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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72화 (172/224)

00172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그리고, 지금 형은 그것도 중요한 문제지만 다른 것도 신경써야 할 때잖아. 아니, 오히려 이 쪽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뭐가?”

“대체 그거, 어떻게 되는거야?”

여자가 된 나에 대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 이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다른 문제가 너무 나에게 무겁게 다가온 탓이다. 대소변 같은거야. 뭐, 별 문제는 없었지만.

“돌아가진 못한다던데.”

“...죽거나 뭐 이런 거 아니지?”

“그렇지는 않다고 들었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탓에,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내 몸은 분명히 변했는데,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아직 마주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변화에 대한 실감은 유보되었다. 설원은 홉뜬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 옷. 입지 마.”

그리고 갑자기 쪼잔한 소리를 한다.

“......예전엔 잘만 입었는데 갑자기 지랄이냐?”

실제로 내 사복도 여기에 짱박아뒀고 이 녀석의 실내복과 내 실내복이 뒤섞여 서로 주인을 알 수 없게 된 옷도 많았다. 그러니 정작 이 녀석 옷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설마 여자가 입었던 옷을 자기가 입기 싫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인건가?

“너 내가 여자로 보이냐?”

어쩐지 가시돋친 말투가 튀어나왔지만, 설원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인상을 팍 썼다.

“여자고 나발이고 간에 헐렁해서 질질 내려가잖아. 꼴보기싫어.”

실제로 목이 넓어서 쇄골도 훤히 드러나고, 트레이닝복은 추켜올려주지 않으면 계속 내려간다. 속옷도 설원의 드로우즈를 입고 있었다.

설원도 그걸 알고 있었다.

“뭔가, 역겹지 않아? 남성용 드로우즈를 입은 여자라니. 뭔가, 개, 뭐라고 해야하지. 좆같은 건 아니지만 미묘하게 개, 좆, 같은....”

설원은 정말, 나를 여자로 봐서가 아니라 내 꼴이 정말 말로 형언하기 힘들 만큼 열받는 모양이다. 하긴, 나를 여자로 보면 그게 우스운거지.

그런 상대랑 섹스를 한 나야말로 역겨운 미친새끼고.

그런 생각을 하자 머릿속이 얼음장처럼 얼어붙는다. 설원은 그대로다. 나도 그대로이긴 했지만, 그 애원에 결국 하려고 했고, 실제로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 역겹고 혐오스러운 인간이다.

설원은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는 듯,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팬티랑 브래지어를 사서 처 입도록 해. 몸에 맞는 옷도 좀 사고.”

“...심리적인 거부감이....”

내가 주저하며 우물거리자 설원이 치고 들어온다.

“내 심리적인 거부감이 더 우선이야.”

“내 몸인데?”

“물론, 형 몸이지. 하지만.”

설원은 바닥을 가리켰다.

“여긴 내 집이야.”

나가던가, 내 말대로 하던가.

둘 중 하나라는 듯 설원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설원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이런 말 하는 거 미안하지만, 당연히 여자로 보이지.”

물론 외견상의 그대로를 말하는거겠지. 지금 내 모습은 확실히, 남자라고 보는 게 정신나간거니까.

하지만 그건 아플 정도로 내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결국 술을 마시다가 설원은 저가 나가서 속옷과 브래지어, 그리고 트레이닝복을 사왔다.

어지간히 꼴보기 싫은 모양이지. 내가 갈아입으려 하자 설원은 고개를 돌렸다.

“...왜 안 보냐?”

내가 말해도 이상한 소리였지만, 의식적으로 나를 외면하는 그 모습이 어색했다.

“...봐줬으면 좋겠어?”

“그런 건 아니지만, 불편하네.”

덤덤하게 말하려 했지만 덤덤할 수 없다. 변하는거겠지, 당연하게. 설원이 고개를 돌렸고, 녀석은 이제 막 후크를 채우는 나를 보고 있었다.

“...진짜로 보라고 한 건 아니야. 뭐, 봐도 상관없지만.”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나를 설원이 보고 있지만, 아무런 느낌도 안 든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안 든다.

하긴, 애초에 설원은 내가 있어도 속옷을 아무렇게나 벗고 돌아다니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걸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벗고 돌아다니면 벌거벗고 나오지 말라고 지랄을 하곤 했었지.

그런 주제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조금은 뻔뻔할 정도로.

“싫어하지 않았냐.”

“봐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그럼 봐주지 뭐.”

“너 지금, 나를 존나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 같은데.”

“나도 관음하는 취미는 없어.”

지나치게 무덤덤하군.

실망할 것도 없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자연스러운 채로 남아준다면 나는 좋지. 하지만 설원의 그 모습이 노력으로 보이는 건, 착각은 아닐거다.

그래, 노력해라.

나도 여태까지와 같으려 노력할테니까.

여자가 되었다고, 그런 걸 의식하지 않으려 할테니까.

“내가 생각을 잘못 한 것 같아.”

“뭘.”

“브래지어, 굳이 필요없을 것 같은데.”

내 상당히 소담하고 빈곤한 흉부에 대한 말일테지. 나는 채웠던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다.

