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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80화 (180/224)

00180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대표란 게 본디 얼굴마담 역할을 한다지만, 이들은 그런 이미지에 상당히 민감하다.

사업력이나 조직력이 조금 떨어져도 얼굴 좀 반반한 사람을 대표자로 내세우고, 뒤에서 실무자들이 받쳐주는 방식이다.

결국 그게 배후조종이랑 무엇이 다른건가.

구원효, 좋게 말해도 잘생기진 않았다.

서준필, 꽤 험상궃게 생겼다.

그래서 이 둘은 활동은 오래 했으되 결국 대표의 역할은 맡지 못한다. 구원효에게 허락된 대표노릇의 최대치는 결국, 과 학생회장 같은거다.

외부에 보여지는 이미지, 즉 얼굴을 신경쓴다.

그 말도 맞긴 하다. 나는 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으며, 그런 이미지를 획득하긴 아주 쉽겠지.

하지만 내가 아주 못생겼더라면.

뚱뚱하고, 못났고, 그랬더라면.

내게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걸 잘 안다.

내 말에 둘의 표정이 굳어진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구원효가 말한다.

“이선준, 지금 우릴 모욕하는거냐?”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라면, 인정하죠.”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이런 선택은 불가결한거다. 너도 잘 알텐데?”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이 필요한 게 정치라면, 그 잘나신 1당 2당도 연예인을 데려와서 허수아비로 세운 다음에 비선을 만들겠죠.”

하지만 그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 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건 상징성에 대한 이용일 수는 있어도 얼굴에 대한 이용은 아니다.

소위 우리야말로 참된 정의라고 부르짖는 이들이, 마스크 적당한 놈을 물색해 전면에 세워놓고 꼭두각시놀음을 한다.

그 기저에 깔린 게 대단한 희생정신도 뭣도 아니고 그냥 외모지상주의라는 건, 코미디다.

“너, 우리도 우리가 편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 거 아니냐.”

서준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럼 누가 편하죠?”

너희들이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그 불편의 대가로 편해지는 건 누구냐.

그런 건 없어.

그냥 너희들은 자격지심이 강한거야. 세력이 작고, 사람이 없고, 돈도 없다는 그저 그런 열등감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거야. 전략이 있어서, 비전이 있어서 승부를 거는 척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이기고 싶어서 전략을 만들고, 이기고 싶어서 비전을 만들지.

“그러면 너는 뭘 할거지? 네 대안은 뭐냐 그럼, 그 지원금으로 그 새끼들이 외제차 뽑는 걸 구경하는 게 네 대안이냐?”

그 말인가. 여전히 그런 말로 사람을 겁박하나.

“대안이 있다고 말한 적 없어요.”

“그럼 방관하겠다 이건가?”

“저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과 더 이상 함께 뭔갈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걸 방관이라 부르시겠다면, 방관이라고 말하죠.”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지금 인간애에 대해서 말하는거냐?”

“네.”

설원이 생각난다.

인간주의자.

그래,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관 대화가 통하지 않아. 네가 나를 닮은 것처럼, 나도 너를 닮아버렸다. 운동을 그만두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비인간적인 면모를 환멸해 떠나면서, 나는 인간적인 뭔가를 그리워했을거다.

“인간애고 나발이고, 네가 하는 방관의 그 어디에 인간애가 있다는거지? 인간애라는 게 있다면 부조리에 항거해서 싸우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놈들에게 인간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인간애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건 투쟁주의지 인간애가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선배도 인간을 인간이라 보지 않잖아요?”

“뭐? 내가?”

서준필의 격앙된 말에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내가, 어떤 점에서 그랬지?”

그의 눈이 벌겋다. 그의 두꺼운 팔뚝이 힘줄을 돋운다.

저거에 뺨이라도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나는 다물 생각이 없다.

“선배는 제가 학생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뭘 말했어요?”

기억은 하려나.

