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7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설원이 돌아왔을 때, 나는 그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 상관 없어.”
진짜로 상관없다는 태도다. 소문을 신경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편하게 지내는 게 더 좋다는거겠지.
“아냐, 내가 싫어.”
“사실이 아니면 아닌거지. 뭘 번갯불에 콩볶아먹듯이 오늘부터 나가겠대? 뭐하러 그렇게 남들 눈치를 봐?”
“무시하고 살 수는 없어.”
내 말에 설원은 고개를 젓는다.
“신경써야만 살 수 있는것도 아니야.”
“귀찮은 구설수에 오르는 건 싫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 말에 설원의 표정이 차분해진다.
“이거 서운하네.”
“...서운하다고?”
“그래, 서운해.”
차분하다기보다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태도였다.
“남자로 살거고, 평소처럼 대해달라며?”
“그렇지. 하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네가 그런 소문에 휘말리는 게 싫으니 나가주겠다는데 뭐 그리 말이 많은거야?
설원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 눈빛, 예전에는 마주할 수 있었지.
“그럼, 너부터 평소처럼 행동해.”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설원은 싸가지 없는 놈이다. 형이라 부르기도 하고, 너라고 부르기도 하고, 야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멋대로다.
이 녀석이 너나 야라고 부를 때는 둘 중 하나다. 기분이 엄청 좋거나, 기분이 엄청 나쁘거나.
기분이 나쁜거겠지. 평소처럼 대해달라 해놓고 나부터가 남들의 시선이니 뭐니 말하며 방을 나가겠다고 하는데.
“남들의 소문이나 이런 거, 좆도 신경 안 쓰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엿같고 짜증나지. 그런데.”
설원이 덧붙인다.
“이런 게 더 신경쓰이고, 이런 게 더 중요해.”
“.......”
신경쓰는 건 맞다. 열받고 짜증나는 것도 맞겠지.
“네가 소문 따위에 휘둘리면서 변하는 게. 더 중요한거야.”
나에게 달라진 행동을 보여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가.
내가 달라지는 게 걱정되어서 화를 내는건가. 나는 그런 설원의 태도를 보며 말한다. 말하려 하는데 살짝,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목을 가다듬는다.
뭐야.
나 주눅든건가?
설원이 화를 내서, 주눅든건가?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 계속 살라고?”
“나가도 상관은 없어. 솔직히 이 방 좁다고.”
뭐라는거지?
“어느 장단에 맞춰달라는거야 이 새끼야.”
“뭘 결정하건 그게 남 때문이면 그렇게 하지 말란 소리잖아. 내 방이고, 지내는 건 너고, 지내게 해 주는 건 나야. 그러면 나, 그리고 너. 이렇게 딱 둘이 얘기하면 되는거야. 둘만의 문제라고.”
그러니까 거기에 세간의 소문이니, 입방아니 하는 것들을 고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당연한 말인데, 잊고 있었다. 설원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 험담을 듣는 것.
사실이 아니면 그냥 그걸로 된거다. 사실이 아닌 일들이 어떻게 소문이 나건 상관없는 문제다.
설원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열받고 짜증나긴 하지만, 그것때문에 변하지 말아줬음 좋겠다고 말하는거다. 내가 설원을 생각해서 나가려 하는 것처럼. 설원 또한 나를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결정하지 말라고 하는거다.
“...말이 짧다 너.”
“알고지낸 게 몇년인데 아직도 형 대접 해주는 걸 고맙게 여기진 못할망정.”
설원이 그렇게 말하자 나도 어이가 없어져선 고개를 돌려버렸다.
“허.... 할 말이 없네.”
“나도 할 말 다 했어.”
-털썩
설원은 침대에 벌렁 드러눕더니 이불을 덮었다.
“뭐야. 벌써 자냐?”
“숙취땜에 죽겠어. 잘거야.”
아직도 술이 덜 깨 괴로운 모양이다. 설원은 하품을 하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나갈거면 여기 진술서 적어놓고 나가. 합당하지 않으면 볼기를 때려주겠어.”
“뭐? 볼기? 이 새끼가 이제 나를 막 패려고?”
“이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두들겨 줄 수 있는 아담한 사이즈잖아?”
설원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 웃었다. 이 새끼가 남은 심각한데 그걸 가지고 농담이나 하는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하, 미친놈....”
그리고 내가 웃자. 설원은 반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좀 웃어. 상판 구기고 있지좀 말고. 이왕 예쁜 얼굴인데, 웃는게 낫잖아.”
“뭐라는거지 진짜....”
나는 그 말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야.
그렇게, 농담처럼 말할 수 있는 상황인 것만은 아니야. 나는 지금 남자를 이성으로 보는 상황이라고.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고, 노력하긴 하겠지만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야.
그러니까 예쁜 얼굴이니 기왕에 웃으라는,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고싶진 않아.
하지만.
나는 어느 새 잠들어버린 설원을 보면서. 설원의 헛소리가 결국 나를 웃게 하려는 시도였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조금이지만, 웃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웃기지도 않는데 웃는 건 못 할 짓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다음 날,
나는 학과장 사무실에서 면담을 하고 있었다. 내 신분증과 진단서로 증명이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학과장은 신분증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허어.... 이거 참....”
학과장은 믿을 수가 없는지 나와 신분증을 번갈아 바라보곤, 진단서도 뚫지게 쳐다보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겠구나.”
“학적부 이전 제대로 해주시면 제가 고생할것도 없죠.”
