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9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카페에서 저녁까지 앉아있었다.
설원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한다.
하지만 선뜻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설원이 나가버린 카페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 나는, 꼭 남자친구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여자같았다.
조금은, 내가 우스웠다. 그런 설원에게 연락을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나는, 꼭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려는 여자친구라도 되는 것 같아서.
그런 상황이 우습고, 내가 우스워서 연락하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들어가서 말을 걸까. 아니면 녀석이 잘 때쯤 느지막이 들어가서, 내일 일어났을 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굴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역시 낯설고 우습다.
저녁 여덟 시.
나는 약속장소에 나와있다. 어차피 과 학생회장은 학교에 다니는 한 마주쳐야 할 사람이고, 그렇기에 무슨 이야기건 처음에 끝내버리는 편이 낫다.
차일피일 대화를 미루며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제안을 해오건 거절할 생각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구원효가 내게 무슨 이야길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얼굴을 하고 설원의 자취방으로 돌아가느냐, 그게 제일 마음이 쓰인다.
-지이잉
“여보세요.”
[아.... 혹시.... 선준이?]
“아, 네.... 맞아요. 전 도착했는데, 어디 계시죠?”
[우리 들어와 있으니까 너도 들어와.]
“아. 네.”
‘우리’라. 역시 그렇겠지. 둘이 만나는 척 하며 제삼자를 끼워놓는거. 아마 내가 만나서 달가운 사람은 아닐거다.
술집에 들어가자 나는 아는 얼굴을 향해 걸어갔고, 그들은 다가오는 나를 보며 ‘혹시?’ 하는 눈빛이 된다. 하나는 구원효, 다른 하나도 아는 얼굴이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하자 둘 다 표정이 볼만해진다.
“서, 선준이...냐?”
“어, 뭐, 이거 참....”
둘 다 당황을 금치 못한다. 키 크고 어깨 떡 벌어졌던 녀석이 이렇게 왜소해졌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하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다.”
하나는 구원효, 우리 과 학생회장.
다른 하나는 서준필, 학생운동을 하다 만났던 태원 지역 선배. 둘 다 얼떨떨해했지만 대강 악수를 하고,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이게 대체 그.... TS바이러스.... 그거라고?”
서준필은 이미 서른 줄을 훌쩍 넘긴 사람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학생도 아니고 지역 활동가다.
“그렇다던데요.”
“어쩌다 이렇게 된거야?”
구원효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는다.
“사정이 좀 복잡해서....”
나는 대강, 군에서 모종의 사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지만 뭐 어쩔 셈인가. 나도 내 처지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데.
“그래 뭐, 어쨌든 오랜만이네. 이 년도 넘었나?”
“네 뭐....”
운동을 그만두기로 하고, 갖은 사람들의 만류와 회유를 뿌리치고 입대한 게 그 즈음이니까 아마 맞을 것이다. 한창 활동할 때 구원효는 내 서포트를 맡았고, 서준필은 멘토 역할을 했다.
그러니 운동을 그만두면서는 사실상 볼일이 없어진 둘이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좋은 일도 분명히 있긴 했다. 설원과는 공유할 수 없는, 동지애라는 걸 공유한 사이니까.
“거 참.... 이렇게 참해지니까.... 뭔가 편하게 대하기 좀 그렇네.”
서준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그는 노총각이니까. 누가 있어 변변한 직장도 없이 팔뚝질 하러 다니는 사람과 결혼을 할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부아가 치밀진 않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편하게 대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고, 둘 다 억지로 웃음을 짓는다. 때마침 안주인 족발이 나왔고, 우리는 잔을 맞춘다.
술을 좋아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전제가 있다.
편한 사람과 마시는 술. 부담감이 없는 술.
의무감이 없는 술.
그런 술을 좋아한다.
-챙!
이런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는 연이 없어진 옛 친구와의 만남. 친구라기보다는 어떤 의무감 속에서 함께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과의 만남.
편할리가 없다. 또한, 그들은 내게 용건이 있다.
몇 잔이 막 오고갔을 때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 바뀐 외모에 대한 칭찬이라거나, 기분이 어떻냐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막연히 TS바이러스라는 것에 대해 알고만 있던 사람들이 발병자를 만났을 때 궁금해할법한 것들을 물었다.
나는 그들을 형이라고 불렀다.
“형이라고 하니까 너 무슨 꼭 80년대 사람들 같다야.”
“그럼 어떻게 부를까요?”
“선배라고 불러.”
“네, 선배.”
이 모습으로 형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선배라고 부르는 게 차라리 나을거다.
실례되는 물음까진 아직 가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보이는 술자리였다.
내가 남자였으니, 남자였던 나를 알고 있으니 조금 더 편하게 나를 대할 것이다. 다른 여성들을 대할 때하고는 분명히 다르겠지.
그리고 그 편하다는 것은, 무례함의 다른 말이다.
그런 질문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할 무렵.
빈 술병이 다섯을 넘어갔다.
“사실,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건 다른 할 얘기가 있어서야.”
본론이 먼저인가.
차라리 다행이다.
“말씀하세요.”
술을 꽤 마셨던 게 언제였냐는 듯, 서준필의 태도가 갑자기 가지런해진다. 그는 상당한 말술로, 그가 만취하는 걸 나는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술에 취한 듯 잘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을 번쩍 차리는 건, 어렸던 나에겐 꽤 멋있게 보였다.