“그래, 확실히 이거 커.”

“미, 미친! 벗고 지랄이야 갑자기!”

-휙!

내가 브래지어를 툭 던지자 설원이 혼비백산해선 고개를 돌려버린다.

“하.”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는다. 뭐야, 역시 노력한거잖아.

“풋고추 새끼.”

“풋고추고 나발이고 왜 벗느냐고!”

“브래지어 필요 없다길래 벗었다 이 새끼야.”

“진짜 미쳤나봐 썅.... 입어! 입으라고!”

설원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브래지어를 다시 주워 입으면서,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다.

“감당 못 할 거면 주둥이를 싸게 놀리지도 말아야지. 응? 설원.”

후크를 채운 뒤 녀석이 사온 면티와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완전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탓인지 설원은 처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건, 존나. 반칙이야.”

안그래도 이겨먹기 힘든 나를 더 상대하기 힘들어졌다는 걸 인정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든 설원의 볼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등신, 귀엽긴.”

나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술잔을 까딱거렸다.

“뭐해? 안 오고.”

내가 바닥을 탁탁 두드리자 설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앉았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저 못난 새끼의 얼굴이 조금, 귀여워보인다.

술에 취해서, 그런걸거다.

“끄응....”

언제까지 마셨더라.

잘 기억이 안 난다.

냉장고에 있는 걸 다 비워버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편의점에 가서 다시 사오고, 테이블에는 먹다 만 치킨이 그대로 있었다.

자취방에서의 술자리는 항상 이런 끔찍한 광경을 마지막으로 보여줘야만 진정으로 끝난다.

거울을 안 봐도 머리가 산발해 있을 게 뻔하다. 긴 머리는 귀찮다.

시간 날 때 숏컷으로 잘라버리자. 아예 짧게 깎아버리는 건 못 할 짓인 것 같긴 한데, 적당히 짧은 머리가 좋을 것 같다. 아직 서늘한 공기 탓인지 이불을 나가기가 싫다.

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아침공기가 평소보다 더욱 시리고 아리게 느껴진다. 추위에도 약해진건가.

“으으....”

“!”

옆에서 뭔가, 신음을 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다.

당연히, 거기에 있는 건 설원이었다. 거의 나와 꼭 붙을 것 같지만 붙지는 않은 거리에서, 설원이 웅크린 채 자고있다.

아니, 이 좁은 싱글배드에서 굳이 같이 잤다고? 내가 아래에서 자건, 저가 아래에서 자건 해야 할 거 아닌가? 뭐, 자연스럽길 원하는 건 맞지만, 애초에 내가 휴가를 나온다 해도 이렇게 같은 침대에서 자지는 않았다.

주로 내가 바닥에서 자는 편이었다. 손님 주제에 침대까지 뺐는 건 원치 않았으니까.

별 것 아닌데 신경쓰인다. 그리고 어젯밤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침대에서 자....’

맛이 간 설원의 목소리.

‘아니, 바닥에서 자도 돼....’

나도 맛이 가 있는 건 마찬가지.

‘아이, 침대에서 자라고....’

‘아니, 너가 침대에서 자라고.... 새끼.... 야....’

‘아니 쓰.... 나도 침대에서 잘거거등....’

‘뭐래.... 동침하자 이거냐아....’

‘아이 씨앙.... 보일러.... 고장났어.... 얼어...뒤져....’

‘뭐...? 염병....’

그런 거였다.

설원의 자취방 보일러가 고장나서, 전기장판이 들어오는 침대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건가.

그나저나 동침이라니, 내가 그런 미친소릴 했다고 생각하자 이가 절로 악물렸다. 내가 여자가 된 것에 대한 자의식은 뭐, 당연한 거겠지만 내가 제일 강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신경쓰기 싫지만, 내가 제일 신경쓴다.

엿같은 기분이다. 괜히 심술이 나서, 자는 설원의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다.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술자리의 잔해를 정리한다.

요리는 못 하지만 그래도 청소는 좋아하고, 잘 하는 편이다. 청소를 잘 하는 게 어디 있겠냐만, 청소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잘 한다는 자의식 정도는 가져도 되겠지.

시간은 이제 여덟시 반가량.

군대에서의 습관 때문인지, 늦잠을 자는 게 오히려 버겁다. 고쳐지려면 꽤 걸리겠지.

그러고보니 이 자식 오늘도 평일인데 수업은 잘 가나?

책상을 둘러보자 용케도 이 한량이 시간표를 프린트해뒀다. 오늘은 목요일, 수업은 일교시.

아홉시에 시작이다.

“야, 일어나. 수업가야지.”

“으으....”

“수업가야지. 미친놈아, 졸업은 해야할 거 아냐.”

“아직 한 번밖에 안 빠졌어....”

“...개강 이주차에 하는 말 치곤 꽤 그럴듯한걸.”

-빡!

"일어나라고!"

============================ 작품 후기 ============================

아직 한번밖에 안빠졌어(개강 이주차)

그런데 같은 시간대에서 다른 관점으로 쓰니까 무슨 회귀물 쓰는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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