그 말에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학과장 박경률 교수와 나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를 일방적으로 싫어한다.
그가 운동권 출신의 거물이었다가 변절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학생운동 당시 나를 사사건건 의도적으로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등록금 협상 관련한 학생활동을 주도할 때 예정에도 없던 특강을 잡아서 혼선을 준다거나 하는, 굉장히 치졸하고 지저분한 방식으로 나를 엿 먹였기 때문이었다.
아군이 아닌 변절자라면야 무시하면 될 일이었지만, 적이 된 변절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나는 그래도 그만둔 이후 그들을 방해하진 않았다.
결국 그가 재단에 잘 보여 차기 부총장 자리에 앉게될거란 것이 기정사실화된 이상, 그와 학교의 유착관계는 새삼 의심할 필요도 없다.
내가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나서, 그와 나는 술을 한 잔 했다. 딴에는 앙금을 풀고자 한 것 같지만 글쎄. 그 뒤로 친해지진 않았지만 악우(惡友)정도의 관계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모순을 품고 사는 것처럼, 그 또한 변절에 대한 죄책감을 나를 뒤에서 지원해주며 갚으려 했다. 물론 내가 제일 싫어한 것도 그것이었다.
뒤에서 팔짱끼고 ‘그러면 안 돼’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한 사람이 이 눈앞의 박경률 교수였으니까.
나는 여전히 그를 싫어하고, 그도 나를 싫어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와 나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니, 교수와 친하지 않은 학생들이 보기에 그와 나는 친해보일 것이다.
나의 박경률에 대한 감정은 혐오라기보다는 애증에 가까울 것이다. 박경률 교수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그래, 뭐 이건 내가 알아서 해주마.”
“네.”
“...그런데 괜찮겠어?”
“뭘 말씀이신지....”
“그대로 학교 다녀도 괜찮겠냐고, 너 개차반으로 살았으니까 이렇게 된 게 알려지면 해코지할 녀석들이 없진 않을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나도 실제로 그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해야죠.”
교수는 내 부모가 아니다.
그도 그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선생이 아니라 선배된 입장에서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으니까.”
“...말씀은 고맙게 듣겠습니다.”
명백한 거절이었고, 그 말에 박경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으면 안 말하시면 될텐데요.”
“전하고 같은 태도로 사람을 대해서 좋을 건 없을거다.”
박경률은 그렇게 말한 뒤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전하고 같은 태도라. 분명히 좋지는 않겠지. 내 태도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건방지고, 무례하다 말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내 힘이 약해졌으니 예전과 같은 태도로 사람을 대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런 해코지를 당하는 게 무서워 지금 행동거지를 조심한다면, 과거의 나는 덩치도 크고 싸움도 잘 했기에 사람들을 그렇게 대했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비열한 건 오히려 나다. 나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지 않고, 지금의 내가 비열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전과 같아야만 한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다.
“충고 새겨 듣겠습니다.”
학과장실을 나왔다.
이제 나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그대로 학교에 나가면 된다. 수업은 다음주부터 나가도록 하자. 다음주쯤 되면 나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져있을지도 모른다.
밖에는 설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박경률을 제대로 설득하는 게 안 된다면 설원을 증인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얘긴 잘 했어?”
“어, 뭐. 그냥저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라고 말하려는데 맞은편에서 누가 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맞은편에서 인사를 해온 녀석은 한정운이었다.
“어, 그래.... 잘 지냈냐?”
“.......”
그리고 녀석은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제야 나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다.
이 녀석은 내가 아니라 설원을 보고 인사한거다. 그런데 나는 당연히 나와 설원 둘에게 인사를 한 줄 알고 그걸 받아버린거고.
한정운 입장에선 처음 보는 사람이 제 인사를 받아버리니 누군가 싶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얼어붙어있자 설원이 움직인다.
“어 그래. 안녕.”
-툭
그러고 나서 설원이 내 어깨를 툭 친다.
“가자.”
“어, 응.”
설원이 앞서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뒤통수에 시선이 콕콕 박히는게 느껴진다.
건물 밖으로 나와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자기 상태에 대해 자각을 가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설원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모르게 그만....”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라지만, 앞으로 이렇듯 어색한 상황이 수없이 펼쳐질거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한정운, 오래 보진 않았지만 볼 때마다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그래도 그렇게 빤히 쳐다보다니. 조금 무례한 거 아닌가?
“저 녀석은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설원이 그렇게 말하곤 피식 웃는다.
“아니, 오히려 단순하려나. 방금 자기한테 말 건 엄청 예쁘장한 여선배가 누굴지 생각한다거나....”
“왜 시비냐?”
내가 눈을 부라리자 설원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렇겠네, 고학번이라고 누가 믿겠어? 새내기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어.”
어때, 이번 OT에 엑스맨으로 참가해보는건. 설원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고.
“힉!”
나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아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오히려 찔러본 설원이 더 크게 당황했다.
“......왜, 왜 이래?”
“이, 이상한 데 만지지 마!”
나도 당황해선 소리를 질러버렸다. 주변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와 설원을 쳐다본다.
이, 이런, 내가 무슨 소릴? 설원이 더 경악했다.
“내, 내가 뭐 어디 이상한 델 만졌다고 그래!”
“어, 어, 어....”
얼굴이 화끈거려서, 터져버리기라도 할 것 같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기묘해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대로 캠퍼스를 내달려 도망쳐버렸다.
무엇에서 도망치는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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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무일도 없는데 왜 쫄고들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