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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81화 (181/224)

00181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일차가 끝나면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건지, 일차에서 떠나지 않은 채 안주를 세 번이나 다시 시키며 술을 마셔댔다.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내가 남자였던 여자라는 사실이 이토록 혐오스러워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취한 서준필은 그렇다 치더라도, 취한 구원효는 정말 꼴불견이었다.

“야, 야.... 선준아.”

“네.”

“너 임마, 막. 어? 혼자 있을때.... 응? 해봤냐?”

뭘 말하는건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뇨, 안 해봤어요.”

“아 뭘 빼고 그래. 어떤 느낌이디? 어?”

여자에겐 이런 거 물어보지 않겠지.

내가 제대로 된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던 여자니까 이런 걸 물어보는거겠지.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정말로 안 해봤어요.”

술에 취해서 그런거겠지.

이해는 하지만 역겨운 건 어쩔 수 없다. 남자였을 때의 내게, 자위를 하면 어떤 느낌이냐 물어보는 것과 같은 수준의 마음가짐으로 묻는걸테니까.

그거나 이거나 싫은 건 마찬가지다만.

“야, 손 줘봐.”

구원효는 여자에겐 꽤 젠틀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못생긴 거랑 매너는 다른 거니까. 하지만 나는 그가 꽤 대단찮은 인성의 보유자라는 걸 알고 있다.

“손은 왜요?”

내가 묻자 구원효는 웃는다.

“아 그냥 좀 줘봐.”

알맹이가 어떻건 지금 나는 예쁜 여자라 이거지. 네가 평생을 살아도 한 번 마주볼 일 없을 정도의 그런.

그래, 적선해주마.

손을 내밀자 구원효는 내 손을 잡는다. 음흉한 의도가 없는 척 하며 손바닥을 대보고, 깍지를 껴본다.

하지만 그 모든 손짓에 숨어있는 내밀한 욕망이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무섭다.

그런 생각이 왈칵 밀려들어왔고, 나는 그것에 당황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공포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노출된 적 없었던 그런 종류의 공포다. 구원효가 흥분했으면 어쩌지, 허튼 짓을 여기서 더 하려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불현듯 치밀올라서.

나는 슬며시 손을 빼내버린다.

“아 왜 그래?”

구원효가 다시 손을 내밀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였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는 잠깐 화장실엘 좀....”

“여자화장실?”

구원효의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문 채, 화장실로 향한다. 몰랐다. 저런 수준의 인간이었을거라고는. 저런 모습의 구원효는 오직 나만 볼 수 있는거겠지. 여자에겐 못 하고, 남자에겐 다른 의미로 못 하니까.

오직 내게만 이런 짓거릴 하는 인간.

애초에 나를 여자화장실 가냐며 그렇게 말했지만, 여기 공용화장실이잖아. 소변기 하나가 있고, 변기칸 하나가 있는 그런 흔한 공용화장실이다.

문을 닫으려 하는데 바깥쪽에서 문이 열린다.

아, 잠가놨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들어온 건 구원효였다. 그는 뭐 거리낄 거 있겠냐는 듯 나를 보며 웃는다.

“일 봐, 나도 마려워서.”

“아....”

가슴이 뭔가 꽉 막혀버린 것 같은 답답함과, 거의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나는 변기칸의 문을 닫고, 문을 잠그려 한다.

-덜덜덜덜....

손이 떨려서, 자꾸만 잠그는 걸 실패한다. 뭐지, 뭐지, 손이 떨려. 술에 너무 취했나. 아니, 아직 그 정도로 마시진 않았어. 무서워, 심장은, 심장은 왜 이렇게 뛰는거야.

꺼지라고 하면 되는데, 나가라고 하면 되는데.

그 말을 못 하겠어.

무서워.

나는 문을 잠근 채, 가만히 앉아있다. 뭐지, 대체 왜 나를 따라 들어온거지. 무슨 짓을 하려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나를 따라온거지?

여긴 사람이 많은 곳이야.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허튼 짓거릴 할만한 공간은 아냐. 무서워 할 필요 없어. 두려워할 필요 없어.

저 새낀 술이 좀 취해서, 그냥 눈치없이 들어온거야. 내가 진짜로 신경 안 쓸 거라 생각해서 그런걸거야. 그런거겠지.

