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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85화 (185/224)

00185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난데없이 한정운과 카페에 앉게 되었다. 음료를 가져온 녀석은 에스프레소를 시켰고,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안 마셔본거냐?"

"아, 네. 세상에 뭐 이런 게..."

"카페 안 와본거냐? 에스프레소를 몰라?"

"올 일이 없었죠."

이 녀석과 나는 인연이랄 게 없다. 몇 번 마주치고 이야기를 해 보긴 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란 생각만 들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안의 내적 논리가 확고한 녀석이라서 벽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단순한 벽이 아니라 충분히 많이 고민하고 생각한 후에 쌓은 그 벽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와 같은 부류라 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한정운을 싫어하는 수많은 선배들을 보면서도 한정운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선배나 동기들은 항상 바른 자세로 한정운이 펼치는 논리를 말대답이라 생각했고, 선배로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였으니까.

물론, 나는 한정운에게 그런 잣대를 들이밀진 않았다.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존중했다.

그렇기에, 싫어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좋아하지도 않았다.

상호간에 친해질 이유가 가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정운에 대해서 잘 알진 못하지만, 이녀석은 뭔가 무정물 같은 녀석이다.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그 한정운이 이렇게 된 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저번에 뵈었을 때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선배였을줄은 몰랐네요."

이젠 비밀도 아니기에, 숨길 이유 같은 건 없다.

"뭐 그렇지. 그 때야 뭐... 설명하기 애매했고."

"그대로 살기로 결정하신거예요?"

한정운의 말이 조금 미묘하게 들린다. 그대로 살기로 결정하다니. 그렇지 않을거면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남자로 돌아갈 방법같은건 없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뭐...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정운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국정원에서... 연락 못 받으셨어요?"

"응? 뭐? 국정원?"

갑자기 가슴이 뜨끔해진다.

"뭐야, 갑자기 거기서 날 왜 찾아?"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내가 식은땀을 흘려대자 한정운이 진정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TS바이러스 발병자는 국정원에서... 모종의 도움을 주거든요."

"도움이라고?"

한정운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게 설명을 시작했다. 국정원에서 TS바이러스 발병자들에게 제공하는 신분세탁 및 국가지원 프로그램에 대해서.

나는 가만히 한정운을 쳐다본다.

이 자식 이거 왜 알지?

"...너 프락치냐?"

"...국정원이 태원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프락치를 심어서 뭘 해요?"

"아니... 혹시 그럴지도 모르니까..."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선배는 거물이 아니에요."

"누가 뭐래? 그냥, 네가 나도 모르는 국정원 얘길 하니까 그렇..."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진다. 국정원에서 지원하는 신분세탁 프로그램.

TS바이러스 발병자에게만 지원되는 프로그램을 어째서 한정운이 알고 있지?

답은 어렵지 않다.

"너 설마...?"

"네."

한정운이 담담하게 입을 연다.

"제... 형이 우리나라 첫 발병자였어요. 그리고."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 TS바이러스 여성 발병자예요."

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은 무엇인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정운은 굳은 표정으로, 얼어붙어버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그랬는데?"

"중학교 삼학년 때였어요."

형, 아니 발병 이후 언니가 되어버린 형제의 자살한 모습을 봤고, 그 후로 쭉 이랬다고 한정운은 설명했다.

"그런 얘길... 왜 나한테?"

"힘드니까요. 이런 걸 감당해내는 건."

나는 여자로 변했지만 한정운은 남자로 변했다. 하지만 변한다는 감각과, 그로 인해 무엇이 변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나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국정원에서 신분세탁을 해주겠다고 할거예요."

"...너는 그걸 받았어?"

"학교만 옮기는 걸로 끝났어요. 그거야 국정원의 도움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니까..."

어찌되었건 한정운은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벗어나는 걸 택했다.

"그리고 제 형제는, 받지 않았어요."

신분세탁을 하지 않은 형는 죽었다.

그걸 받아들여 학교를 옮기고, 원래 남자였던 것처럼 살아온 한정운은 살아있다.

무슨 말이 하고픈건지는 알 것 같다.

"원래는, 선배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형이라면 몰라도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까진 하지 않았을거라고, 한정운이 덧붙였다.

"하지만 선배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잖아요. 자존심도 강하고."

