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2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나는 넋이 나간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걸어간다. 술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관심이 없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나는 왼쪽 가슴을 움켜쥔다.
맞은 쪽보다. 가슴이 더 아프다.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아.
지나가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본다. 왜 보는건지는 알 수 없고, 관심도 없다.
어서, 어딘가로, 어딘가로 가야 해.
갑자기 맛이 가버린 것처럼, 나는 계속 걸어간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몇 번이나 주저앉는다. 주저앉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일어나서, 나는 걷는다.
걸어간다.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모른 채, 나는 손을 덜덜 떨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앞에 도착해선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틀리고서야 간신히 문을 열 수 있었다.
있나?
없나?
있다.
베란다에서, 설원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설원이 있다.
-드르륵
“뭐야. 뭐 이렇게 번호를 틀려.... 뭐야?”
설원의 표정이 급변하며 내게 다가온다.
“피잖아?”
“.......”
“뭐야, 뭔 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설원이 휴지를 가져와 내 상처를 닦아낸다. 피가 났었던건가. 설원이 어찌할 줄 몰라 부산스럽게 오가고, 나는 손을 뻗는다.
“자, 잠깐.... 잠깐만.... 정신사나워....”
“어, 어. 그래. 어. 가만히 있어? 어?”
“어, 응. 응.”
바닥에 주저앉자, 설원이 내 맞은편에 앉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
아직도 진정이 잘 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설원의 손을 잡는다.
“미안, 미안해.... 미안, 잠깐만.... 잠깐만....”
너무 놀라서 그런지. 내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있다. 설원의 손은 따뜻하다. 설원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를테지만, 가만히 있다. 오히려 손등을 돌려, 내 손을 잡아준다.
따뜻하다.
따뜻한 손이라서.
마음이 안정된다.
아니, 이건 안정된다기보다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기보다는.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나를 나로 대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사람에게 와서. 공포에 질렸던 마음이, 두려움에 얼어붙어버렸던 마음이 다시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어, 아. 서, 설원.... 원아....”
“어, 말해. 왜그래. 무슨 일이야?”
“아, 아까.... 아까....”
“응? 아까 뭐, 무슨 일 있었어.”
“아까 미안.... 미안해.... 윽....”
“왜, 왜 울어?”
“미, 미안. 미안해.... 그, 그렇게,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너에게만큼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게 후회돼서. 다른 사람을 잠깐 본 거지만, 그 사람들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알아버렸다.
설원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아버렸다.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 내 주제도 모르고 너에게 그런 말을 해버렸는데.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내 손을 잡아주고 있는 설원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으, 으윽.... 미, 미안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난다.
운다.
술해 취해서만이 이유는 아닌 눈물을, 설원 앞에서 계속, 계속 흘린다.
설원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내가 쉴새없이 흐느끼자 한 손을 빼내 휴지로 내 상처의 피를 닦는다.
닦으면서.
“그럼 미안할 짓을 왜 해?”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한다.
“미안, 미안, 미안해....”
“아, 아니. 장난이야. 왜 또 울어?”
내가 더 울자, 설원은 다시 어쩔 줄 몰라한다.
나의 변화를 실감한다. 나를 대하는 세상이 변했다. 못나게 나를 질투하던 녀석은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내게 술잔을 집어던졌다.
나는 물리적 후환이 두렵지 않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이 변한 것처럼 나도 변한다.
그런 폭력에 노출되고,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저항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워졌다. 남자였던 여자인 나는 기분나쁜 성희롱에 더 쉽게 노출되고, 쉽게 생각된다.
그런 걸 배려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걸 배려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분명히 후자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런 걸 하지 않는 사람.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설원이 내 옆에 있었다.
그게 다행이라서, 그런 녀석에게 심한 말을 해버려서.
고맙고 또 후회되어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흑, 으, 으으....”
“울지 마.... 왜 이런대.”
설원이 안타깝다는 듯 내 등을 토닥여준다.