사람이 몇 명인데, 여기서 허튼 수작을 부릴리가 없어.

-쪼르르르르....

진짜로 제 볼일을 보고 있다. 나는 가만히 앉은 채, 어서 녀석이 나가길 기다린다.

“쫄았냐?”

“!”

그 말이 섬뜩할 정도로 가슴에 박힌다.

그제야 구원효가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알게 된다.

나를 겁주고 싶은거다. 내가 가진 남성성을 저 녀석이 항상 부러워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남들은 마초이즘이라고 욕했지만, 어떤 남성들은 그런 걸 부러워한다는 것 정도는 충분할 정도로 안다.

그리고 그 부러움이 열등감이 되는거고.

내가 내 남성성을 상실하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이렇게 압박해온다. 내가 단순히 여자라서가 아니다.

내가 상실한 남성성, 그 자체를 깔아뭉개고픈 것이다. 내가 너에게 뭘 그리 잘못했지? 네가 느끼는 열등감에 내 잘못이 단 하나라도 있었나?

없다고 단연코 자신할 수 있지만, 구원효는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그래, 너도 겉모습과 완력 따위에 취하던 그저 그런 놈들 중 하나지.

내가 겁먹은 걸 보며 그런 저열한 우월감에 취하고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겁먹었다.

실제로 겁먹었기에, 구원효의 의도대로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비참해진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구원효의 말대로.

나는, 쫄았다.

스스로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마 나를 밖에서 기다리진 않겠지.

-쏴아아....

손을 씻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린다.

구원효가 나가고 나서, 나는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아무도 없다.

그 녀석은 허튼 짓거릴 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다. 아무리 술에 맛이 갔어도 그런 짓을 하는 건 범죄다.

당연한 일인데, 나는 당연히 무사해야 해서 무사한건데.

어쩐지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주저앉아버릴 것 같다.

술자리에 돌아왔을 때 서준필과 구원효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술에 꽤 많이 취해있었다.

어서 집에 가야겠다.

“선배, 저는 이제.... 가볼게요. 피곤해서....”

“벌써 가려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을 꺼낸 건 구원효다. 술자리에 후배가 먼저 가겠다 말하는 건 버릇없는 짓이라고,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엔 나도 그 때의 어린놈이 아니다.

그런 말을 꺼내기엔 좀, 늦은 나이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서요.”

“이야.... 이거 서운하네 이선준. 막 선배를 버리고, 응? 가는거냐?”

서준필은 아무 말도 안 하지만 구원효가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무슨 음흉한 생각이라도 났는지,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오빠라고 한 번 해봐.”

“......네?”

“오빠라고 한 번 부르면, 쿨하게 보내준다.”

이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서준필은 구원효의 그 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야, 네가 이해 좀 해라. 원효가. 글쎄, 오빠란 말 들어보는 게 소원이란다.”

서준필은 그저 웃을 뿐,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정말로 오늘 나와 술 한 잔 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고, 사업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얘기나 좀 하라는 듯 서준필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서준필을 설득하니 구원효가 문제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아니, 가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해봐, 오빠 한 번 해주라. 응?”

구원효는 능글맞게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그 눈을 보자 오히려 마음이 차가워진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내게 해오는 모든 행동이, 그저 주정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겨난다.

“싫습니다.”

“뭐?”

그 말에 구원효의 표정이 굳어진다.

“싫다고요.”

나는 다시 한 번 확고하게 말한다.

“선배가 하라면 하는거지. 너 많이 컸다? 아니, 작아졌는데.... 풉.”

그렇게나. 내 남성성의 상실이 네겐 기쁜 일인거냐?

나를, 깔아뭉개고 싶은거냐. 더 이상 상대해주고픈 생각이 없다.

“가보겠습니다.”

“앉아.”

방금 전, 서준필의 앉아와는 명확하게 다른 의미다.

협박의 어조가 진하게 풍겨온다. 내가 앉을 생각이 없어보이자 놈이 소리친다.

“앉으라고 이 새끼야!”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술집이 조용해진다. 뭘까.

그냥 갈 수는 없겠다 싶어,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얌전히 앉자 그는 암컷을 복종시킨 수컷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겨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노려본다.

취하긴 취했으되, 인사불성과 취함의 그 중간 언저리에서 구원효가 나를 바라본다.

