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4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여성용 속옷을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체 사이즈를 재는 건 별로 부끄럽지도 않았다. 다만 걱정인 건, 내가 들은 숫자를 내가 다음에 속옷을 살 때도 기억할 수 있냐 아니냐 하는, 그런 작은 문제가 다였다.
옷차림에는 그리 신경쓰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도 않았다. 거기에 모든 걸 걸지도 않지만, 못나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라는 마음 정도는 있었다.
그렇기에 무난하며, 동시에 스타일에는 적당한 관심을 두고 살았다.
하지만 나는 활동하기 편한 트레이닝복을 몇 벌 샀을 뿐이었다.
예쁜 옷, 마음에 드는 옷 따위를 살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어쩐지 마음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가버리듯, 나를 이루던 뭔가가 사라져버린 공허감이다.
언젠가는 입을지도 모르지, 좋은 옷, 예쁜 옷, 이렇게 된 내게 잘 어울리는 옷.
다만 지금 사고프지 않을 뿐.
별로 큰 고민을 하면서 산 것도 아닌데, 어느 새 설원에게 메시지가 온다.
[밥 먹을건데, 박헌영이랑 같이 먹을까?]
박헌영에게 이야기를 할 때, 설원이 같이 있으면 설명하기 더 편할거다. 그걸 생각해서 말한거겠지.
갑자기 그런 설원의 태도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평범한 배려가. 갑자기 내 손을 떨리게 만든다.
당연하지 않아서 싫은 게 아니라, 당연하지 않게 느껴져서 고맙다.
[걱정해주는거냐. 고맙네. 그렇게 해.]
원랜 이런 말 잘 안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형 걱정이 아니라 박헌영이 걱정돼서.]
이건 무슨 소리지?
[그 변태새끼가 뭔 개소릴 할지가 걱정돼.]
그러고보니 그건 그러네. 그 변태놈이라면, 내 이 작은 체구에 대고 무슨 미친소리를 할지 모르겠어.
갑자기 우스워져서 피식 웃는다.
넓게 살았던 순간들이 우스워져서.
결국 이렇게 좁은 관계에 만족하며 살리라는 걸 그 때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좁게 살걸.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살 걸.
내가 알았던 대부분의 것들, 두려워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니까.
좁게 살지 않았던 것이 막연히 후회된다.
“새내기?”
박헌영은 날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아니.”
나는 그렇게 말했고.
“이선준.”
설원은 나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으며.
“...네 여자친구 이름이 선준이 형과 같은 건.... 네 왜곡된 브로맨스가.... 드디어 마지막 선을 넘었다. 뭐 이런 의미인거냐?”
박헌영은 역시나 이해를 제대로 못 하고 미친소리를 했다.
“뭐래 미친놈이.”
설원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내 볼을 쿡 찔렀다.
“이선준이라고.”
“아니 그러니까.... 상당히 아리따운 분이신 건 알겠다만....”
정말 너는 그렇게까지 되어버린거냐! 이름만이라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이거냐!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박헌영도 여러 의미로 대단한 자식이다. 설원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항상 노래를 처 부르던 그 TS바이러스 걸린 이선준이라고.”
“......어?”
버퍼링.
“뭐라고?”
의문.
“지, 진짜?”
의심.
“미친!”
경악.
그리고 잠시 뒤, 박헌영은 피식 웃었다.
“야, 설원. 구라를 치려면, 좀 더 치밀하게 쳐.”
“...진짜야.”
그 말을 한 건 설원이 아니라 나다. 장난을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박헌영이 이 상황이 좀 악질적인 장난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거다.
“진짜라고.”
나는 화를 내진 않는다.
다만 조금 처참해져서, 박헌영의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조금 돌리고, 쓴웃음을 짓는다. 박헌영도 그제야 뭔가 실감이 다가오는 듯, 얼이 빠져버린다.
“이, 이선준.... 선준이 형이라고?”
“그래.”
상당히 아리따운 분이신 건 알겠다만.
박헌영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래, 나는 그렇게 설명해야만 하는 사람인거겠지. 차라리 다행 아닌가. 못생기진 않았다는 게. 그래도, 매력적이긴 하다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
불쾌함과 낯섦, 그 경계 어디 즈음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박헌영을 본다. 내가 내려다봤던 두 녀석 모두. 이젠 내가 올려다봐야 한다.
“자세한 사정은 밥 먹으면서 설명할테니까.”
가자.
라고, 작게 덧붙였다.
박헌영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내 설명을 들었다. 가감없이, 전부 이야기했다. 긴 이야기고 동시에 충격적인 이야기일테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박헌영은 얼이 빠져 있었다.
“...괜찮아?”
박헌영은 모든 말을 듣곤 제일 처음 그렇게 말했다.
“너에게 아리따운 분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아주 괜찮지 않았어.”
“씨발.”
박헌영은 자신이 그 말을 한 대상이 나라는 사실을 알자 몸을 부르르 떨며 제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여러모로 리액션이 괜찮은 놈이다.
“미안, 내가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고.”
“그런 의도가 뭔데?”
내가 묻자 박헌영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니, 진짜.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니, 그랬다 하더라도 이젠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그런 게 뭐냐고, 이 변태새끼야.”
내가 눈을 부라리자 박헌영은 얼음처럼 딱 굳어선 고개를 숙였다.
“실언을 용서해 주십쇼.”
“......밥이나 먹자.”
우리는 국밥을 먹는다. 나는 먹으며 말한다.
“대단찮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예전대로 대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성형수술을 한 정도라고 생각해.”
“비약이 심한걸.”
설원의 말이었고, 내가 눈을 부라리자 설원은 허겁지겁 국밥을 한 술 뜨다가 입천장을 데었다.
“아뜨뜨뜨.”
성형수술을 한 정도. 그래서 얼굴이 바뀐 정도, 그렇게 생각해줘라. 그렇게 말했다.
“성형수술 한 정도라고 말한 건 분명 비약이겠지만, 예전처럼 대해줬으면 좋겠다는 건 진심이야.”
그리고 박헌영과 설원을 번갈아 쳐다본다.
“어렵냐? 어려우면 말해.”
“어렵다고 하면.... 어떻게 할건데?”
박헌영의 말에 나는 피식 웃는다.
“내가 좀, 우울해지겠지.”
그것 말곤 아무것도 없나.
나를 달리 대한다 해서 내가 강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하니까.
이 녀석들은 나를 생각해주고, 그렇기에 노력하겠지. 하지만 그 노력이 항상 그대로 적용되고 결과로 나타나는 건 아니다.
나를 그대로 대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겠지. 그건 전적으로 이 두 녀석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대하지 못한다면 너희들을 버리겠다.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버리다니,
난 이제 뭔갈 버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자신감도 사라졌고, 용기도 사라졌으니.
너희들에게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하는 입장이 더 어울리겠지.
시간이 지나서, 내 스스로가 이 꼴에 체념하게 된다면.
너희들의 여자인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건 지금이 아니다.
“나는 남자야.”
박헌영도 설원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거야.”
하지만 그런 내 말이 발악에 불과하다는 건 나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박헌영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고.
“그렇게 해.”
설원은 그렇게 말했다.
============================ 작품 후기 ============================
그렇게 해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