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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73화 (173/224)

00173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으윽.... 왜 때리는데!”

설원이 빌빌거리면서 힘겹게 일어나고, 나는 시간표를 들이밀었다.

“수업이나 가라고.”

“속이.... 안좋아.... 이 상태로 가면.... 죽어....”

“죽어도 출석은 찍고 죽어.”

설원이 비몽사몽하며 아직도 술이 덜 깨서 헛소리를 중얼거린다. 예전이라면 뺨을 후려갈겼겠지만 이제 내 힘은 이 자식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물을 틀었다.

-쏴아아아아....

“끼얹는다?”

“아, 뭐해.... 일어나, 일어나면 되잖....”

내가 세숫대야를 들어올리자 설원은 벌떡 일어났다.

“미친! 일어났어! 일어났다고!”

내가 진짜로 뿌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저러는 것이다. 설원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세면실로 가 이를 닦기 시작한다.

“으흑! 차가워!”

보일러가 고장난 탓에 차가워 죽겠는지 잠은 확 달아난 모양이다. 내가 왜 저 자식 학교 가는 걸 신경쓰고, 또 짜증내는 것까지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얼빠진 놈.

설원은 찬물 때문인지 씻고 나왔을 때에는 정신이 번쩍 든 표정이었다.

“아까 나 죽일뻔한 거 알아?”

“왜?”

“전기장판에 누워서 자는 사람한테 물을 뿌리면 곱게 죽을 것 같냐?”

“깜박하긴 했지만 안 뿌렸으니까 됐잖아?”

“...진짜 몰랐구나. 소름.”

뒈질뻔했어. 설원은 중얼거리며 머리를 수건으로 털더니 옷을 대강 갈아입었다. 내가 신경쓰지 않길 바란다고 하니 아무렇게나 갈아입는 모양이다. 나도, 굳이 쳐다보진 않는다.

“씻으려면 보일러 고장났으니까 박헌영네 방 가서 씻어. 비밀번호 알지?”

“아, 연락부터 해야지.”

찬물샤워는 일도 아니지만 아침 추위에도 벌벌거리는 이 몸이 찬물을 맞으면 어찌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설원에게만 말하고, 아직 박헌영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설원은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또라이 변태새끼 진짜.”

또 박헌영이 이상한 사진이라도 보낸 모양이다. 설원이 변태라고 칭하는 건 박헌영 이외에는 없으니까.

여러모로 나와는 안 맞는 녀석인데, 설원이 아니었다면 박헌영과도 친해질 일은 없었을거다. 설원이 대충 옷을 챙겨입고 나가며 묻는다.

“아침은?”

“알아서 먹을거야.”

“아니, 그럼 난 혼자먹으라고?”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네 아침 얘기하는거였냐.

“일교시 끝나면 연락할테니까 같이먹어.”

“그래.”

-덜컥

설원이 학교에 가고, 나는 방에 혼자 남았다. 씻으러 박헌영의 방에 갈까. 어제도 씻지 못하고 잤으니, 오늘은 씻어줘야 할 것 같은데.

역시나,

옷도 조금. 사야 할 것 같고.

어제 설원이 사온 속옷은 한 벌뿐이라서, 꽤 많은 생필품이 필요하다. 돈은....

그리 많지는 않다.

절연한 이후, 돈 때문에 우울할 일이 많다. 이젠 그 절연에 대한 이유도 사라져버렸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집에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게 된다면, 등단한 이후일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꼴이 되었는데, 등단은 커녕 글을 쓸 수나 있을까.

원래도 생각이 많았지만, 생각은 점점 더 많아지기만 한다.

답 없는 문제들이 매일 생겨나고, 그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 내 안에 쌓여간다.

“하아....”

한숨을 쉬고 나서 놀란다.

한숨을 쉬는 게 얼마만이었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무서워하는 것이 거의 없다. 거의 없다는 건 있긴 있다는 말이지만,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대개 관념이었다.

굳이 꼽자면 미래. 혹은 정의, 그런 것들이었다. 한 마디로 규정되지 않으며,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된 그런 것들을 두려워했다.

