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4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이선준."
"네."
처음에는 의문. 하지만 곧 교수는 전달받은 사항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 그렇다고 했죠."
하지만 다른 학우들은 알고 있을까. 구원효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듯, 이선준이라는 이름에 반응한 나를 의문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늘꽂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에 몸서리쳐질 지경이다.
강의실 분위기를 파악한 교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제가 설명할까요. 아니면 이선준 학생이 설명하실래요?"
"...부탁드립니다."
내 입으로 도저히 말할 수 없어서 배턴을 넘겨버렸다.
"이선준 학생을 아는 사람도 있을거고,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얼마 전 TS바이러스 발작을 일으켜서 겉모습이 꽤... 많이 바뀌었을거예요. 다들 예전처럼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의문.
그리고 잠깐의 경악.
그리고 긴 침묵.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놀라거나 슬프진 않았다. 다만 교수의 말이 신경쓰인다.
예전처럼 대한다라.
이미 군에 다녀온 시점에서 예전처럼 날 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군대라는 건 꽤 긴 공백을 임의적으로 만들게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거기에 나는 여자까지 되어버렸다.
예전처럼 대하는 게 가능할리가 없다. 항상 가까이 지내던 설원마저도 변해버렸고, 예전처럼 날 대하지 못하는데.
이 수많은 제삼자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는 나도 모르고, 그들 자신도 모를거다.
그리고 의례적으로 한 위로를 이렇게 깊게 파고들고 있는 내가 제일 이상하다.
수업을 열심히 들으려 했지만,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교수도 내가 안색이 좋지 못한 걸 알기에 내겐 의도적으로 아무런 질문도 시키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의 수업이 끝나고 쉬는시간, 다들 내게 쭈뼜거리며 다가온다.
"혀,형... 이게 대체 뭔 일이에요?"
후배 하나가 다가오며 내게 물었고, 나는 힘겹게 웃어보였다.
"어, 뭐... 사고지. 사고."
안면이 있는 남자 후배들이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었고, 나는 어떻게든 대충 둘러댄다.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구원효처럼 난데없이 내게 그런 짓거릴 하거나, 성희롱 같은 질문을 하는 녀석은 없었다. 애초에 구원효같은 인간이 비상식적인거고, 인정하긴 싫지만 술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다.
술로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건 잘못이지만, 결국 술 때문에 안 생겨도 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니까.
적당적당히 보내고, 나중에 술 한 잔 하자는 말로 둘러댔다.
과연, 당장 엊그제 술 마시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저 녀석들과 술을 마실 수나 있을까?
거절하지 못할 상황이 아닌 이상은,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오... 오빠..."
올 것이 왔다.
내 눈앞에는 서혜인이 세상이라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어... 안녕. 오랜만이네."
"오, 오빠 어떡해요!"
서혜인이 내 앞에서 흐느낀다.
"괘, 괜찮으세요? 아프거나... 이런 건 없구요?"
"어... 뭐, 괜찮아. 아픈 건 없어."
"그나마 다행... 아니, 다행이 아니라... 내가 미쳤. 미쳤나봐. 죄송해요."
"아니, 아니 괜찮으니까 진정해."
서럽게 울어대는 서혜인을 오히려 내가 달래고, 눈이 퉁퉁 부어버린 그 녀석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울어버렸다.
그렇게나 서러운거냐.
그 눈물이 진심에서 비롯한 슬픔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슬픔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건지는 조금 궁금하다.
내가 이렇게 되어서 순수하게 내가 걱정이 되어서 슬픈건지.
아니면 내가 이렇게 되어버려서, 나와 네가 연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사라져버려서 슬픈건지.
이런 나와 연애를 할 수 없어서 슬픈건지.
나는 서혜인이 느끼고 있는 슬픔이 어디에 더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울고 있는 서혜인과, 다른 사람들이 나와 서혜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그 시선이 괴롭다.
나를 향한 시선 속에 들어있는 뭔지 모를 감정들을 추측하는 것도 싫고, 그 시선을 의식하는 나도 싫다.
과거의 나는 그런 시선 속에서 당당했다. 그래, 분명히 그랬다.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가해지는 수많은 시선들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건 그런 시선따위에 눈치를 보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종류의 부딪힘을 좋아했다. 감정과 감정. 이성과 이성. 논리와 논리. 주장과 주장. 나는 그 모든 부딪힘에서 내가 옳다 믿는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다.
뭐가 옳은건지, 뭐가 맞는건지 모르겠다. 맞다고 해도 그걸 주장하고 관철할 수 있는 의지도 사라졌다. 내 의지와 잘못이 아닌 것으로 인해 받게 되는 시선, 구원효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주목받기 싫어.