“현 전략인 ‘여성’에 일단 부합하고, 그 여성을 세우고 내걸 슬로건인 ‘소수자’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 모든 조건을 가진 저야말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뭐 이런거겠죠. 거기에 주목할만한 외모는 덤일테고요.”

“그래, 그렇게 말했지.”

“그 말 어디에, 저라는 인간이 있습니까.”

조건과 조건의 총합이 있을 뿐, 그 말 어디에도 나라는 인간을 설명할 단어는 없다.

“당장 후보자로 내세울 저를 대할 때에도 제가 가진 조건이 후보자에 적합하다는 말만 있고, 그런 저를 설득하는 데에 결국 싸구려 정의감이나 의무론따위밖에 들먹이지 못할거면서. 제가 선배를 돕기를 바라는건가요?”

어쩐지 손끝이 떨린다.

“이렇게 된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조금이라도 물어보셨어요?”

아니,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내 손가락이 얼마나 가늘어졌는지 보고, 언제 본론을 꺼낼지 눈치만 슬슬 보고 있었지.

나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세력은 적어. 네 말대로 하는 게 맞겠지. 네 말이 옳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너도 알 거 아니냐. 우리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 여유는 승자의 것이고, 우리는 패배를 너무 많이 경험했다.”

“승리하기 위해서 지금의 이런 불만, 혹은 폭력적인 의결방식을 넘어가고, 일단은 뭉쳐야 한다. 이 말이겠죠. 그럼, 선거에서 이기면, 무슨 말을 하실 것 같죠?”

나는 소주를 한 잔 들이키고, 서준필과 구원효를 바라본다.

“총학을 뺏기 위해 다급하고 폭력적이고 성급하고 배려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조금, 이들에게 잔인하다.

“그 때에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급하고 폭력적이고 성급하고 배려하지 않겠죠.”

저 승리에 대한 말에는 아주 큰 함정이 있다.

승리하면 끝이 아니다. 승리 위에는 더 큰 승리가 항상 과제로 남아있다.

승리 위에 더 큰 승리가 있는데.

어떻게 승리에 안주할 수 있나?

승리하고 나면, 그 승리를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안주할 수 있나?

그렇기에 이 집단은 그저 영원히, 영원히 이 모습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쉴 때가 아니라면서, 내부의 모든 불안과 고통을 묵살해버린다. 지금은 뭉쳐야 한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지금은 견뎌야 한다.

나중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내 모욕적인 말에 서준필의 인상이 결국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그가 움켜쥔 소주잔이 곧, 깨질 것처럼 보인다.

“말을, 좆같이 하는구나 이선준.”

“저를 인간이 아니라 총학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부품 정도로 취급하셨잖아요. 저는, 제가 남에게 대해진 방식대로 남을 대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네게 했다는거냐?”

“제게 어떤 폭력을 행하셨는지도 모른다는 그 점이, 제일 큰 폭력이겠죠.”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가만히 서준필을 바라보고 있다. 겁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하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해봐.

그런 마음으로, 가만히 서준필을 바라본다.

“형, 형. 그만하세요. 야, 너도 적당히 해.”

구원효가 끼어들어 말린다.

“안 하겠다는 네 마음, 잘 알았다.”

결정권은 서준필에게 있겠지만, 구원효가 그렇게 말해버린다. 서준필과 구원효는 밖에 나가서 담배를 한참 태우고 돌아왔다. 서준필이 나를 바라보며, 결코 시원스럽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얼굴 붉히고 싶진 않았는데.”

그가 먼저 화해를 제스처를 취해오니, 받아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저도 말이 심했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오래 있고 싶진 않다.

“할 말이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앉아라.”

“.......”

서준필의 말에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업 얘긴 없던 걸로 할 테니까. 마저 마시자.”

그건 진심일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거잖냐.”

그 눈빛에는 뭐가 담겨있는건지 잘은 모르겠다. 우정일지도 모르고, 동지애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많은 것들과 이별해오면서,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의 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그 슬픔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다시 술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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