사람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었다.

내 인생은 항상 잘 풀린 건 아니었지만, 내 뜻대로 내 삶을 움직여왔다. 글을 쓰고 싶어 썼고, 그것을 더 하고 싶어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으며, 그 과정에서 부모와 다소의 마찰이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버리려면 버려라.

당신들은 내 삶을 강제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부모가 나를 낳은 건 선택이지만, 내 태어남은 선택이 아니었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는 내게 윽박지르다 지쳐 울었다.

나는 그 앞에서 울지 않았다.

완벽한 절연선언을 들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를 미워하지 않지만, 부모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굳이 매달리진 않겠다고 여겼다. 부모는 나를 도구로 취급하진 않았으되, 아끼지도 않았으니까.

어디 가서 쪽팔린 짓거리를 하지 않길 원했고, 학생운동을 하는 자식은 쪽팔린다며 나무랐으니까.

그래,

나는 내 삶을 내가 정하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벌어졌던 어용 체대생들과의 마찰에서도 나는 주눅든 적 없었다. 주먹질이 날아오면 맞받아쳤고, 어른이 되어서 못난 짓거리였지만 싸움도 숱하게 했다.

결국 정치란 개싸움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정치는 진흙탕물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는 그 정치에 한 발 담궜던 입장으로서 수많은 더러운 꼴을 봐왔다.

설원은 내 친구다.

하지만 나와 같이 학생운동을 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설원과 겹치지 않는 수많은 지인들이 있다. 일부는 내게 호의적이고, 일부는 나를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다는, 거의 죽이고 싶어한다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내 적은 넓게 보자면 재단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어용학생회 놈들이었고, 작게 보자면 내 노선에 반발하거나 내 활동 자체를 싫어하는 과내세력이었다.

그들은 세력이라기보다는 파편화된 개인이었고, 그들은 대개 뒷짐지고 팔짱 낀 채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밀어내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봅시다.’

함께 고민하고 다른 답을 내린 뒤, 같이 활동하자고 말했다. 내 논거와 활동에는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들은 항상, 그 말 앞에서 작아졌다.

과제가 많다.

그 날은 약속이 있다.

시험기간이다.

글을 써야 해서.

핑계는 항상 달랐지만 그들은 결국 항상 뒷짐지고 팔짱낀 채 삿대질을 하는 그 이상의 행동을 보여준 적 없었다.

‘그 새끼들은 그냥 형이 싫은거야.’

‘싫어하면 자기들이 주도권을 가져가면 될 거 아냐? 삿대질만 하면 뭐가 달라져?’

‘그건 귀찮거든. 말은 쉽지만 움직이는 건 어려워.’

‘그럼 그 삿대질하고 참견에 무슨 의미가 있는건데?’

‘역시 뭘 모르네. 삿대질 자체에 의미가 있는거야.’

설원은 그렇게 말했다.

‘비웃는 건 쉬워.’

그 때도 술을 마시고 있었겠지.

‘그리고 재미있지.’

그들은 그저 내가 싫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를 비웃으며 나보다 낫다는 우월감에 취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앞에서 나대는 나라는 녀석과 행동하지 않는 이유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 녀석하고는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함께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나와 다른 어떤 행동을 했는지 물어보면,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그저 방관자일 뿐이면서, 그 방관에 이유를 부여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를 비웃고 뒤에서 헐뜯으며 작은 우월감에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바깥의 적보다 안의 적들이 나를 더욱 혐오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는 데에 더욱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모든 것에 환멸을 느껴버리고 전부 그만둬버렸다.

내가 그만두면 언제고 자기가 앞장서서 하겠다 말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침묵했다. 오히려 왜 그만두냐고, 네가 없으면 누가 하겠냐고 태도를 바꿨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역시,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이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싸우기 위한 싸움.

투쟁하기 위한 투쟁.

그러기 위한 작은 차악의 용인.

그리고 작은 차악을 용인하기 위한 조금 더 큰 차악, 그 다음, 다음, 다음의 차악으로 넘어가면서.

