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대로변에서 사람을 변태 만들어놓고 도망치면 어쩌잔거야.”
대학가 근처의 카페.
설원이 안색이 핼쓱해져선 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커피 사놨어.”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내밀자 녀석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있잖아.”
“어.... 왜?”
“알맹이가 이선준이라는 걸 아는데, 껍데기가 그 모양이니까....”
설원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곤 피식 웃는다.
“꽤 용서가 되는걸.”
“외모지상주의냐, 새삼스럽게.”
화를 낼 기분도 들지 않아서 나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어차피 승리자의 입장이면 외모지상주의처럼 고마운 것도 없지. 안그래?”
설원이 ‘승리자의 기분은 어때?’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말에 나는 씨익 웃어보인다.
“뭘 굳이, 나는 옛날에도 그 관점에서는 승리자였거든.”
“오, 존나게 재수없었어 지금.”
설원이 기분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커피를 들이킨다. 뭘 새삼스럽게, 남자일 때의 나는 조각같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외모로 어디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었지.
“사실을 말한건데?”
못생겨서 좋을 건 없지.
그래도 나는 내 성별이 바뀐 것에는 대단한 불만이 있지만, 단순히 미적 측면에서 보자면 예뻐져서 싫지는 않다. 내가 싫어하고, 불쾌해하는 건 아예 다른 측면의 변화를 말하는 거니까.
“이거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예나 지금이나 승리자라니.”
설원이 낄낄 웃으며 말하자 나는 설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이 녀석과 오래 지냈지만,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는 건 지금이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 너도, 그렇게까지 못난 건 아니잖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외모는 마음의 거울이라는데, 설원은 딱 제 성격에 맞는 얼굴을 하고 있다. 까칠해보이는 눈매 하며, 전체적으로 신경질적인 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얼굴이다.
그러면서도 깊은 눈은, 녀석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 마음을 쓰고 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총평하자면,
못난 얼굴은 아니지.
실제로 이 녀석이 연애를 한 건 두 번 뿐이라지만, 이 녀석 좋아하는 사람들도 내가 알기론 꽤 있었고.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못난 얼굴이 아니라기보단, 잘 생긴 편이다.
“......방금 기분 상당히 이상했어.”
내 새삼스러운 칭찬에 설원이 떨떠름하다는 듯 혀를 내밀고 우웩, 하는 제스처를 취해보인다.
그 반응, 어쩐지 재미있는데.
“왜, 설레냐?”
내가 썩은 웃음을 지어보이자 설원은 더더욱 인상을 구긴다.
“지랄.”
이런 장난을 치는 걸 보면 나도 어느 정도 체념한건가. 신기한 기분이다. 친한 친구에게 나에게 설레냐는 소릴 하게 되다니.
흔들리고 아니고를 떠나서,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거 자체가 재미있어.
우습고.
“그나저나 어떡할거야?”
“뭘 어떡해?”
“학기초고, 새내기들 왔으니까 대면식이다 뭐다 할텐데, 생각 있어?”
그러고보니 그런 셈이지.
“너는 가게?”
“아니, 내가 거길 왜 가?”
애초에 인간관계가 만신창이인 것도 아니지만, 설원은 또 누굴 굳이 찾아서 만나고 이런 타입은 아니다. 그런 녀석이 대면식이니 뭐니 하는 얘길 꺼내는 이유가 뭘까.
“그냥, 가고싶으면 같이 가주려고.”
그 말에 어쩐지 멈칫하게 된다.
걱정해주는건가.
고맙지만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이해하지만 조금, 가슴이 조여든다.
변한 나를 내가 자각하는 동안, 너도 변한 나를 인지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다가온다.
뭐, 그런건가. 나는 학과행사에는 어지간하면 얼굴을 비추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꼴이 되었으니 새삼 가는 것도 그렇겠지. 전역하고 나면 전역했다고 알릴 겸 개강총회 뒤풀이 정도는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모양이 되어버렸으니, 나 혼자 가려고 하면 여러모로 민망한 상황일거다. 평상시였다면 몰라도, 이 모양이 된 주제에 찾아가서 내가 이렇게 되었음을 광고하고 싶진 않다.
자연스레 따라오게 될 따가운 시선들도 별로 겪고 싶지 않고.
“안 가는 게 좋겠어.”
“그래? 뭐, 알았어.”
그러면 나도 갈 생각은 없다는 듯 설원은 커피를 쪽쪽 빨아댔다. 얌전히 졸업하자. 그리고 얌전히 여길 떠나자.
그게 내 지상목표다. 어차피 여기서 보내게 될 일 년을 시끌벅적하게 지낼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설원이 창밖을 쳐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 그러고보니....”
“뭐, 아는 사람 지나가?”
내가 창밖을 보자, 설원의 시선이 따라가고 있는 건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누군데?”
“서혜인이던데.”
“.......”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있었지. 설원이 중얼거렸다.
“쟤도 안됐네.”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니.... 일편단심 전역하기만 기다리던 마음 속 님이....”
그러면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걸 알면 억장이 얼마나 무너질까....”
“애초에 연애 할 생각 같은 거 없었어.”
저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군인이었고, 그렇기에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전역한 이후에도 연애를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아쉽게도, 내가 남자였건 여자건 간에 서혜인을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헛된 희망을 빠르게 접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선 차라리 내가 이 꼴인 게 쟤한테는 나을지도 모르지.”
내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자 설원은 빙긋 웃었다.
“헛된 희망이라도 있는 상태인 게 좋은걸까, 아니면 헛된 희망이라면 빨리 사라져주는 게 좋은걸까?”
“사람마다 관점은 다르겠지만 나는 후자 쪽을 좋아하는 편이지.”
