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6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걸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그 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걸 인정해버리면 나는 나약햊ㄴ 나 자신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약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부정하기로 정했다.
부정하기에, 말하지 않았다.
설원이 있으니까,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떠날 수 없다고. 모든 걸 버리고 떠나면 그와 같은 사람은 내 주변에 다신 찾아오지 않을거라 생각하기에 이대로 남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그걸 인정하지는 않았다.
한정운은 떠나온 사람이고, 그렇기에 그건 아주 오랬동안 지켜온 비밀이었을 것이다.
여자였던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어느 누구에게나 원래 남자였던 척 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비밀을 내게 밝히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는 걸 알기에, 나는 녀석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한정운은 지금 내게 완벽한 조언자가 될 수 있다.
솔직히 안심이 된다.
이런 나와 완벽하게 같은 처지는 아니라 해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언제든 고민을 털어놓으라는 이야기를 해 준 것만으로도.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는데.
많은 것이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위로 같은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변화해야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나아지는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런 위로 몇 마디에 그 어떤 것보다 큰 변화를 느낀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정운과 조금 더 이야기를 했다. 대단찮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녀석은 내 결정이 어리석다고 함부로 비난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부분에 대해서 알려줬다.
"...피부 관리같은 건 좀 하세요?"
"그럴리가 있겠냐?"
"아무리 TS바이러스 발병자들이 그런 거에 좀, 영향을 덜 받는다 해도 관리는 제대로 해줘야돼요."
피부는 깨끗하고, 잡티 같은 게 있는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 걸 할만한 상황으로 보이는..."
-지잉
뭐라고 한 마디 하기 무섭게, 메시지가 왔다.
[뭐 하냐?] - 설원
설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나는 답장을 보낸다.
[그냥 카페에 있지 뭐.]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정운과는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굳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건지 모르겠다.
내가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자 한정운이 말한다.
"설원 선배에요?"
"어, 뭐. 그렇지."
"무슨 용건인지 저는 알 것 같네요."
"뭔데?"
"술 먹잔 얘기일걸요?"
한정운은 미묘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내가 한정운과 친하지 않은 것처럼 설원도 마찬가지로 한정운과 친한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설원이 내게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걸 어떻게 알까?
[술이나 한 잔 하자.] - 설원
답장도 보내지 않았는 데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나는 뭔가 소름이 끼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 녀석이 어떻게 설원이 할 말을 알고 있는거지?
"오늘 합평 받았거든요."
녀석이 은근한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뭔지 대강 알 것 같다.
"...네가 아주 조져놨구만."
잘은 모르겠지만 설원과 창작수업을 같이 들었을 것 같다. 그리고 한정운의 스타일은 들어서 알고 있다.
아주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리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게 나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인격적으로, 인신공격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란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한정운은 그저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서 텍스트의 문제만을 거론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판한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본다는 걸 뜻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결국 개인 문제지만 수업 참여자로서 한정운은 누구보다 제 역할을 열심히 하는거다.
하지만 한정운의 다음 말은 날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뛰쳐나가시더라고요."
"뭐?"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져선 입을 딱 벌렸다.
"합평 받는 도중에 '씨발!' 이러더니... 그냥 나가셨어요."
"......허, 허허..."
원아.
그 나이 처먹고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뭘 얼마나 심하게 말했길래?"
"항상 고쳐지지 않는 선배의 고질적인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서 말씀드린거였어요. 물론 평소보다 조금 강도가 높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변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선배는, 설원 선배 소설 보셨어요?"
"아니... 봐달란 말을 안 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자기 소설을 보여주고 고민하면서 마음쓰게 하기 싫었던 게 컷을거다. 지금 내가 나 자신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한다는 걸 녀석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조금 서운하지만, 동시에 묘하게 감동이기도 하다.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서로의 소설을 보여줬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늦게 보여주려 한거니까.
그보다 새삼 한정운이 다르게 보인다.
"그런데 너, 설원 소설에 관심이 있었냐?"
"어느 부분에서 설원 선배의 소설은 독보적이니까요. 잘만 다듬으면 좋을 것 같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줄은 또 몰랐다. 한정운은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어보였지만 사실, 그만큼 타인의 텍스트를 읽어가며 그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고민, 그 사람의 관념, 그 사람의 발전을 감각하고 있었던걸까.
그리 따져보면 한정운은 설원에게 꽤 나름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설원 선배의 소설에는 특히, 애착이 조금 있어요."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설원의 소설은 지나치게 관념만을 파고들기에 몰이해를 낳기 쉽지만, 그만큼 그 다양한 몰이해 속에서만 태어나는 감상과 의미가 있으니까. 한정운은 그렇게 말하고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제자리 걸음도 이 정도면 심하잖아요. 그래서 조금, 따끔하게 혼을 내 준다는 느낌으로... 말했는데 말이죠."
도망가버릴줄은 저도 정말 몰랐네요.
한정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한정운의 표정에서 나는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너 설마 설원한테..."
