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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75화 (175/224)

00175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밥을 먹고, 박헌영과 설원이 수업에 간 동안 나는 박헌영의 방에 왔다. 샤워를 좀 해도 되겠느냔 말에 박헌영은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로 살겠다.

그것을 더 이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까지라는 전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변할 생각은 없다.

나는 젖어가듯 내 변화를 관망하지 않을거다.

나는 체념하며 살아오지 않았고, 포기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내 삶은 언제나 내 선택에 의해 결정되어왔다. 불가항력적인 일은 이번뿐이었다.

초탄에 무너지기에 내가 살아온 삶은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남자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남자로 살아온 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무언가를 상실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그 마음은 더더욱 강해졌다.

더 이상 다른 걸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옳진 않더라도 답을 찾으려 노력했고, 그 답을 찾으면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 내 삶의 대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 그러니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거다. 행동할거다.

몸 따위가 변했다 해서 정신까지 이 이상 변하게 할 수 없다.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야만 한다. 변해버린 나를 알아야 나를 지킬 수 있다 여겼고, 나는 의식적으로 내 몸, 그리고 내 얼굴을 보는 행위 자체를 외면해왔다.

피할 수만은 없다.

나를 봐야 한다.

변한 나를 알아야.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세면대 앞에 선다. 설원의 집보단 넓지만, 결국에는 좁은 화장실에서.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알몸의 나를 마주한다.

연갈색의 긴 머리, 약간 곱슬한 느낌은 있지만 부스스하진 않았고, 윤기가 흐른다. 아, 이건 윤기가 아니라 머릴 안 감아서 떡진걸지도 모르겠군.

머리칼의 색과 비슷한 옅은 연갈색의 눈동자. 긴 속눈썹, 그리고 그리 두껍진 않지만 미려한 눈썹.

그리고 선홍빛의, 조금 얇은 것 같은 입술.

오똑한 코.

가는 턱선.

이 작은 얼굴에 그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게 신기해서, 나는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이렇게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이렇듯 명확하고 또 섬세하게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너무 약해보인다는 것이다.

얼굴만 보자면 너무 착하고, 너무 상냥해서 손해만 보고 살 것 같은 그런 인상이다. 실제의 나와는 너무나 거리감이 먼 인상이다. 화장을 조금 진하게 하고, 눈썹과 루즈를 인상적으로 사용한다면 그런 인상은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을거다.

물론, 화장을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하지만 너무, 착해보여. 평생 손해만 보고 살 것 같은 이 얼굴에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애정이 생기지 않는 건 낯선 것이 대부분의 이유지만.

사나워보이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 있듯, 내 얼굴은 선량하고 상냥해보이면서, 아름다운 얼굴이다.

어딜가나 눈에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인 건 분명하다. 조금 앳되어 보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매력적인 얼굴이다.

내 심미안이 이 얼굴을 만들어낸 거라면.

그렇게까지 절망하진 않아도 되겠어. 적어도 과거의 내가 심미안만큼은 똑바로 박힌 놈이었다는 걸 증명해주는 유일한 흔적일테니까.

시선을 조금 아래로 향한다.

너무 얇아서, 부러질 것 같은 목. 그리고 도드라진 쇄골뼈. 힘이 조금 센 남자가 툭 하고 치면 부러질 것처럼 가냘프게 도드라져있다. 가슴은 나도 아는 것처럼,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없는 건 아니지만, 있다고 자랑할만한 그런 것도 아닌 수준이다.

그리고,

분홍색, 이네.

쉽게 보기 어려운 색이긴 하지.

내 심미안이 이 몸을 만든 게 아니길, 방금 전과는 다른 생각을 간절히 한다. 너무나 다행인거고, 이미 알고 있지만 음모는 있다.

나는 그래도 박헌영만큼의 변태는 아니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키는 작지만, 의외로 골반은 꽤 그럴듯하다. 흉부와 골반의 발달을 바꿔치기라도 했는지. 허리는 잘록하다.

그럼에도 엉덩이가 그리 큰 건 아니다. 그리고 매끈한 허벅지와 종아리를 지나쳐. 작은 발을 내려다본다.

희고 작은 발.

발가락, 그리고 손가락 끝까지. 입을 벌려 치열까지 확인해보는, 굳이 안 해도 되는 짓거리까지 했다.