세상이 나를 대하는 게 변해가듯.
나도 변한다.
나는,
뭔갈 원하는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설원의 손을 부여잡은 채 몸만 떨고 있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가고싶은 마음이 어느 새 자리했다는걸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부정하려 해도, 그건 이미 내 마음에 자리해버렸다.
다가갈 순 없어서. 그러면 나를 혐오할 게 분명하기에.
나는 설원의 손만 꽉 쥐고 있을 뿐이다.
설원은 소독약과 반창고를 부랴부랴 사와선 내 이마에 붙여줬다.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되는데,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염병.... 흉터 생기면 어떡해.”
“내 얼굴인데 뭐 어떠냐.”
뭐, 기껏 예쁜 얼굴인데 흉터가 나면 조금 그렇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설원은 내 어깨를 툭 쳤다.
“누구 얼굴이라도 이렇게 말했을거야. 왜 또 이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표정에 다 보이거든?”
못 당하겠군. 반창고를 붙인 다음에야 설원은 내게서 멀어졌다. 이마빡에 대놓고 반창고를 붙이고 다녀야 한다니. 이건 대체 무슨 캐릭터냐고 박헌영이 할 말이 벌써부터 훤하다.
설원이 말해보라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갑자기 와선 이마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서럽게 울어댔으니까.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새끼가 그랬다고?”
“......차라리 잘 됐어. 앞으로 그 건 때문에라도 귀찮게는 안 할 거 아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자. 구원효는 내게 그런 짓을 한 이상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할거다. 그러니까 차라리 완전히 인연을 끊는 대가라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하지만 설원은 아닌 모양이다.
“이런 개 씨발새끼가 진짜.”
내일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설원이 중얼거렸다. 나도 한 성질 하는 녀석이긴 했지만, 설원은 나와는 조금 다르다.
“개같은 쓰레기 새끼가 평소에는 눈알도 못 마주치더니 이렇게 변했다고 그딴 식으로 행동해?”
설원은 맛이 가버리면 앞뒤 안 가린다. 그래도 나는 정도라는 걸 지켰지만 설원은 꼭지가 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아냐, 괜찮아. 어차피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적게 다쳤건 크게 다쳤건,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고 쉽게 건드리는 그런 씹새끼는 좆같은 맛을 한 번 봐야돼.”
설원이 당장 전화를 하려는 걸 내가 억지로 뜯어말렸다.
“제발, 제발 하지 마. 괜찮아. 괜찮으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설원이 나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울어놓고 괜찮다고 하면 내가 그 말 믿을 것 같아?”
나는 원래 울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은 울었다. 지금껏 그렇게 울어본 적 없었던 것처럼 설원의 손을 부여잡고 울었다. 그건 분명히, 설원에게 미안한 것이 이유가 되기도 했겠지만 제일 큰 이유는 그거였다.
구원효의 폭력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를 느껴서였다.
그리고,
내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설원에게도 역시.
공포를 느낀다.
얼어버렸다. 설원 앞에서, 내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내게 술잔을 집어던진 자식에게 화를 내는 건데. 그걸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 것과 마음은 다르다는 것처럼, 나는 입을 열 수가 없다.
말을 잊은 게 아니다.
입을 열면, 나오는 내 목소리가 떨릴 게 분명하기에 말을 할 수 없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수치심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한다.
“......왜 그래?”
설원이 내 낌새가 이상하자 물어왔지만, 나는 입을 열지 못한다.
가까스로,
정말 가까스로.
“피곤해서.... 너, 너무 많이 마셨나....”
그런 말을 남긴 채 침대로 기어올라간다. 설원은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그 시선 때문에, 나는 벽에 시선을 두고 누워버린다.
나를 보지 마.
이런 나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지 마.
불쌍하게 봐달라는 듯이 서럽게 울어댔지만, 내가 나 자신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네 그 시선도 견디기 힘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설원도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