"인간적 흥미가 있다고 치죠. 선배같이 재미없는 사람보단 훨씬 낫잖아요?"
"내가 재미없다고?"
설원에게 관심을 주는 만큼, 이 녀석은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건가.
묘하게 기분나쁘다.
"선배는 항상 삿대질만 하는 사람이잖아요."
"삿대질이라니? 내가?"
"선배는 이미 모든 고민이 끝난 상태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아는 사람이잖아요. 남들을 대할 때도 크게 다를 것 없고. 인간적으로 대단할 수 있어도 재미는 없어요. 그런 면에서 선배하고 저는 재미없는 부류의 사람이죠."
한정운 또한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타인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항상 답을 제시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은 재미가 없다.
하지만 설원은 다르다 이건가.
"설원 선배는 한 걸음 걷고 고민하고, 또 한 걸음 걷고 고민하고, 한 걸음 걷나 싶으면 다시 뒤로 가버리는 사람이에요. 재미있잖아요. 평생 고뇌만 안고 살다가 죽을 것 같은 그런 사람."
"기분나쁜 악취미 같은데."
"재미있죠. 그리고 또..."
한정운은 에스프레소를 마신 뒤, 인상을 다시 한 번 찌푸리며 웃었다.
"내버려두기 힘들잖아요?"
선배도 알잖아요?
한정운은 눈으로 그렇게 말한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면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고, 같이 이야기하고 싶고, 고민하고 싶다.
내가 설원을 보며 느꼈던 그런 걸 한정운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설원에게 다가갔고, 한정운은 그러지 않은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설원의 텍스트를 열심히 봐준 것뿐이다.
한정운과 나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인다.
확실히 설원은 고민하고 고뇌한다는 점에서 아주 지극히 인간적이지.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건 지극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설원의 고민은 항상 명확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고민을 함께 해야만 한다.
그런 것이 좋았다.
그런 고민을 하는 녀석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내게도 분명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면 이야기를 하면 될 거 아냐? 짝사랑도 아니고 뭘 그렇게... 합평만 해주고 있었냐?"
"선배도 알다시피."
한정운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남과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설원에게도 다가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어딘가로 떠나서 여자인 체 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나도 한정운과 크게 다를 게 없으리란 걸 안다.
그런 거였냐.
설원이 꽤 마음에 들고, 도와주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거리를 뒀던 것에는 한정운만의 사정이 있었다.
그건 애정에 가까운 감정이라기보다는 인간애에 가까운 것이다.
한정운도 복잡한 녀석이다. 내 생각보다 더더욱.
"...그럼 오늘 술 같이 마실래?"
"네? 제가요?"
"그래, 너 상당히 기분 나쁘거든 지금."
타인의 변화를 관음한다는 측면에서 한정운도 결코 좋은 짓거릴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그게 설원이라는 인간적 발전에 도움을 주고픈 감정도 있을테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관음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말한다.
"같이 가. 그리고 친해져. 그러면 그 예민한 녀석한테 상처주지 않고 더 좋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거 아냐. 내 생각에 설원은 너를 싫어하면 싫어했지 절대로 좋게 생각하진 않을텐데?"
설원의 소설에 애착이 있다면 조금 더 가까이 가도 될거다.
"아뇨."
하지만 한정운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그 말에는 빈틈이 없었다.
"...사실 무섭거든요."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온다.
"설원은 이해할 수 있을거야."
"그걸 알아도, 두려움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선배도 알잖아요."
"......"
"뭣보다, 하루에 두 명 이상을 만나서 깊은 이야길 하는 건 피곤하거든요."
오늘치의 용기를 다 써버렸다고 한정운은 우스개처럼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제 나름의 방식대로 망가져있는 거겠지.
설원이 그런 것처럼, 내가 그런 것처럼.
한정운도 나름의 방식대로 망가져버린 인간이다. 오히려 멀쩡하다면 더 이상하겠지.
"오늘 고마웠어."
"진지하게 들어주셔서 저도, 고마웠어요."
한정운의 미소에 나도 미소로 답한다.
"그럼 나는 가볼게."
한정운은 적당히를 모르는 인간이고, 오늘은 조금 더 강도높게 설원의 소설을 찢어발겼다는데. 아마 멘탈이 정상이 아닐거다.
그러니까 가야한다.
수업에서 도망친 못난 친구놈과 술 한 잔 하기 위해서.
지금은 나보다, 그 녀석이 더 위로가 필요할 테니까.
"과음하지 마세요."
"얼씨구, 네가 내 서방이냐?"
내가 이죽거리며 말하자 한정운은 피식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알아서 잘 하시겠죠."
나가는 내 뒤에 대고, 한정운이 말한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 말은 나를 위로하는 말이하기 보다는, 나를 위로하는 말처럼 들려왔다.
항상 잘 해왔던 사람이니 앞으로도 잘 할거라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페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어쩐지 마음이 조금쯤 들뜬 것 같았다.
[어딘데?]
설원에게 답장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