지금에야. 어서 이 불편한 자릴 파하고 싶지만.
“사실, 사업을 하나 하려고 한다.”
그런건가.
그럼 내 쪽이 더 먼저다.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음? 그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저는, 이제 이런 종류의 모든 일을 안 하겠다고 예전에 말씀드렸고, 지금도 그 생각 변함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제안을 하셔도, 안 할 생각이에요. 죄송합니다.”
그 말에 구원효의 표정이 굳어진다. 하지만 서준필은 웃는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
“일단 내 얘길 들어보고, 그래도 아닌 것 같으면 거절해라.”
이 레파토리도 알고 있다. 일단 들어봐라, 듣고나서 생각해라. 그 뒤로는 전부 듣고 난 뒤의 토론이지. 지치고 지쳐서,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고, 반박할 기운도 없을 때의 논파.
하기 싫다고 하면 왜? 이게 잘못인가? 틀렸나? 틀렸다면 어떻게 틀렸지?
이유를 대고, 다른 이유를 대다보면 결국 이건 하냐 안 하냐의 싸움이 되어버리고, 안 하냐인 쪽은 결국 논리가 부족하다.
그러면 너는 뭘 할거냐. 네가 주장한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무슨 행동을 할거냐.
이런 식으로 나와버리니까.
그 피곤함을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들어보죠.”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이번에 구상하는 사업이란 게, 태원대학생들을 태원시랑 연계한 다음 지역봉사단체를 만들려는 거거든. 시의원들이랑은 이미 얘기가 거의 되어 있으니까 사람만 있으면 돼. 지원금도 상당히 나온다고 하거든. 이게 어마어마한 수준이야.”
“좋은 일이네요.”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내 역할은 무엇인가. 구원효가 부연한다.
“그 태원대학생들을 조직하고 단체화하는 게 총학생회 권한으로 되어있거든. 너도 알지는 모르겠는데 그 새끼들이 지금 어용이잖아. 그래서 그 지원금이고 뭐고 전부 지금 총학놈들이 전부 제 손아귀에서 갖고 놀게 될거란 말이야.”
“아.... 그렇겠죠.”
“사업이 확정되는 건 올해 말이고, 그 전에 총학을 우리가 가져와야 돼. 아니면 넘어뜨리거나.”
“넘어뜨린다는 건....”
“탄핵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낮은 수준의 정치라 해도 대학교 총학생회장 탄핵이 쉬운 건 아니다. 내 표정이 뭔지 안다는 듯 서준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최후의 최후에나 시도해볼만한 일이고, 일단은 이번 선거를 이겨야 하는거지.”
올해 안에 시 규모의 지원금이 태원대학교에 떨어질 예정이다. 그리고 그 지원금은 새로 조직될 봉사단체에서 관리될 것이고, 그 단체 조직은 총학이 모든 권한을 쥐고 있다.
그러니, 이들은 새로 떨어질 막대한 지원금을 위해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선거에는 후보를 내보내겠지만 이번에는 걸려있는 게 꽤 많다는 뜻이다.
“이번 총학 새끼들은 완전히 악질이야. 총학새끼들 선거 끝나고 학생회비로 하와이 놀러갔다 왔다니까? 그런 새끼들이 그 돈을 쥐면 무슨 짓거릴 할 것 같냐?”
구원효가 이를 갈며 말한다. 나도 거기에는 동의한다.
눈 먼 돈이 눈 먼 놈 손에 들어가면 꼴보기 싫은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더 나쁜 놈을 눈앞에 대고 흔드는 식의 화법.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
서준필이 말한다.
“원래는.... 너한테 적당한 후보자를 좀 물색해달라고 하려고 했다. 원래는 네가 발이 제일 넓었고, 그러니까 괜찮은 녀석을 알아봐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 전략도 이미 수립해놨고.”
“전략요?”
“이번 총학 후보는 여성으로 세울거다.”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건 아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 쪽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 의도와 효과는 안다 치더라도.
방식이 조금, 불쾌하다.
여성이 나갈거다. 가 아니라 여성으로 세울거다. 라니.
변화가 없는 집단이야 역시.
결국 나는 적당한 녀석 중 하나를 추천해달란 말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온거다.
그리고, 원래는이라는 말을 한 건 나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는 걸 의미하고.
서준필이 말한다.
“네가 나가줄 순 없겠냐.”
“.......”
역시나 예상했던 말이 들려온다.
“네가 적임자다. 소수자의 의견이 중요시되는 지금 사회 풍토상, 너는 소수자의 의견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해 줄 수 있는 조건에 있어.”
남자였던 여자.
남자도 알고 여자도 알겠지. 그러니 이슈파이팅도 충분할거고, 소수자에 대한 상징성도 충분히 가져올 수 있을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서준필을 보며 미소짓는다.
“딱 한 번만이면 된다. 이번에 제대로 기반을 잡아놓고, 제대로 단체 조직해놓으면 네가 손 떼도 그 집단을 통해서 지속적인 운동하고 사업 자체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어. 딱 일 년이다. 딱 일 년. 지금 너보다 태원대학교 학생회장에 어울리는 사람 없다.”
내 미소의 의미를 오해했는지, 서준필이 열심히 주워섬긴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내 웃음은 그런 의미가 아니야.
비웃음이지.
“제가 얼굴이 반반하니까 마스코트로 세우기 좋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니 뭐니 하는 이들이지만. 결국 그들의 대표자는 인상을 보고 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