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6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인간은 본능을 이길 수 있는가?
-쏴아아아아....
샤워기 물을 맞으면서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본능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그 착각은 착각일 뿐이지만, 분명히 얻어낸 것들이 있다. 법률이 그러하겠고, 윤리가 그러하겠고, 도덕이 그러하겠지. 하지만 그건 사회가 사회로 기능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과 본성을 제한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본능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가며 인간은 규범을 만들었다.
하지만 말했듯 그건 사회적인 방편일 뿐.
온전히 개인에게 주어진 본능을 이겨내는 방편은 적다. 그저 참고, 그저 견디는거겠지.
본능을 억누르고, 참을 수는 있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거니까.
하지만 참는 것과 이겨내는 건 다른 문제다. 이긴다는 건 제압하는 것이고, 제압하는 건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본능을 이겨낸다는 건, 본능을 바꾼다는 말과 같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본능을 바꿀 수는 없다.
본능을 참아내고, 교화하고, 수양하기 위한 개인의 방편이라면 종교가 있을테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온전히 내 본능을 이겨내려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다.
나는,
남자에게 성욕을 느끼겠지.
그게 내 본능일것이고, 이제 나는 여성에겐 전혀 성욕을 느끼지 않을거다. 내가 걸린 질병은 그런거니까.
그걸 이겨낼 수 있나?
이겨내고, 나를 바꿀 수 있을까? 그런 시도는 해 본 적 없다. 나는 내 성애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고, 내 이성관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으니까.
여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는 내 삶에 불만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내가 게이가 아니라서, 바이섹슈얼이 아니라서 서럽고 슬펐던 적은 없다. 나는 젠더사회의 관점에서는 다수에 속해있었고, 소수를 이해했지만 소수가 되고픈 욕망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게 억지로 심어진 본능이 불쾌하다.
그것은 퀴어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내가 그렇듯 강제적으로 ‘교정’되어버린다는 것에 대한 혐오다.
내 선택이 아닌 것 때문에 내가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 싫다.
따뜻한 물을 맞으면서,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남자로 살거다.
아니, 남자로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이런 몸이 되었다 해서 변하지 않을거다. 예전의 나로, 과거의 나로, 얼마 전의 나로.
그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그저 몸만 변한 것처럼 살거다. 내 본능이 그렇게 바뀌어버렸다면, 그 본능을 비틀어버리건 어쩌건.
이렇듯 쉽게 무너져버리진 않을거다.
병 따위에,
정체도 모르는 바이러스 따위에 뇌를 지배당하는 것처럼, 무력하게 변해가진 않을거다.
지고 싶지 않다.
그래, 변하지 않은 건 하나 있다.
나는 승부욕이 강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싸움에서 지는 게 싫어서 때려눕혔고, 공부에서 지는 게 싫어 공부했다. 논파당하는 게 싫어 논파했다.
패배한 적 없었던 건 아니지만.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패배주의자의 삶을 살아온 적 없었다.
나는 패배할지도 모르지만.
패배를 기다리진 않을거다. 패배를 예상하지도 않을거다.
이기기 위해서, 지지 않기 위해서 발악하고 또 발악해서, 어떻게든 나라는 사람이 변하지 않았음을, 변한 육체 따위에 지지 않았음을 보여줄거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는 이렇게 되었지만 오롯이 나로 살고 있다고.
나로 살 수 있다고.
모두에게 보여주겠다.
유사준이 졌다고 해서, 나도 져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런 단순한 사실을 되새긴다. 그래야만 할 정도로 내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는 건 애써 외면하면서.
씻고 나와 새 속옷, 새 옷을 입고. 옷가지들을 챙겨 설원의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간 게 아니라 돌아왔다. 그 말이 뭔가, 재미있네.
여긴 내가 돌아올 곳인가.
한동안은 그랬지. 군생활을 할 때였으니까. 휴가를 나와서 올 곳이라곤 이 작은 자취방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생활은 이제 실질적으로 끝났다.
설원의 방에서 계속 지내는 것도, 이제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어간다.
나는 복학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모두에게 변한 나를 소개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고 피부가 따끔거리지만, 해야만 할 일이다.
