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세상에 안 어려운 게 어디있냐? =========================
엄청 무서워. 진짜 엄청 무서워.
내가 말이 없이 겁에 질린 작은 동물처럼 움찔거리고만 있자 박헌영이 내 등을 툭 쳤다.
“뭐 해? 가자.”
“아, 응.”
박헌영이 앞서갔고, 나는 뒤를 따라갔다. 이선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나 좀 더 하다 오라는 뜻이었다. 알아들었는지 어땟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과 학생은 주변에 없었다. 아직 건물로 들어가지 않았다.
박헌영은 내가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자리를 뜨도록 말을 꺼낸 것이었다.
“누구에요? 헌영 선배 여자친구?”
“어? 아, 그건 아니고….”
이선준이 말끝을 흐렸다. 내가 주저한 것을 먼저 말할 사람은 아니다. 박헌영은 단대 건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야, 잠깐, 잠깐.”
나는 제 자리에 멈춰서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박헌영이 뒤를 돌아봤다.
“잠깐, 시간이 좀…. 아무래도 긴장돼.”
“그래.”
녀석과 나는 벤치에 앉았다. 학과장에게 말하는 것은 큰 문제라 여겨지지는 않았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학우들의 시선이었다. 문학 하는 사람들은 일견 편협하지만, 인간에게는 열려있다. TS발병했다고 하면 상당히 신경써줄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는 얼굴이 지나갈 때마다 후배들은 박헌영에게 인사를 한다. 아무리 개똥 같은 녀석으로 유명하다지만 일단 선배라서 취급은 해준다. 뭐 나도 마찬가지다. 성질 더러운 놈으로 유명하겠지.
머뭇거려도 해결되는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혼자 다녀올게.”
“어? 괜찮겠냐?”
“안 괜찮으면 어쩔건데…. 군바리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
군바리는 이선준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나는 심호흡을 했다. 단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학과장실은 잠겨있었다. 맞아. 학과장도 교수니까 강의를 한다. 강의시간이랑 겹치면 상담을 못 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뭐지, 나 등신인가. 머리가 더 나빠진건가. 자괴감에 빠져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선배?”
“엇….”
“…퇴원하셨네요.”
한정운이었다. 녀석은 별로 놀라는 표정도 아니었다. 원래도 나보다 컸는데, 작아지니까 진짜로 올려다봐야 했다. 한정운은 나를 보며 말했다.
“강의는 세 시에나 끝날거에요.”
지금은 두 시 반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학교 지인들 중에 내가 바이러스 발작을 일으켰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한정운, 이선준, 박헌영 이렇게 셋이었다. 일단 지금은 그랬다.
“여기는 왜?”
“상담할게 있어서죠.”
“네가 그런 게 필요하기도 하냐?”
내 말에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은 가만히 서있더니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뭐야, 상담 받는다더니?
“야, 상담 받는다며?”
“선배 쪽이 더 급해 보이니까 저는 나중에 하면 돼요.”
배려인지 싸가지가 없는 건지 정말 태도가 이상한 놈이다. 맞다. 나는 저 녀석에게 할 말이 있다.
“야! 잠깐!”
한정운은 대답 없이 나를 돌아봤다.
“시간도 남는데 얘기나 좀 하자.”
“….”
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과 나는 3층 로비 소파에 앉았다. 강의 시간인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목소리가 크게 울릴 염려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선준과 박헌영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다른 데라도 가 있어. 좀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너…. 계속 병원에 있었어?”
내가 제일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한정운은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무신하게 답했다.
“계속 있지는 않았죠. 주말에는 몰라도. 평일에는 수업도 나가야 하니까요.”
“뭐? 너 그럼… 왔다갔다…. 했다는 뜻이야?”
“네.”
병원에 그냥 있는것보다 어찌보면 더한 일이다. 이 녀석은 금, 토, 일요일을 병원에서 자고, 월요일에는 수업에 나갔다가 다시 병원에 왔다는 소리였다. 버스타고 한 시간에 지하철도 또 타야 하는데, 대체 내가 뭐라고 이 녀석이 그렇게나 정성을 쏟는단 말인가?
싸이코패스인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건가?
“야, 이선준도 있었는데 니가 왜….”
“저랑 있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요.”
“….그건 니 책임 아니잖아.”
“제 책임이란 뜻이 아니라,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는 거에요. 그게 사람에 대한 예의니까.”
이 자식은 뭔가 핀트가 어긋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솔직히 놀라웠다. 사람이 죽었다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미친놈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이 지키는 특정한 도덕관념같은게 있다거나.
“학교 계속 다니실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뭐가 그래?”