겨드랑이털은, 없다.

머리털이 자랐던 걸 보면 이게 나중에 자랄리는 없겠지. 아예 안 나는 그런 체질인가.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든다.

만약 겨드랑이털이 수북했다면.

나는 제모를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해도 웃기는 꼴일 것이고, 안 해도 웃기는 꼴일 것이다.

가정은 우습다.

나지 않으니까. 생각하지 말자.

그 모든 걸 훑어보고,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고 난 뒤에. 다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하아....”

나는....

남자로 살기로 결정했지만.

그런 결심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절감할 정도로.

아름답다.

눈이 부시다는 말까지는 쓰기 어렵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내 몸과, 내 얼굴에 실례일 정도로 매력적이다.

남자로 살고자 한다면, 내 생각과는 별개로 일단 세상이 나를 남자로 내버려둬야겠지.

하지만 나를 남자로 내버려두는 건 오직 나 자신일 뿐, 세상이 나를 남자로 인정하지 않으리란 빤한 미래를 알아버린다. 나를 보니 확신하게 된다.

그 누가 있어서. 나를 여자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 설원과 박헌영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할 자신조차 없다.

친구니까, 남자였던 친구를 이성으로 본다는 것 자체를 역겹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나는 그 역겨움을 믿는다.

역겨운 일이니까. 나를 그렇게 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바람이 공허할 정도로, 거울 속의 나는 아름답다.

이건 나르시즘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아도취는 절대 아니라 장담할 수 있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그 어떤 음심(淫心)도 생기지 않는다. 매력적이다. 아름답다는 객관적인 평가는 내리고 있으되.

욕망이 전혀 동하지 않는다.

내 몸이 아름답다는 것에 감동하거나, 그 아름다움을 내 스스로 누려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남자로 살기로 다짐했으니.

남자인 나는 이성애자였으니까.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음심이건, 이런저런 생각이건 들어야 할텐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남성의 성욕과 여성의 성욕은 다른가?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라서 내가 감각하고 있는데 감각하지 못한다 착각하고 있는건가? 하지만 나도 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저 내 몸에 대한 평가만을 내렸을 뿐, 그 몸을 통해 어떤 욕망도 투영하고픈 생각이 없는데. 이런 게 성욕일리가 없다.

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나를 보기로 했으니, 알아야 하고 인정해야만 하겠지.

나는 하나를 더 잃었다. 며칠 전에 잃은거겠지만, 깨닫는 게 지금일 뿐이다.

내게, 이제 여성은 더 이상 성애(性愛)의 대상이 아니다.

생각과 판단보다 앞선 나의 본능 때문에 그걸 안다.

나는 더 이상 여성을 보고 두근거리지 않을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내가 무엇을 사랑할지는 내 정신이 결정하는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내게 나의 지금을 알려준 건 정신이 아니라 본능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바뀌어버렸고, 그 근본적인 변화는 내 본능마저 바꿔버렸다.

하지만.

사람은 본능대로만 살아가는 건 아니다. 내 본능이 그렇게 변해버렸다 해서 내 정신이 그걸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이 그걸 인정하는 게 아니다. 나는 정신으로는 여성을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 나 자신의 본능과 마주한다.

나의 정신이, 나의 마음이.

정신과 본능 사이의 섬뜩한 괴리감이.

어마어마한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뭔가, 잘 알 수 없지만,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혐오스러운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본능과 정신이 따로도는 이 이질감이 두렵다.

TS바이러스라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변화의 실체는 이거라고, 확신한다.

누군가를 남자로, 여자로 바꾸는 게 표면적인 변화라면.

그 변한 사람의 본능마저 바꿔버리는 것이 TS바이러스의 실체다. 그 사람의 정신과는 관계없이, 그 정신과 상반되는 본능을 심어버리는 것이 이 질병의 실체다.

본능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믿어왔는데.

나는 나를 얽매는 강렬한 확신 때문에, 본능을 이길 수 없다는 절대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정말로.

이제 여성을 사랑할 수 없어. 아니, 사랑할 순 있어도 욕망을 느낄 수는 없다.

그건 내 이성을 뛰어넘어 나조차 모르는 나의 본능에서부터 올라오는 욕망의 말이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건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내가 쌓아왔던 생각과 사고가 무너진다.