“왜?”
“난 모든 종류의 질척임을 싫어해.”
질척거리는 감정이라거나, 질척거리는 관계라거나. 둘 다 혐오하는 편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깔끔한 편이 훨씬 낫다. 그러니 나는 나의 관점대로, 서혜인이 나를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이 차라리 낫다.
귀찮지는 않았지만, 답해줄 생각 없는 마음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도 편치는 않으니까.
설원은 내 말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여전하네.”
그 말이 무겁게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여전하다.
“...감동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지?”
“감동시키려고 한 말인데.”
“그 말 때문에 생기려던 감동도 전부 사라졌어.”
“아쉬워서 어쩌나.”
설원은 웃는다. 이 녀석은 이렇게 된 내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르는건가. 아니, 알겠지. 잘 알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걸 알고, 서로 침묵하며 모든 말을 꺼내는 데에 조심스러워지는 건 오히려 우리의 관계가 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우리의 관계가 변하는 게 싫다고 했다. 예전처럼 대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니, 설원이 말을 조심하고 내 이런 변화에 대해 언급하는 걸 꺼리는 것 자체가 예전같지 않다는 걸 말한다.
그렇기에 설원은, 조금은 무례할 정도로 내 변화에 대해 쉽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설원은 결국 생각이 많은 녀석이다.
“그래도 나는 꽤 좋은데 요즘.”
“...뭐가?”
“적어도 남들보기엔 내가 분수에 안 맞는 여자친구라도 생긴 것처럼 볼 거 아냐? 이 우월감. 오픈카를 몰고 시내를 달리는 그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고.”
취소.
“...이런 미친놈이.”
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해.
머리라도 한 대 후려주려는 찰나.
-지이잉
[태원에 있다며?]
[자세한 얘긴 학과장님께 들었다. 오늘 한 잔 하려는데 어때?]
[하고싶은 얘기도 있고.] - 구원효.
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굳어진다.
“뭐야, 헤어진 전 여자친구 문자라도 온 것 같은 표정인데.”
“아.... 뭐, 그 비슷한거지.”
“비슷한거라고?”
나는 그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런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타이밍일 줄이야.
구원효. 나와는 두 학번 차이가 나는 선배다.
“원효형이 지금 학생회장이었나?”
내 물음에 설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그럴걸? 왜? 그쪽 연락이야?”
“어.... 오늘 한 잔 하자는데.”
잠깐 고민한다.
박경률 교수가 학생회장인 원효 선배에게 연락을 하는 게 당연한걸거다. 무엇보다 그 쪽과 나는 꽤 인연이 있었으니까. 내 학교생활이 어찌될지 모르니 학생회장측에 사전에 연락해두는 건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겠지.
“괜찮겠어?”
설원이 묻는다.
“걱정되면 같이 가고.”
그 말에 나는 마음 한켠이 굳어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계속, 너는 나에 대해서 뭘 걱정하는거지?
“뭐가 걱정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걸 알면서, 나는 설원에게 경직된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다.
되물어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설원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 그야.... 이런저런....”
“이런저런 게.... 뭔데?”
뭘 걱정하는거지?
내가 ‘뭘’ 걱정해야한다는거지?
설원이 내 태도가 이상하자 다른 걸 물어온다.
“뭐야, 화났어?”
“화 안 났어. 내가 뭘 걱정해야 한다는건지부터 말해봐.”
“아니 그냥, 걱정이 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따로 만나는 거에 대해서라던가.”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니까, 내가, 뭘, 걱정해야 하는 거냐고.”
“아니, 잘 모르겠어. 갑자기 왜 이러는....”
이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당할까봐? 그걸 내가 무서워할까봐?”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이미 다음 말을 뱉어내고 있다. 설원의 표정이 굳어진다.
“왜 그래, 흥분한 것 같은데.”
이를 악문다.
갑자기 나사가 하나 빠져버린 것처럼,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하지 않아도 될 흥분을 한다.
설원은 나를 걱정하고 있다. 내가 사람들과 잘 지내도록 도와주려 하고, 곤란한 상황이 있으면 같이 가겠다고 말해주고 있다. 비단 이 말뿐만이 아니다.
학과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대면식에 같이 가준다고 하는 그런 순간에도 이 감정들은 내 안에서 쌓여오고 있었다.
그런 것에 화를 내는 건 분명히 이상하다.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이렇듯 설원이 나를 챙겨주려 하고, 내가 힘들진 않을까 생각해주는 건 분명히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어린애가 아니야.”
자존심이 상해서.
“네 걱정 따위 필요 없어.”
하면 안 될 말을 한다.
그 말에 설원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는다.
“네가 하나에서 열까지 돌봐줘야 할만큼 나약해지지 않았어.”
설원의 걱정이, 관심이 계속될수록.
나는 나약해진 나를 자각한다. 설원이 나를 신경써줄수록, 그것에 의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싫고, 자존심이 상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얼마나 겪었다고 벌써부터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싫다. 그래서 하면 안 될 말을 하고, 불필요한 적개심을 드러내버린다.
설원은 깊은 눈으로 나를 뚫어버릴 것처럼 응시한다. 내 마음 속 밑바닥까지 훑어내려는 것처럼.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리고 묘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건 비웃음이다.
“지금 네가 한 말이 제일 어린애같은 거 아닌가?”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린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닌데.
그런 의도가 아닌데.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거,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뭔가 말해야 하는데, 일어나서 잡아야 하는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차마 열리지 않고, 설원은 어느 새 볼 수도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내가, 왜 그런 말을 한거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선, 멍하니, 멍하니 앉아있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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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파탄의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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