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183화 (183/224)

00183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주말 내내, 나는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군에서 몇 번 연락이 왔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대강 대답했다.

잘 지내다니.

이 기세라면 나는 전역증을 받기도 전에 무슨 일인가 생겨버릴 것 같다. 설원은 내가 걱정되는지 저도 덩달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갈 일이 없는거겠지만.

“그러고 보니 담배 안 피우네.”

“끊을 수 있다면 끊는 게 좋으니까.”

설원은 내 대답에 그래? 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담배를 피울까 했지만 역시 그만뒀다. 건강이 아니라 상당히 자본적인 이유 때문에.

설원이 나를 걱정한다.

그건 고맙지만.

그 걱정에 감사하지만.

걱정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드는 수치심은 어쩔 수 없이 나를 갉아낸다. 다만 설원에게 그런 걸 티내지 말자.

설원의 걱정을 그저 고마워하자. 고마워하기만 하자.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워서, 설원에게 상처를 주지 말자. 지금의 나는 약해졌다. 몸이 약해진 것보다 더더욱 정신이 약해졌다.

가져본 적 있어야만 상실을 자각할 수 있다.

내 육체적 강함을 잃었기에 육체가 약해진 것보다 마음이 더 약해졌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육체의 강함이 정신의 강함과는 관련이 없어야 한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약해진 나를 계속 자각한다. 약해질 필요가 없다고 머릿속으로는 계속 생각하지만, 마음으로 나는 수십 수백번이나 패배하고 있다.

그런 생각만 계속, 계속 하는 주말이었다.

“선배님.”

월요일.

학교에 가자마자 과내 건물에서 구원효를 마주쳤다. 나는 설원과 함께 있었다.

그냥 지나치길 바랐건만, 설원은 구원효를 불러세웠다. 구원효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설원을 쳐다보곤, 나를 쳐다봤다.

“어 그래. 왜?”

“......허.”

설원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구원효의 그 태도를 보고, 나는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 내 이마에 붙은 반창고가 뭔지 아는건지, 모르는건지는 확실치 않다.

모르는 것으로 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필름이 끊겼다는 아주 간편한 변명이 있으니까. 서준필에게 얼굴은 안 맞았는지 척 보기에는 괜찮아 보인다.

설원이 씹어뱉듯 중얼거린다.

“어 그래. 라고 할만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이 씨발새끼야?”

“뭐, 뭐라고?”

설원이 난데없이 쌍욕을 퍼부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구원효가 내 눈치를 본다.

“어, 어 그게 그 날.... 사실 내가 기억이 잘 안 나서.... 준필이 형도 무슨 일인지 말을 안 해주고.... 그래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냐?”

저 표정은 아는 표정이다.

뭔지 알지만, 모르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는 그런 표정. 거짓말을 잘 하진 못하지.

뭐든 능숙하진 못한 녀석이다. 나는 설원의 외투를 살짝 잡아당긴다.

“그냥 가자.”

설원은 나를 잠시 바라본다. 제 성질 같아서는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런 정도 이상의 걱정을 내가 원치 않는다는 걸 안다는 듯.

설원은 구원효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낮게 중얼거린다.

“앞으로 나 만나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눈 깔고 지나가라 씨팔새끼야.”

설원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성격이 지랄맞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깔아뭉개버리듯 말하는 건 처음본다.

그 누구보다 이런 걸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설원은 자신이 그렇게나 혐오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이런 행동, 짐승이나 하는 거라며 대놓고 싫어했다.

그래서 이따금 내가 보이는 그런 태도조차 정색하며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 설원은 자신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말을 제 입으로 한다.

눈 깔고 지나가라니.

너, 그런 말 할 줄 아는 놈이었냐.

그것도 선배에게.

구원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마주 부라렸다.

“너 이 새끼가 선배한테 말을 개 엿같이....”

“깔아.”

설원이 낮게 말한다. 구원효가 그 기색에 흠칫한다.

“깔라고.”

“너, 너 이....”

-꾸욱

“!”

설원이 구원효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움켜쥔다. 설원은 키가 작은 편은 아니다. 적어도 구원효보다는 크다.

어깨가 잡힌 구원효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설원이 다시 말한다.

“과건물에서 후배한테 맞으면, 얼마나 쪽팔릴 것 같냐?”

“.......”

구원효가 조심스럽게, 눈을 아래로 내리깐다. 설원이 오른손을 풀고 천천히 구원효에게서 떨어진다.

“잘 하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구원효를 지나친다. 잘 했네, 그 말이 구원효를 완벽하게 밟아버린다. 완전히 아래로 깔아뭉개버리고, 작은 칭찬을 먹이처럼 던져준다.

받아먹으라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해.”

그 말을 남기고, 구원효는 벽에 붙은 채 얼어붙어있다. 나는 얼떨떨해져선 멍하니 설원을 따라 걷는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는 수컷이라는 건.

더럽게 비참한 꼴이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강의실로 향하며 어이가 없어져서 설원을 빤히 쳐다본다.

“...네가 그런 말을 할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본 대로 따라하는거지.”

“누굴?”

설원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그럼 누구겠냐? 어때, 좀 괜찮았지?”

방금 전까지 미친놈처럼 굴었던 건 장난이었다는 듯 설원이 낄낄거렸다. 그런 설원을 보면서 느낀다.

나만 변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설원도 변한다.

설원은 자신이 그렇게나 혐오하고 싫어하던 짓을 했다.

나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에 무거운 것이 내려앉아 버린 걸 느낀다.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녀석이 결심한 게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그걸 받는 입장에서 하지 말라 말할 수는 없다.

설원의 걱정을 받아들이자. 자존심 상해하지 말자. 그러는 건 설원에게 상처를 주는 거니까.

적어도 나를 깔보고 비웃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테니까.

그 마음을 기억하자.

“그렇게나 싫어했던 것 치고는 방법론적으로는 아주 적절했어. 자에 댄 것처럼.”

내가 웃으며 말하자 설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뭔가를 혐오하면, 그걸 잘 알게 되는 법이지.”

그러니까 그만큼 더 잘 할 수 있는거고. 설원이 덧붙인다.

마초이즘을 그렇게 싫어하면, 그만큼이나 알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손바닥 뒤집듯 구원효를 압박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관점이지만 사실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혐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 혐오의 객체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당연한거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 그런 면에서 설원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부분만큼은 엄격하다.

존경할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해.

“준비됐어?”

설원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린다.

“준비라니?”

설원이 가리킨 건 강의실 문이었다.

아, 맞아.

나는 이 모습이 되고 처음으로 학교엘 왔다. 오늘부터 변한 나를 소개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로 했다.

떨리는데.

“준비라고 할 것 까지야.”

나는 강의실 문고리를 잡는다.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거다.

그래야만 한다.

주문처럼 계속 생각하면서.

문을 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