자기 이마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악!"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될 일이지 정색을 하고 지랄이야."
설원이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눈을 부라린다. 내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프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거린다.
"이 미친... 새끼가... 여자를 패네 이제...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부서지지 않는다고 말했고, 날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설원은 그걸 알기에 내 이마를 때렸다. 그리고 욕을 한다.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건지, 내가 무슨 행동을 원하는지 아주 잘 이해했다.
"한 대 더 때려줄까?"
"꺼져 미친놈아..."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마를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흘린다.
이마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배어나오는 것처럼.
아파서 우는 건 맞지만.
통증 때문에 우는 척, 연기한다.
흐느끼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하지만 너희들은 알겠지. 내가 아파서 우는 척 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서로를 잘 아는 사이라는 건 이래서 정말 피곤해.
하지만, 이래서 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