결국 나는 내가 속한 집단이 내가 혐오하는 것과 닮아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만뒀다.

그만두면서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회유하고, 설득하고, 을러대는 것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배신자,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어용 학생회에서 내게 손을 뻗어왔다.

같이 하자고. 내가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그 쪽이 갖게 되는 수많은 어드밴티지와 상징성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래도 이 작고 비루하고 비참한 태원대학교의 정치생태에선 꽤나 거물이었으니까.

물론 나는 그것도 거절했다. 그리고 입대했다.

인간관계가 좁은 설원과는 달리, 나는 아주 많은 지인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내 적이다. 한 때 마찰을 빚었던 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고, 한 때 함께했던 사람들도 이젠 내 적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지나가다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내 적들은 대개 나를 뒤에서 험담하는 편이었으니까.

말이 앞서는 사람은 그들이 좋아하는 말로 뭉개버렸다. 그들의 논리를 논파하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사람 쪽은 더 쉬웠다. 주먹으로 뭉개버리면 그저 그뿐이었으니까. 그들은 단순해서, 주먹으로 짓뭉개진 뒤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눈을 깔고 지나갔다.

결코 나는 그런 시비를 먼저 건 적 없었다.

다만 걸려오는 그런 시비를 피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내가 거리에 나왔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와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거리에서.

나만 알아보는 수많은 얼굴들을 보며.

결코 나를 좋아하지 않을 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나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를 생각하면서.

문득, 두렵다는 생각이 왈칵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말이 앞서는 쪽은, 여전히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꼴이 된 나를 비웃을테고, 그 비웃음을 나는 수없이 감당해야 할거다.

주먹이 앞서는 쪽은? 혹시나 내가 이렇게 나약해졌단 사실을 알고 나서, 나를 완력으로 억누르려 한다면? 제압하려 한다면?

싸움은 기술로 하는 게 아니라, 잔인성과 깡으로 하는 거라지만.

내 가는 팔다리로 얼마만큼의 잔인성과 깡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빤하다. 얻어맞고, 골목에 쓰레기처럼 버려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나는 법이 생각보다 꽤 멀리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씨발 수업 가기 존나게 싫네.”

“야, 새내기 걔 있잖아. 쌔끈한애, 오늘밤에 좀 불러봐.”

“아, 또 씨발 뭔 짓거릴 하려고....”

“뭐 어때 새끼야. 너도 좋았으면서.”

체대생 둘이 지나가고, 나는 그들을 내가 알고 있음을 안다. 여전히 저열한 놀음을 하고 있는지.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진다. 예전이었다면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깔며 지나갔던 두 녀석이다.

우리 과 후배들을 조금 잘못된 방식으로 건드리려 하다가 내게 들켰고, 작은 폭력이 있었다.

서로 함구하는 조건으로 끝맺었지.

“야, 봤냐?”

“어.”

“어느과냐?”

“내가 어떻게 알아 미친놈아.”

이렇게 변한 나를, 곁눈질로 살짝 훑고가며 저들끼리 나를 향해 뭔가 쑥덕이는 걸 들으면서.

“캐봐 좀!”

“아 이 또라이새끼가 또....”

과거였다면, 그 놈들을 불러세워 뭘 속닥거리냐고 불러세웠을 나인데.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으면서도 듣지 못한 척 앞으로 걷는 나를 본다.

내 몸이 이렇게 되면서, 나는 많은 걸 잃게 될거란 직감 정도는 하고 있었다.

“.......”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게된다.

그리고 무엇을 얻어버렸는지 알게된다.

잃은 것은 용기.

얻은 것은 두려움.

시시각각 다가오는 실감과, 그 실감을 애써 외면하는 나를 느끼면서.

나는.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 하며 걷는다.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 일이 매우 드물었고, 나는 나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곧 괜찮아질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을 해야 한다.

괜찮아질거라는 확신이 없기에.

괜찮은 척.

듣지 못한 척.

걸어간다.

여성용 속옷을 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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