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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87화 (187/224)

00187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한정운과 꽤 많은 이야기를 했던 탓에 시간은 이미 해가 진즉에 넘어간 밤이었다.

"어, 왔어?"

"늦잖아!"

먼저 마시고 있던 박헌영이 손을 들었고, 설원이 신경질을 부렸다. 오뎅탕에 소주. 심플하다.

심플하다기 보다는 투박할 정도다.

나는 설원의 맞은편, 박헌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지간히도 처마셨네."

비어버린 소주병이 벌써 셋이다. 박헌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며 설원을 손가락질했다.

"글쎄, 이 새끼 이거 뭐라는지 알아?"

"수업시간에 튀었다며?"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박헌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뭐야. 벌써 들었어?"

"아니, 난 말 안 했는데?"

설원도 어디서 들었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디서든 충분히 들을 수 있을법한 이야기다. 수업 중에 사학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는 건 말 그대로 애새끼들도 안 하는 짓이니까.

"뭐... 한정운한테 들었어."

"한정운?"

설원의 인상이 구겨졌다. 한정운은 설원이 오늘 수업을 뛰쳐나가게 한 장본인이니까 곱게 들을 수 있을리가 없을 것이다.

"어 뭐... 잠깐 얘기 좀 했지."

"신기하네, 한정운이랑 얘길 다하고."

박헌영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고, 나는 대강 그런 일이 있었다며 대충 둘러댔다.

"개 같은 새끼... 씨이발..."

설원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아서 좆같은 새끼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는 단연 한정운이라고 자신해서 말할 수 있어."

그리고는 고개를 번쩍 치켜든 채 열받는다는 듯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설원의 못난 점이기도하지만 좋은 점이기도 하다.

한정운이 맹비판을 한 건 맞지만, 설원은 그 비판이 유효하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받아들이지 못해서 도망친 건 웃긴 얘기지만.

설원은 내가 한정운과 무슨 이야길 했는지 묻지는 않았다. 묘한 일이라서 물어올 줄 알았는데.

내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겠다는 뜻일거다. 나는 박헌영이 따라준 술잔을 들이키며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 소설 합평 중에 도망을 가냐? 당장 다음주에 교수 얼굴 어떻게 볼래?"

"시끄러. 바깥으로 뛰쳐나간 다음 한 걸음 걷는 순간부터 이미 후회는 죽을만큼 하고 있었거든?"

설원이 머리를 싸쥔 채 끄아악! 하며 바보같은 소리를 내뱉었고 박헌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렸다.

"이 새끼 그 와중에 가방 교실에 두고 와서 도망쳤다가 다시 들어가서 가방 들고 나온거 알아?"

"닥쳐닥쳐닥쳐! 닥치라고!"

박헌영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댔고, 나는 어이가 없어져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요즘 들어 네가 지나치게 모범적인 인간상으로 보이긴 했지.

사실은 이렇게 얼빠진 녀석인데.

"가관이다 진짜."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술을 마신다. 오뎅탕에 물을 부어서 재탕에 재탕, 재탕을 하면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지 싶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그리고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갔을 때 문득 깨닫는다.

이 두 시간 동안 이 녀석과 술을 마시면서.

바뀐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씨발 진짜! 한정운 그 개새끼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잘나긴 했지. 최종심에도 계속 올라가는 녀석인데 말 다 했잖아?"

"그건 나도 아니까 닥쳐."

"얼마나 잘났냐며? 물어봐서 대답한건데 지랄이냐?"

박헌영의 이죽거림에 설워이 부들부들 손끝을 떤다.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개지랄을 늘어놓는다는 점에서 아주 악질이야."

박헌영과 설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나도 한두마디 얹는다.

"확실히 박헌영이 틈만 보면 파고들긴 하지."

"아니 또 나한테 그러네."

이 녀석들과 있으면, 나는 예전의 나 자신 그대로 대해지고 있다. 전혀 위화감 없이 이녀석들은 나를 편하게 대한다. 나도 모르게 나도 남자인 나로 돌아가버린 것처럼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박헌영이 이상한 소리를 하면 어깨를 때리고, 박헌영이 왜 때리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 지금.

이 녀석들이 나를 당연하게 대하는 방식은 가슴이 떨릴 정도로 내 마음을 찌른다.

나를 나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장소라는 게 사실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나는 처참하게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자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들이 내게 보여주는 당연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고맙다.

마음이 더 굳어진다.

나는, 버리고 떠나지 않을거다.

나에게 소중한 너흐 둘을 버리고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거다.

설원은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낄낄거렸고, 그건 박헌영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헌영도 나름의 방식대로 열심히 쓴 소설이 갈기갈기 찢겨진 설원을 위로해주고 싶었던거다.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한정운이 한 말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거다. 그걸 고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명심하고 있을거란 사실은 명확하다. 그런 면에서 한정운의 말은 무의미하지 않을거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너희에 대해서 꽤 많이 알고 있구나.

이 녀석들이 나를 아는 것처럼 나도 이 녀석들을 많이 알고 있다.

비단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가 아니라, 함께 한 시간들을 그만큼 밀도있게 보냈다는 뜻일거다. 그만큼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나눠왔다.

"상당히 거북살스러운 표정인데."

박헌영이 뜨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설운이 피식 웃었다.