"......"

"그래서 제 발병 사실까지 말씀드린거예요.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선배는 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테니까."

"그래...?"

한정운과 나는 서로에게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다. 무시하며 살았다. 하지만 한정운은 나를 알고 있었던건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비밀까지 밝혔다.

"언제 연락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군인 신분이 끝난 이후가 되지 않을까요. 그 때, 연락이 오겠죠."

"받아들이라고, 말하는거냐?"

한정운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제야 이 녀석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벽을 쌓고 사는 것처럼 보였던 게 이해가 된다.

이 녀석은 자신과 타인이 본질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타인과 단절감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내심 생각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경험자인 한정운이 있다. 변하고서도 몇 년을 살아온 한정운이 내게 그걸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건 함부로 비웃거나 무시할 수 없다.

내게 말한 사실이 한정운에겐 아주 큰 비밀이었을 것이다.

한정운도 내가 그걸 모르면 쉽게 설득되지 않을거란 걸 알기에 내게 그렇게 말한걸거다.

국정원에서 그런 걸 해준다는 건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아마 내가 군인신분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온다면, 그 때 즈음 연락이 온다는 말일까.

나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여자인 체 하며 살아갈 수 있다.

얼마 전 했던 결심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선택이다. 그런 생각을 방금 전에도 막연히 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그 선택지가 있으니 망설여진다.

뭐든지 눈앞에 들이밀어지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한정운이라는 녀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어쩐지 한정운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인다.

"네가 이렇게 인간미가 넘치는 녀석인줄은 몰랐는데."

"뻔한 절벽으로 가는 사람을 말릴 정도의 도덕심은 있다고 해두죠."

뻔한 절벽."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게 그런 곳인가.

한정운의 확신이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불행해질거라 말하는거겠지.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남들보다 불행해질 확률이 더욱 높다. 나는 고민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답을 내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내 삶에 진지했던 만큼 나는 더 불행해질거고, 그러니 내가 맞이하게 될 불행은 필연이다.

나는 남들과 다르니까, 나는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기에.

오히려 나라서.

필연적으로 불행해지리라는 걸 자각한다.

한정운도 그걸 알기에 내가 뻔한 절벽으로 가고있다 말하는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뭐가요?"

"지금 내가 뻔한 절벽으로 가고 있다면, 결국 다른 위치에서 새로 산다 해도 거기에도 뻔한 절벽은 분명히 있어."

나라서.

내가 나니까.

나를 숨기고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는 결국 다른 뻔한 절벽을 마주하게 될거다. 아마 여자인 나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여자로 살아가고, 태어나면서 쭉 여자였다 거짓말을 해야 할거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생길테고, 내게 또 다른 중요한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들 모두와 결국 거짓된 관계를 유지하는 셈이고, 그 거짓이 나를 괴롭힐거다. 그리고 그 거짓 속에서 나는 고통받을거고 괴롭겠지. 나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점점 피폐해질거다.

지금과 달라질 건 뭔가.

새로운 삶을 선택해도 나는 다른 절벽으로 떨어지게 될거다.

바다에 몸을 던지냐, 맨땅에 몸을 던지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나는 나를 알기에 내가 어떤 선택에서도 불행이라는 결말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때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라도 살아야 해요. 그런 경우도 있는데 타인을 속이는 건, 차라리 낫겠죠."

"이 쪽이 나아."

지금이 차라리 낫다.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는 있으니까."

거짓으로 사람을 대하지는 않을테니까. 나 자신의 근본적인 거짓에 고통받진 않아도 된다. 나를 험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멸시하는 사람도 있을거다.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의 거짓에 대한 근본적인 환멸은 하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삶을 택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사람은 살아있는 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러려면, 일단 나 스스로를 긍정할 만한 아주 작은 여지 정도는 남겨둬야 한다. 그래야 덜 괴로울거다. 어차피 불행해지리라는 건 아니까, 적어도 나 자신을 혐오할 이유는 더 만들지 말자.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부정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불러올테니까.

"정신승리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인지는 몰랐네요."

한정운의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말에 나는 웃는다.

"당연하지."

몰랐느냐는 듯.

"마음이 이기지 못하면, 실제로 어떻게 이기겠어?"

정신승리하는 건 그런 면에선 아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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