이런 것 따위에 겁먹지는 않는다. 어차피, 나는 나를 이유 없이 증오하고 싫어하는 이들의 시선은 많이 받아봤다. 거기에 비웃음이 추가된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호감을 가진 사람도 꽤 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공포에 질린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설원이 괜한 오해를 사는 건 싫다.
나는 수많은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장본인이었고, 설원 본인은 모르지만 실제로 내가 그 녀석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상한 헛소문까지 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내 나름대로 추적해 제대로 지적을 했고, 초기에 소문의 싹을 밟아버릴 수는 있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대로 들은 건 박헌영에게서였다.
‘설마 그건가? 요즘 과내 지하조직에 형하고 설원을 엮은 BL소설이 돌아다니고 있긴 한데. 그것 때문에 소문이 난 걸지도....’
‘BL? 그게 뭔데? 그리고 뭐? 지하조직?’
‘음.... 어렵고도 심오한 질문이군. BL이란 말이지....’
듣고 나서 나는 기함을 토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냐? 어?’
‘2차 창작에 현실의 도의를 들먹이는 건 장르문학도로서의 태도가 아니기에....’
‘이새끼가? 그리고 그 지하조직은 뭔데?’
‘과내의 비밀 창작동아리야.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어.’
‘네가 회장이구만?’
‘그, 그건!’
‘맞구만. 야 이 개새끼야! BL인지 지랄인지가 강철서신이냐? 몰래 써서 돌려읽어? 이거 완전 미친놈아냐?’
결국 그 실체도 없는 불분명한 조직의 실체를 알아내는 건 실패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게도, 그 지하조직은 점조직이었다. 완벽한 익명성 때문에 박헌영도 누가 구성원인지 알지 못했다.
찾아내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박헌영과 나는 딜을 했다. 원본을 주고 완벽한 파기를 약속할테니 파헤치지 말라고.
결국 나는 그 미친 BL소설의(놀랍게도 텍스트 파일은 존재하지 않는 수기본이었다.)원본을 찾아내 현대판 분서갱유를 벌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했다.
설원이 알면 박헌영을 잡아죽이려 할 게 뻔하기에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일 적에도 설원과 나를 엮지 못해 안달이던 몇몇 음습한 취미를 가진 여학우들의 장난 반 악의 반 섞인 시선을 받은 적 있었다.
이제 내가 여자가 되어버렸으니 그들의 상상력에 불이 당겨질 수밖에.
아니지.
오히려 그 녀석들은 내가 여자가 되었으니 오히려 나와 설원의 그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으려나?
하지만 거기에는 BL을 쓰는 변태만 있는 건 아니다.
박헌영은 평범한 변태들이니까 너무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말했지만, 애초에 변태인 순간부터 평범하지 않은거다. 박헌영은 하드코어 변태라서 그들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결국.
나는 설원이 쓸데없는 소문에 휘말리는 게 싫다. 내가 학교에 돌아가면 같이 산다는 것도 알게 될거고, 그 변태 지하조직을 거치는게 아니라도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말들을 만들어낼거다.
나는 적이 많으니까. 분명히 그럴거다.
그러니까 학교로 돌아가려면 방을 구해야 한다. 설원과 계속 같이 지낸다면 설원은 불필요한 입방아에 또 오르내릴 것이다.
온전히 나 때문에.
신경쓰지 않는 척 하지만 그런 것에 민감하다. 괜찮은 척만 하며 사는 놈이 있다면 그건 설원이다. 항상 괜찮지 않은 녀석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괜찮은 척만 하고 있다.
녀석은 신경쓰지 않지만 나는 미안한 게 많다. 내가 만든 적이 관계없는 설원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악의적인 소문을 낸 적도 많았다.
이번에 나게 될 소문은 치명적일거고, 예상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선준이 TS바이러스 발작을 일으켜 여자가 되었고, 설원과 같이 산다.
나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정돈 갖겠지.
실제로 그렇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변했음에도 그게 역겹다. 설원은 어떨까. 그 녀석은 더하겠지 더욱 민감하니까.
그러니까 나가줘야 한다.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