"네가 이해해라. 요즘 자주 이러거든."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당장이라도 감동의 눈물을 뚝뚝 떨궈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감격에 찬 표정이었지."

"요즘은 얼굴만 봐도 머릿속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야 거의."

설원의 마무리;에 내가 인상을 찌푸린다. 표정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거냐.

생각해보면 나는 이렇게나 달라졌는데, 내 그런 표정도 익숙하지 않을텐데 어떻게 아는걸까. 내 본질이 변하지 않았으니 표정만 봐도 안다는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설원도 잘 모를거다.

술이나 마시자, 라고 생각하며 잔을 기울였다.

"너 그런데 왜 소설에 자지으깨기 같은 걸 넣었냐?"

"푸웃!"

그리고, 박헌영의 충격적인 말에 뿜어버렸다.

"......"

내 맞은편에  있던 탓에 소주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설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게..."

설원은 침착하게 티슈를 뽑아 얼굴을 닦아냈고, 박헌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이긴 했지."

그 말에 설원이 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화자가 내적 갈등의 심화 끝에 자신의 남성성을 스스로 거세하는 그 압도적인 장면을 저열한 자지으깨기라는 단어로 불러야겠냐?"

설원의 소설이 항상 충격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치중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성기를 거세하는 장면이라니.

설원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 관념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알아가려면 또 시간이 걸릴거다.

그 과정은 꽤 재미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실제로 벌어진 일도 아니고 소설을 왜 그런 식으로 구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거니까.

박헌영이 말한다.

"물론 그 혁신적인 시도는 나의 '영애(Young愛)'에 비견될 정도였지."

"그 정신나간 음란물이랑 비교하면 죽여버린다."

박헌영의 소설을 외설물이다.

나는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린 적 없었다. 물론, 녀석은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해 수익을 얻어내고 있는 모양이지만.

글쎄, 나는 그것을 글이라 인정하는 수준까진 아직 가지 못했다. 내가 부족한거겠지.

나는 편협하고, 그 편협함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완벽하게 버리진 못했다.

나도사람이기에.

박헌영이 뭔가 더 개소리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걸 더 듣고픈 생각이 없다. 나는 설원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소설, 왜 안보여줬냐?"

"아니, 뭐... 바쁘다 보니까."

"내일 보여줘."

군대에 있을때에도 우편으로 소설을 보내오던 녀석이고, 나는 그에 장문의 비평을 보내주곤 했었다. 이젠 군에 있는 것도 아닌데 소설을 보여주지 않는 건 조금쯤 서운하다.

"오늘이면 오늘이지 왜 내일인데?"

"술 마시고 보면 제대로 보이겠냐."

내 말에 설원과 박헌영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내 이런 결벽증적인 모습을 이 녀석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

"이미 한정운이 인수분해를 해버려서 또 보여주고 싶진 않은데."

설원은 새삼 처참한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한정운의 합평이 멘탈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나라고 해서 친구의 소설을 호평만 하는 건 아니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정운이 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하지만 우는 아이 뺨 떄리는 성격도 결코 아니다.

"요 근래에는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웃는다.

"어떻게?"

"단점을 고치는 것보단 장점을 극대화하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거지. 무결한 평작보다는 송곳처럼 툭 튀어나온 문제작이 더 매력적이잖아? 나느 네가 문제작을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한정운에게 이미 탈탈 털렸다는 말도 있었기에, 그런 방식을 또 겪게 할 필요는 없다.

설원은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좋은 점만 봐줄게."

"......"

"......"

"뭐야, 왜 둘 다 표정이 그 따위야?"

박헌영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고, 설원도 눈알을 굴리고 있다.

"아니 무슨, 말이 좀... 뉘앙스가 묘해서."

그제야 나는 내가 무슨 소릴 한건지 깨닫곤 입을 살짝 벌렸다.

네 좋은 점만 봐줄게.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제삼자가 보면 오해할만한 발언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지랄이냐 넌?"

내가 박헌영에게 눈을 부라리자 박헌영도 뭐라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이건 좀 반칙이거든? 심장이 쿵 떨어진다고!"

"너는 날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냐?"

"조금은."

박헌영이 정색하고 말하자 나는 뒷덜미가 간지러워진다.

상처가 된다기엔 나는 내가 변했다는 걸 잘 알고, 이 녀석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해서 새삼 정색하고 화를 내고 싶지도 않다.

어이가 없군. 그런 생각만 할 뿐이다.

나는 설원을 흘겨보며 묻는다.

"너도 그러냐? 너 말고 네 소설이라고. 설명을 해 줘야 알아들어?"

"아니, 누가 모른대?"

설원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술을 마신다.

이 타이밍에 혼자 한 잔 마시는 건.

오히려 지금 네가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는 것 같은데.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술잔을 든 든 설원의 손끝이 떨리는 걸 분명히 봤다.

네 소설의 좋은 점만 봐줄게.

물론 그 말에는 거짓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냥 설원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좋은 점만 봐준다고 말하면, 그건 무슨 오해를 불러일으키는건가. 그런 말 같은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 외면이 변했기에 그런 오해가 발생한다. 하지만 방금 말했듯 나는 새삼 상처받지 않는다.

무슨 오해인지 한 마디로 설명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그건 정말 오해인가.

그 누구보다 내가 확신 할 수 없기에.

나는 박헌영과 설원의 태도에 상처받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자신에 의해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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