“너. 그렇게 잘났냐?”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네가 그렇게 잘났냐고 이 씹새끼야.”

대체 왜 이런 얘길 하는걸까. 뜬금없고, 이유도 없는 폭발이다.

녀석은 혼자 술을 따르더니 저 혼자 처먹곤, 흐느적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여기나 저기나 이선준 이선준.... 씨바아알.... 네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씨팔.... 좆....같네.... 니미....”

그런 거였나.

갑작스런 이 폭발의 이유가 뭔지, 대강 알 것 같다.

내 남성성에 대한 열등감만이 이유는 아닐거다.

너는 항상 나와 비교당했지. 다른 선배들에게, 그래서 내가 한창 활동할 때에는 내가 전면에 나섰고, 구원효는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내가 그에 비해 많은 면에서 뛰어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내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활동을 접고 나서도 그 자리에 남았지만, 사람들이 모두 내 공백을 이야기했으리라는 건 당연히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전역할 때가 되자 사람들은 다시 나를 찾았다.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구원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래 전부터 나를 생각할 땐, 질투와 증오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내게 연락해서 자리를 만들어야 했던 구원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가.

결국 이선준의 대신이 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젠 이렇게, 작아져버린 나를 보면서.

오빠라고 불러봐라, 손을 줘봐라.

그런 식으로, 하찮은 남성적 우월감이라도 느끼고 싶었던 거였을지도.

그리고 지금도 앉아라. 같은 명령조의 말을 하면서 얌전히 앉을 수밖에 없는 나를 보면서, 저런 역겨울 정도로 승리에 도취된 표정을 짓는 구원효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낀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여자고, 네가 남자라는 그 하찮은 이분법에 만족하는 인간으로 남을거냐.

이젠 여자인 나를 남자인 채로 억누르면, 네 열등감에 찌들어버린 마음에 역겨운 위로라도 깃드는거냐.

“씨발 네가 뭐가 잘났다고 존나 다 버리고 도망친 새끼를 찾으라 마라 씨발.... 하긴, 말대답도 하고 많이 컸지. 좆만해져가지고는.... 흐흐....”

그런 거에,

그런 것 따위에.

어울려 줄 것 같냐.

“추잡하게 굴지 마라.”

내가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하자 구원효가 나를 노려본다.

“뭐라고? 씨발 지금 네가 뭐라고 했냐?”

“추잡하게 굴지 말라고 했다.”

“추잡? 추잡하다고? 이 새끼가 감히 선배한테....”

“너 같은 걸 선배랍시고 대접해 준 건 네가 나보다 학교를 일찍 들어와서, 그것뿐이야. 고작 그것뿐인 새끼를 지금까지 대접해줬으면 고마워해야지.”

놈의 표정에 경악이 서린다.

“네 그 알량한 자존심은 이렇게 된 날 그 따위로 억압하려 드는 게 고작이냐? 여기저기서 이선준을 찾아대서 네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지. 질투심을 못 이겨서 후배한테 그딴 개소리나 지껄여대는 게 끝이야? 그럼 뭐가 나아져?”

놈의 인상이 구겨진다.

“인간 대접해주기 싫으니까 더 이상 마주치지 말....”

-빡!

아.

눈앞이 번쩍였고.

“악!”

술집의 다른 사람들이 놀란다.

“꺅!”

“뭐, 뭐야!”

놈이 집어던진 술잔에 머리를 맞았다는 걸, 잠깐 뒤에서야 알았다.

“다시 지껄여 봐 썅년아.”

“아....”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한거지.

“이런 개 좆만한 게 사람을 우습게 보고.... 지껄여 보라고 이 썅....”

-뻑!

“이 새끼가 지금.”

“억!”

-빡!

“곱게 취하진 못할망정.”

-퍽!

“어윽!”

서준필이 구원효를 패고 있다. 술집은 이미 난장판이 되었고,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한거야. 서준필이 구원효를 때리지만, 나는 그걸 제대로 보지도 않고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왔다.

맞았다. 구원효가 집어던진 술잔에 맞았고, 술잔은 깨지지 않아서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맞은 적이야 많다.

하지만, 맞고 나서 이렇듯,

이렇듯.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던 적은 없다.

============================ 작품 후기 ============================

흠....인터레스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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