주목받고 싶지 않아.
내게 껍질이라는 게 있다면, 그 안으로 숨어들어가버리고 싶다.
그런 수많은 생각들을 하면서도, 나는 표정만큼은 담담하다.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아직은 그럴 수 있다. 그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으니까.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있으니까.
불안정한 내 마음과 내 감정을 숨기는 건 가능하다. 아무도 내가 지금 속으로 오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모를거다.
"힘내세요..."
"고마워. 나중에 얘기나 하자."
"네."
웃어보인다.
하나는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오늘 알게 되었다.
본심을 숨기고 가면을 쓴 채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만큼은 잘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이 되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내가 대단하다는 듯 바라본다.
설원이 나를 바라보며, 작게 말한다.
"...왜 이렇게 불안해 해?"
어.
뭐라고?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람들을 대했다. 서혜인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복잡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히 그렇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설원은 그런 내 가면이 거짓이라는 걸 당연히 안다는 듯 물어온다.
불안해하고 있다고?
그래,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 설원이 그걸 너무 정확하게 파고들어온다.
필사적으로 내 감정을 숨기고 괜찮음을 연기하려 했다. 많은 사람들은 속아넘어갔다고, 확신한다. 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선준이라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지 않기 위해, 연기했다.
저 사람들이 내가 이선준이라는 걸 믿어야만, 항상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나라는 걸 알아야만 저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설원은 당연하다는 듯 내 불안과 공포를 알고 있다.
끝내 못 참고 물어올 정도로 잘 알고 있다.
내 연기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은데.
필사적으로 연기를 해도 너는 내 본심을 알아주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다.
나는 설원을 쳐다보지 않은 채, 설원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괜찮은 척 하고 있을 때는, 그런 말 하지 마.]
설원이 메시지를 보곤, 나와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본다.
[더 불안해지니까.]
잠깐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설원 때문에, 뭔가 복받쳐 오르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하지만 그런 건, 둘만 있을 때 해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사람 많은 데에서 울면, 좀 그렇잖아.
다행히 누구와도 충동하지 않았다. 다음 수업에서도, 그 다음 수업에서도 나를 설명했을 때에는 과내에 이미 소문이 다 퍼져있었다.
나를 마주치는 사람들은 내 낯선 얼굴에 의문을 표하다가, 곧 깨닫곤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아직 입학한지 얼마 안 된 새내기로 오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전부 해결되겠지.
설원과 계속 같은 수업을 듣는 건 아니다. 교양수업에서는 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별로 불편하달 것도 없었다.
나를 알았던 사람들과 마주하는 건 힘들고 불편했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니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내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 같은 시선들일 뿐이었고 그런 건 견뎌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저 무시하면 될 일이고, 그들은 나를 모르니까.
이선준.
남자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 그저 그 수준일테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은 도저히 평범할 수가 없다. 많은 일을 겪은 건 아니지만, 내가 남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수두룩한 공간에서 내게 가해지는 따끔한 시선들이 언제 수그러들지 알 수 없다.
구원효의 사례가 처음도 아닐거다.
나는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의 남성성을 억압해왔고 짓눌러왔다. 술에 취해 그런거라 쳐도, 이렇게 된 나를 멸시하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나를 여자라고 생각할거다.
선택을 내린 게 엊그젠데 나는 벌써부터 그 결심이 흔들린다.
아직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무섭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의 나에대한 시선은 그저 막연한 호의, 그 정도로 그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나는 여자로 살아가야겠지. 새로 만난 사람들 앞에서 내가 TS바이러스 남자 발병자라고 밝히면 결국 지금과 똑같을테니까.
하지만 벌써부터 포기하고픈 생각은 역시 없다.
무엇보다도, 졸업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도망친다고 해서 내가 갈 곳이 있나?
있긴 있다.
내 최후의 보루지만,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보루.
부모님에게 돌아가면 되겠지.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눈 하나 깜짝이나 할까.
솔직히 나는, 내 자존심만 굽힌다면 부모님에게 돌아가 온실 같은 곳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건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딪히는 게 두려워졌지만, 그렇다고 부딪히지 않고 살아가길 원하는 건 역시 아니다.
갈등과 부딪힘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건 이제 내게 예전보다 더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뚫지는 못하더라도, 피하지는 않겠다.
도망치진 않겠다.
교양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선다.
"선배."
"아..."
뒤에서 나를 부른 건, 전혀 의외의 사람이었다.
"한정운?"
나와 같은 수업을 들었던건지, 한정운이 내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