뭔가 안다는 듯한 말투에 나는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선배는 소설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뭐?”
뭐야, 내 소설을 인수분해 수준으로 통렬하게 찢어발겨놓고는 이딴 말이 나오나? 갑자기 열이 확 올랐다. 내가 화난 것 같자 한정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가 한 얘기잖아요.”
“뭐? 내가?”
“우리 그 때 생각보다 얘기 많이 했어요.”
나는 지금이 너랑 얘기 제일 많이 한 순간인 것 같은데, 그 때 얘기를 더 많이 했다고?
“무슨…. 얘기 했는데?“
혹시라도 내가 흑역사 자랑이라도 하지 않았을지 조마조마하다. 생각해보면 지금 살아있는 자체가 흑역사지만 뭐 어쨌든. 한정운은 나를 보며 말했다.
“말 안 하는게 좋겠네요.”
“뭐? 내, 내가 무슨 소리 했는데? 이, 이, 이상한 소리 한거아냐?”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안 할래요.”
나는 왠지 한정운이 당황한 것 같았다. 뭐야. 내가 아니라 설마 저 자식 쪽에서 실수를 한건가?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그 날의 기억은 흐릿하다.
내 사고의 맥을 끊듯이 녀석이 무지르고 들어왔다.
“그런데 발병자인거 밝히실거에요?”
“…그러려고.”
“하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한정운의 말에 나는 평상시라면 화가 났겠지만, 약간 놀랐다.
“선배가 무슨 생각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은 가요. 하지만 분명히 힘들거에요. 사람들은 집단의 동물이에요. 지금 선배는 인간이라는 거대한 생물학적 단위에서는 여성이겠지만, 젠더 사회에는 들어갈 수 없어요. 남자 쪽으로도, 여자 쪽으로도.”
“그건 나도 알아. 하고 싶은 말이나 해.”
이 자식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갑자기 화가 치밀어오를 것 같다. 나는 누가 안다는 듯 얘기하는거 정말 싫어한다.
“박경률 교수님한테 잘 말하면 아마 학적부 변동이나 이런 사항들 신경써줄 거에요. 4학년 편입생인 것처럼 다니다가 졸업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딴에는 맞는 말이다. 나야 뭐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해도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막상 어제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까 시무룩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안 마주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나는 원래부터 여자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수업도 듣고, 조별과제도 해야 한다. 내 안에 아직 남아있는 남성성을 말살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럼 연기하면서 살아야 하잖아…. 나 솔직히, 솔직히 거울 봤는데 나 진짜 존나 이쁘잖아. 안 그래?”
내 바보 같은 소리에 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네요.”
오히려 순순히 인정하니 이 쪽이 더 놀랍다. 나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분명히 고백받고, 작업 들어오고 이럴 것 같아… 여자인 척, 발병자 아닌 척 숨기면서 내가 그런거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발병자인거 밝히고 수난 당하는거나, 그거 숨기면서 언제 들킬까 전전긍긍하면서 다가오는 남자들 쳐내는거, 여자인 척 하는거,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못할 짓 아니야? 오히려 마음 불편하니까, 떳떳하지 못하니까 더 힘들지도 모르잖아.”
“아뇨, 차라리 숨기고 살아요. 그게 더 나아요.”
“너 뭔데 자꾸 아는척이냐?”
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한정운은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자꾸만 아는 듯 말하는 그 태도가 너무 마음에 안 든다. 내 말에 한정운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너한테 걱정해달라고 한 적 없잖아. 왜, 너도 남자라고 내가 여자 되니까 걱정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거냐?”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누구라도 있었으면 이 말이 전부 들려서 대번에 시선이 끌렸을 것이다. 나는 누가 들을까봐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있는 힘껏 분노를 담아 말했다.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 내 기분이 엿같아진 것에 너도 충분히 한 몫 하고 있잖아. 한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나빠 역겨워. 며칠만에 내가 바뀌었다고 태도 싹 달라지는거, 진짜 짜증나. 뭔데, 평소에는 나랑 얘기도 안 하다가 갑자기 너 같은 놈이 병실에서 내가 깰 때까지 자리를 지키질 않나, 갑자기 그런 조언 같은거나 해대질 않나. 대체 이유가 뭔데? 어?”
나랑 한 번 하고싶냐! 남자였으니까 한 번 줄 것처럼 보이냐! 그런 말을 내뱉으려다 참았다. 그런 말까지 해버리면 진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정운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형이 있었어요.”
“….그 얘기는 왜….”
아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한정운은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 눈에는 깊은 슬픔이 들어 있었다.
“오 년 전에, 우리나라 첫 발병자가 제 형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