사람은,

본능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어째서 이런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거지?

왜 이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거지?

“욱....”

역겨워서.

“우우욱!”

혐오스러워서.

“우웩!”

서러워서.

“우우으엑!”

토해낸다.

토하면서, 먹은 걸 게워내면서 깨닫는다.

유사준은 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역겨움과 혐오스러움을 견디지 못한거다.

강렬한 깨달음이 온다.

아마, 너도 이걸 느꼈겠지.

유사준, 너도 나와 같은 변화를 겪었으니 너도 알았겠지.

이윤희를 사랑했을거다. 변한 후에도, 여전히 사랑했을거다. 정신은 그러하니까.

하지만 본능은 어떠한가.

그녀를 사랑하되, 욕망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제일 먼저 마주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거절의 말을 들으면서 실제로 슬퍼했을 것이고, 그 오열은 분명히 진짜였다.

그 슬픔도 진짜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은 것도 진짜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면. 유사준은 그 말에 의해 무너졌다.

하나님의 뜻인지 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유사준은 제 마음을 제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을거다.

이윤희를 사무치도록 사랑하고, 이뤄질 수 없어 숨조차 가누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했지만.

동시에 그녀를 ‘전혀’ 성적으로 욕망하고 있지 않은 자기 자신을 알았을거다. 그의 인내는, 믿음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맺어지면서 얻게 될 첫날밤에 대한 것도 있었을거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잘 기다려온 자신에 대한 감격, 그리고 상대에 대한 감격의 순간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유사준은 그것을 전혀 그리고 있지 않은 자기 자신을 마주했을것이다. 그건 이윤희를 만나며 확신으로 바뀌었겠지.

정신으로는 여전히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이, 하루아침에 무언가 거세된 것 같은 느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자기 자신이 역겹고 혐오스러웠겠지.

그리고 부조리를 느꼈을거다.

왜, 이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맺어질 수 없게 된 것도 서러웠겠지만.

하루아침에 자신의 본능이 거세된 것에 대한 서러움과 분노도 있었을거다. 유사준의 처지가 되니, 그의 죽음이 이해가 된다. 그는 그 괴리감 속에서, 자기 자신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와 섹스를 하자고 한 거였다.

여성에게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건지 확인하고 싶어서.

이젠, 정말로 남자에게 성욕을 느끼고, 그에 정욕을 느끼는 그런 본능이 자신에게 각인되어버린건지 확인해야만 해서.

그래서 내게 그런 부탁을 한거였다.

생각하기 두렵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성애를 느낄 수 없는 나는 그렇다면.

남자에게 성애를 느끼는 사람이 되어버린건지에 대해, 유사준은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나 또한 확인했다.

그 날 밤,

역겹고 더럽고 처참한 기분 속에 뒹굴면서 확인했다. 나는 긴 시간을 인내하고, 고뇌하고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 날 밤 헐떡이는 유사준을, 안겨오는 그, 아니 그녀를 보며 이미 알아버렸다.

TS바이러스 발병 남성은.

남자에게 성애를 느낀다.

“흐으으.... 으윽.... 윽!”

그걸 안 유사준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어했을 것이고.

자신의 삶과 모든 기다림과 고뇌, 그리고 신앙이 무의미하다 여겼을 것일테고.

그 모든 고통을 스스로 견뎌낼 수 없는 탓에.

죽음을 택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기폭제였겠지만, 그건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일 뿐.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

그리고 본능을 이길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변기를 부여잡고 주저앉아서 몸을 덜덜 떤다.

알면 안 되는 걸 알아버렸다.

나 자신을 마주하려다가 알아선 안 되는 것까지 알아버렸다. 그리고 내가 한 실수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까지 깨달았다.

유사준과 나는 같은 상황이다.

TS바이러스 발병 남성.

나도,

내 본능도.

남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을거다.

“아.... 아.... 아아....”

그런 건 싫다.

혐오스럽고 끔찍하다.

내 정신과는 무관계하게,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내가 변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혐오스럽고 끔찍해서. 누구에게 묻고, 그럴 필요도 없이 그 사실을 내가 이미 느끼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을 눈으로, 몸으로 확인까지 해버렸다.

그렇기에.

“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른다.

============================ 작품 후기 ============================

이선준은 설원보다 조금 더 일찍 깨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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